미래 언어가 온다 - AI가 인간의 말을 지배하는 특이점의 세상
조지은 지음 / 미래의창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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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은 표준어를 정하고 관리한다. 다만 영어는 다르다. '표준어'를 공식적으로 정하는 기관이 없다. 그런 이유로 각 나라마다 사용하는 스펠링과 발음, 어휘 가 다르다.

예전 뉴질랜드에서 살 때 자주 보이던 단어가 'centre'다. 얼핏 '센트레'로 읽힐 것 같지만 '쎈타'에 가깝다. 영어는 표준을 특정 기관이 아니라 권위 있는 사전의 출판사가 결정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나 메리엄 웹마스터 사전이 영어의 표준기준으로 사용된다. 그런 이유로 영어는 유연하게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것이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큰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봉건제도'가 유리했던 것처럼 많은 민족과 사람을 관리하기 위해 영어는 자율성을 인정했다. 당연히 '중앙집권'은 많은 민족과 사람을 관리하기에 불리하다. 고로 영어는 지역에 맞게 변형되고 섞이며 수용한다.

얼마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Daebak'이라는 영어 단어가 등재됐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면 이는 감탄사다. 이 단어의 출처는 한국이다. 이미 예상할 수 있듯, 이 단어의 어원은 한국어 '대박'에서 시작한다. 한류가 세계적 유행이 되며 단순히 컨텐츠 뿐만 아니라, 언어도 수출됐다.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에 따르면 언어는 단순 '정보'를 담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인문학적 사실도 함께 담고 있다. 다시말해 언어가 수출되는 것은 우리로써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렇다고 자만해서도 안된다. 우리 언어의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반면 '영국'의 태도를 보고 느끼는 바도 있어야 한다. 영어가 다양한 민족과 국가, 문화를 수용하는 유연함광 ㅕ유가 그렇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프로그램은 centre, colour, humour와 같은 영국식 철자에 빨간 밑줄을 긋는다. 일부 영국인들은 그러나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때로 우리말은 극성 맞을 정도로 '표준어'를 강조한다. 신조어나 외래어 등에 배타적이다. 다만 우리 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여러 말들이 영어 사전에 먼저 등재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얼마전 로보트 춤을 추는 한 사람의 영상을 본 적 있다. 그 춤사위는 벌써 잊혀졌지만 그 아래 달렸던 댓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기계는 꾸준히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은 꾸준히 기계를 모방한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인공지능 시리를 위해, '기계식 명령어'를 사용하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다.

'시리야, 내일의 날씨 알려줘'

사실, 실제 비서라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각자의 말투와 억양, 사투리가 존재하겠지만, 우리는 기계 앞에서 더 기계처럼 말하곤 한다.

사실 인간이 기계화되고, 기계가 인간화 된다는 것은 거기서 한정되진 않는다. 인간은 점차 덜 학습하고, 기계는 더 학습한다는데 있다.

스마트폰이 보급화되면서 사람들은 덜 스마트해지고 있다. 어떤 이는 '디지털리터리시'를 언급하며 글을 읽는 문해력은 과거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고, 앞으로는 디지털 기기를 잘 사용하는 사람들의 디지털기기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아이에게 디지털기기를 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마트 기기는 원숭이도 쉽게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다. 이를 위해 이른 시기부터 학습과 훈련을 할 필요는 없다.

계산을 이용해야 더 멀리 갈 수 있는 체력이 길러진다는데, 어린시절부터 운동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작동법을 가르치는 격이다.

흔히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우리가 과거의 언어를 보고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유추하는 것처럼, 언어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면 우리의 미래를 유추할 수 있다. 크게는 사회와 문화를 알 수 있지만, 작게는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또한 알 수 있다. '조지은' 작가의 '미래 언어가 온다'는 언어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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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채워진다 -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큰스님의 조언
후지와라 도엔 지음, 김정환 옮김 / 센시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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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욕의 화신'과 같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욕심은 '천하를 상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하급 무사일 때는 하급 무사로서 최선을 다했고, 사무라이 대장이 됐을 때는 사무라이 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한 지역의 영주가 됐을 때는 영주로서 최선을 다했다.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그룹의 창업주가 되겠다는 욕심을 갖지 않았다. 쌀가게에서 그에게 주어진 정리와 경리일에 최선을 다했다. 최근 '퇴사'가 젊은 층에서 인기다. 지금 당장 회사를 뛰쳐나가 '창업'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창업은 취업보다 어려운 일이다. 더 많은 경험과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대책없이 남의 지시를 받지 않지 않는 해방감을 위해 퇴사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티브 잡스 또한 많은 이력서를 돌리며 취업을 고대하는 취업준비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달콤한 결과만 얻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진짜 나쁜 욕심은 그런 것이다.욕심이란 완성에 대한 바람이 아니다. 방향에 대한 바람이다. 즉 이미 완성된 최고 점을 원하기만 하는 것은 욕심이고, 그 방향을 향하고 나아가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고로 욕심은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삶에서 치명적인 나쁜 습관 중 하나는 '꿈'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기대에 대한 충족에 있다. 고로 엄청나게 많은 기대를 하고 그것을 충족하는 것도 행복이고,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완전하게 충족해 내는 것도 행복이다. 고로 행복의 상대성으로 보건데 누구나 그것은 충족해 낼 수 있다. 그렇다. 달성 가능한 목표와 기대감만 있으면 누구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 그러나 목표한 바를 다 이뤄내면 반드시 좋을까. 그렇지 않다.

법연사계의 네가지 규율은 이렇다.

첫째, 세력을 다 사용해서는 안된다.

둘째, 복을 전부 다 받아서는 안된다.

셋째, 규율을 다 행해서는 안된다.

넷째, 좋은 말이라도 다 해서는 안된다.

최선을 다해서는 안된다. 이말은 과정에서의 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에서의 최선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과정에서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서는 최선을 원해서는 안된다.

이렇다. 만약 심험에서 80점의 성적을 얻었다고 해보자. 보통 자신이 받은 점수에서 최선의 진학을 희망한다. 그러나 그러면 안된다는 의미다. 이는 내 기대치를 최대로 끌어 올린 숫자다. 즉 다시 말해서 자신의 최선에 가까워 질수록 기대치는 높아지고 그것이 달성될 가능성은 반비례로 낮아진다.

인생에는 목표가 없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일이지, 목표글 달성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은 아니다. 삶의 목표를 찾다보면 결과적으로 죽음 밖에는 없다. 고로 인생의 목표가 목표가 되기보다는 재미와 의미, 행복에 목표를 두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난과 부유함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가 뭐래도 부유함이다. 고로 우리가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부'는 꽤 필수요소 중 하나에 속한다.

영화 '라임라이트'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늙은 코미디언은 실의에 빠진 무용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어. 그러려면 세가지가 필요해. 용기, 상상력, 그리고 약간의 돈 말이야."

인생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듣기 좋은 말이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물론 많다. 그러나 그것이 돈이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고 흑이 아니면 백이거나, 백이 아니면 흑인 건 아니다. 돈 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돈은 역시 중요하다.

독립운동가 '오광심'은 조선혁명단에서 비밀 연락활동을 전개하고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으며 광복군으로 활동을 했다. 그가 '안중근 의사'보다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훌륭한 인물이다.

영화 올드보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모래알이던, 바위던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다'

과유불급,

뭐든 극단적으로 나아가서는 좋지 않다. 항상 어느정도의 중도가 중요하며 때로는 그것은 좋은면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학식과 경험은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배웠던 경력과 경험을 쌓는다는 명분으로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분명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굉장히 좋은 스승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 있어도 1학년은 2학년이 되고, 스무살은 스물 한살이 된다. 이처럼 가만히 있어도 채우기가 저절로 이뤄지는 세상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채우고 살아가는가. 몇년 째 열어보지 않은 서랍 속에는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가 있고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부정의 찌꺼기들이 있는가. 그러고보면 채우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비우는 것'은 일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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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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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SF소설'이다.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유추할 수 없었다. 소설은 문어와 대게, 해파리와 고래 등 다양한 해양 생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라니, 궁금증이 인다. 여기에 언급되는 해산물들은 그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하고 인간과 교류까지 한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이 더 흥미롭다. 소설의 소재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흥미 뒤로 숨겨진 날카로운 문제 의식은 그러나 흥미로 그치지 않는다.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문어와 만난다. 어떻게 이 장면을 읽고 다음을 읽지 않을 수 있는가. 떠다니는 문어를 삶아 먹어버린 남자와 그를 추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딘가 어색하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며 말한다. 이렇게 세계의 독특한 세계관이 시작과 동시에 펼쳐진다. 대게의 이야기는 더 흥미로워진다. 대게는 러시아어를 구사한다. 자신이 러시아 심해에 가스관을 짓고 있다고 말한다. 대게들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고용되어 가스관을 건설을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 한 번씩은 들어 볼 법한 가스관들이다. 인간은 대게에 수주를 주고 건설을 맡긴다. 다만 대게와 동료들,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더 긴장감을 고조한다.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소설은 환경와 인간의 탐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히 떠다니는 문어를 잡아먹은 독특한 소재의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사회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고 즐길 수 있지만 생각해 볼 부분도 충분히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 때문에 위협받고 죽고 다치고 노예로 잡혔던 동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인간에게 복수하기로 결의했다면 인간은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실제로 동물들이 마음을 먹으면 인간은 충분히 위협받고도 남는다. 개미는 전 세계적으로 약 20경 마리에 이르는데 그 무게는 12메가톤이다. 이는 모든 야생 조류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포유류의 총질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심지어 모든 인간을 성인이라고 가정해도 개미가 인간보다 2.5배는 더 무겁다.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최근 읽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책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에 비해 월등한 지적 능력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우리의 지능은 분명 여타 동물과 비견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것은 맞다. 다만 그것이 문명을 만들어낸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인간은 40만년 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열매를 먹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에서 골수를 빼먹었다. 인간의 경쟁 상대는 '하이에나' 혹은 '까마귀'였다. 현대 인류가 동물과 월등히 차이나는 문명을 갖게 된 것은 '지능'보다는 '사회화' 때문이다.

'사회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이성을 선택할 때조차 생존과 전혀 상관 없는는 '외모'를 살핀다. 눈코입의 위치와 피부톤의 밝기와 부드러운 정도가 이성을 선택하는데 요인이다.

시장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한다. 또한 성선택에 의해 열등인자는 도태된다. 다만 시장 경쟁 중 기능적으로 평준화된다면, 선택자는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디자인을 선택한다. 좋은 디자인은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고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스마트폰을 보면 모든 스마트폰의 기능이 상향 평준화되다보니 결과적으로 '디자인'적인 요소가 승부 요인으로 작용한다.

생존 필수 요소가 충족된 이후에 외적인 요인을 찾게 되는 것은 본능과 같다. 오랜만에 나간 동창화에 '루이비통 가방'과 '두루마리 휴지' 중 어떤 것을 챙겨가야 하는지를 선택하게 한다면 당연 전자다. 즉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크게 줄어 들기도 한다.

얼마전 일본 유튜브에 100일 후에 먹히는 돼지에 관한 영상이 올라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채널의 주인을 비난했다. 다만 인간이 키운 돼지와 식탁 위의 그것과의 차이라면 '관계 형성'을 했다는 것 밖에 없다. 인간성이란 결국 '관계형성'에 있다. 우리는 이름 지은 소를 죽이지 못하고 애원으로 키운 돼지를 먹지 못한다. 정보라의 소설에는 맛있는 해산물들이 말을 하고 인간과 협업을 하기도 한다. 단지 말을 하고 관계를 형성할 조건이 생겼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을 동등하게 여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은 철학의 범위에 있다. 스스로 운전하는 자동차나 인공지능과 같은 것들을 인간처럼 대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작은 막은 매우 얇고 연약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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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비우기 - 삶이 복잡하고 무거운 당신에게
가비 림멜레 지음, 장혜경 옮김 / 터치아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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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에는 '이과수 폭포'가 있다. 이과수 폭포는 아름다움으로 꽤 유명하다. 이 폭포는 아르헨티나가 80%를 소유하고 있고 브라질이 20%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폭포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브라질로 행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보다 훨씬 더 웅장한 폭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제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더 모른다.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해 브라질로 행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때로 한발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상대를 바라보는 일이 더 쉽다. 자신의 표정을 아는 것보다 상대의 표정을 보는 것이 더 직관적으로 편하다.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보다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호흡을 보는 편이 훨씬 쉽다. 고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오히려 더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호흡을 하고 있는지, 우리의 목소리는 어떤지, 표정과 말투는 어떤지 그것을 잘 관찰해야 다음 우리 선택을 현명하게 할 수 있다.

욕망에 휩쌓일 때,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달릴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무한대로 가속하며 달려 나간다. 욕망과 바람을 살피지 못하고 끌면 끌려가는 자석과 쇳덩이 같은 관계를 가진다. 욕망이 끌면 끌리는대로 따라가고 다른 욕망이 자석이 되어 끌어당기면 우리는 역시 그 방향으로 언제든 끌려간다. 그러니 주체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엉터리 자아가 형성된다. 방향성도 없이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고로 자신의 욕망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선택과 집중'에서 어떤 욕망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욕망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고로 욕망을 알기 위해서 선호를 알아야하고 선호를 알게되면 가치관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해야 한다. 치약을 뚜껑을 열고 뚜껑이 아닌 치약을 갔다버리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옵션에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야하며 그 욕망의 끌림에 어느정도 응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패턴'을 살펴봐야 한다. 사람의 소비패턴은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한다.

2012년 미국의 대형소매 업체 타겟에서는 소비자의 행동 분석과 그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소비자가 선호할만한 할인 쿠폰을 우편으로 보냈다. 그런데 한 부모가 마트로 항의를 했다. 자신의 자녀는 여고생인데 어째서 임산부 용품관련 할인 쿠폰을 보냈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여고생은 실제로 임신한 상태였으며 타겟의 예측 모델은 여고생의 평소 구매 패턴을 통해서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지출이란 우리가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돈'을 포기해서라도 얻고 무언가다. 바로 '돈' 보다 상위한 우리의 '욕망들'이다. 소비를 관찰하는 것은 욕망이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경험에 비용을 지불하고, 어떤 이들은 사치품에 비용을 지불한다. 누군가는 여행하는데 돈을 쓰고 누군가는 운동을 하는데 비용을 치룬다. 사람마다 돈을 포기하게 만드는 욕망의 모양이 각자 다르다. 고로 무엇에 지출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우리를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에서 자유로운가. 구매하는 것은 욕망에 끌리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은 지난 욕망에 미련을 갖는 것이다. 고로 무엇을 구매했는지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혹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유통기한 지난 조미료? 곰팡이가 쓸고 눌러 붙은 영양제? 사용하지 않는 치약뚜껑이나 고장난 전자기기? 꼬여 있는 충전선이 저 보이지 않는 서랍 구석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버리지 못한 미련들은 물리적 공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간에서도 우리의 여유를 좀먹는다.

20세기, 물품의 대량 생산은 시작됐다. 소품종 대량 생산의 시작이다. 포디즘과 테일러리즘 덕분에 이는 가능해졌다. 포디즘은 '포드 자동차'의 창업주 '포드'의 이름을 땄다. 생산 조립라인을 표준화하는 것이다. 생산 공정을 표준화하면 물품은 빠르고 쉽게 생산된다. 테일러리즘은 '프레드릭 윈즐로 테일러'의 이론이다. 포디즘에 기반이기도 하다. 작업을 세분화하고 표준화하여 효율적으로 물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후 '플라스틱'이 개발되면서 더 싸고 더 편한 물품이 대량으로 나오게 됐다. 원래 피아노 한 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마리의 코끼리를 죽여야 했다. 지금은 석유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얻게 된 부산물로 쉽고 싸게 플라스틱을 만들어 버린다. 고로 대부분의 물건 값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저렴해져 버렸다. 고로 어떻게 되어 버렸는가. 우리는 함부로 사고, 버리지 못하며 계속 쌓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욕망과 미련에 쉽게 유혹되어 종속되어 버린다. 때로 그 종속을 더하기 위해 '대출'을 받고 또다른 종속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체적인 삶은 어디에 있는가. 버리다보면 들이는 일도 신중해진다. 그럼 욕망에 덜 끌리고, 소유에 덜 미련을 가지며 그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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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가 알려주는 염증 제로 습관 50
이마이 가즈아키 지음, 오시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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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산소를 만나면 녹이 스는 것 처럼, 인간의 세포도 산소와 만나면 염증이 일어난다. 산소는 세포에 반드시 필요한 원소인 동시에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세포에 '녹'이 슬도록 하는 산소의 반응산물을 활성산소라고 한다.

아무리 아끼고 타도 오래된 자동차는 어딘가 녹이 슬기마련이다. 우리 몸도 그렇다. 관리를 잘하더라도 어딘가에 염증이 발견한다. 자동차에는 평균 3만 5천개의 부품이 사용된다. 인간의 세포는 대략 35조 개이다. 단순 비교가 옳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자동차보다 10억배 이상은 더 복잡하다. 고로 가만히 숨만 쉬며 시간을 보내도 우리의 몸은 쇠퇴한다. 다만 같은 물건이라도 관리에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 가령 어떤 자동차는 꾸준한 기름칠과 관리로 30년이 지나서도 문제가 없는 반면, 어떤 자동차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녹이 슬기도 한다.

자동차를 아끼는 사람은 이를 알고 매일 기름칠하고 닦는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어떤가. 우리몸도 비슷하다. 우리몸을 이루는 35조에서 37조 개의 세포는 자동차보다는 더 복잡하고 염증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공들여 할부금을 갚는 고급 스포츠카보다 태어나면서 당연하게 주어진 '몸뚱이'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오래 전에 받아서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지는 이 몸뚱이를 고급 스포츠카보다 더 아끼고 관리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첫째, 매번 식사할 때, 한입에 30번 씹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한 자료에 따르면 한끼를 먹을 때 씹는 횟수가 13세기에는 2,654회였다. 그러다 20세기초가 되면서는 1420회로 크게 줄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습관은 '폭식'을 유발하고 내부 장기들이 과도하게 작동하도록 한다. 오래 사용하는 아이폰 뒷판이 뜨끈해지면 배터리 수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듯, 우리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도록 내부 장기를 두어서는 안된다. 적게 씹으면 음식물은 덜 분해가 된 상태로 위에 도달한다. 덜 분해가 된 음식을 분해하기 위해, 위장은 더 많은 위산을 분비한다. 더 많은 위산이 분비되면 위벽이 자극을 받아 장기적으로 세포 손상이나 염증이 발생한다. 대체로 '소식'을 하거나 '마른 유형'의 사람을 보면 한 입을 물고 보통 사람보다 오래 씹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오래 씹으면 식사시간이 길어지고 위가 포만감을 느끼는데 걸리는 지연 시간인 20분 이상을 초과하여 더 적게 먹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둘째, 앉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회가 되면 앉으려는 엉덩이 무거운 현대인들에게 '반이나 남은 물'이라고 한다면 앉을 수록 손해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오래 앉아 있을 수록 손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앉지 못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기는 편이 낫다. 걸을 시간이 현저하게 적은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걸을 수 없다면 차라리 서는 편이 낫다. 인간의 근육은 상체에 60%, 하체에 40%가 몰려 있다.

예전에 헬스장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다이어트를 하려면 '상체 근육'이 아니라 '하체 근육'을 운동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근육량으로만 비교하면 상체가 더 많은데 왜 하체 근육을 키우라고 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다. 상체 근육은 밀고 당기는 동작처럼 기능적인 역할을 많이 한다. 고로 기능별로 더 세밀하게 나눠져 있다. 반면 하체의 경우에는 가장 큰 근육 그룹이 있는 부위로 하체 근육이 발달하면 기초대사율이 증가한다. 기초대사율이란 단순히 현상 유지만을 위해 사용되는 '열량'을 말한다. 고로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어도 누군가는 더 많은 열량을 태운다는 의미다. 근육은 같은 부피의 지방에 비해 3배나 더 무겁다. 고로 쉽게 말해 근육은 고무줄, 지방은 솜과 같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과 밑으로 뒤룩뒤룩 삐져나온 솜은 분명 같은 무게임에도 보기에 달라진다. 고로 하체를 평소에 사용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셋째, 혼잣말을 할 때, 자신을 3인칭 시점으로 불러라.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것은 정신건강에 몹시 좋다. 어제 다율이가 하율이에게 '수수께기 문제집'으로 문제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문제는 이랬다.

"내것인데 남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정답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름'이었다. 이름은 분명 나의 것인데, 가만보면 나는 하루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부를 때, 보통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대명사 나'는 '인환'이라는 고유명사를 대신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언뜻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성의없이 대명사를 쓰곤한다.

'야, 저기 너 앞에 그거 좀 거시기 해봐라.'

이런 대화법에서 상실한 것은 '고유한 정체성'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야, 너, 저기'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편이 우리를 각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하루 평균 4만에서 7만 번의 혼잣말을 한다. 이 혼잣말에 대부분 '주어'가 생략되거나, '대명사'인 경우가 많다. 특히 동양에서는 '주어'가 자주 생략되곤 하는데, 이는 '집단'을 중요하게 여기던 과거 농경시대의 언어적 습관이기도 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문장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이 문장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고로 모호한 상태와 동작이 안개를 가로 지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글이 영미권으로 번역될 때, 언어의 특성상 부득이하게 임의적 '주어'를 만들어 넣었다. 고로 온전하게 그 문학의 어감이 전달되지 않았다. 참고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3인칭 시점으로 불러 자아의 정체를 살려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쉼.

최근 나의 최대 관심사는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줄이는 것이다. 인맥, 물건을 포함하여 하나씩 줄여나간다. 요즘 학원가에서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스마트폰을 꺼낸다. 쉰다는 개념이 잘못 들어섰다. 쉰다는 개념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한숨을 '쉬다'처럼 숨을 내뱉는 일이다.

다만 현대인들은 대부분은 '쉼'이라는 표현에도 '열정'을 담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SNS를 확인하고 게임을 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은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에너지를 요한다. 다시말해서 '일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는 것'은 일하다가 다시 노는 것이다. 그렇다면 쉼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재밌게 놀더라도 쉼이 있어야 한다. 하루종일 놀다가는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일하다가 다시 놀다가, 다시 일하다가를 반복하는 것은 뇌의 입장에서 '피로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을 이미한다. 피로한 뇌는 더 빠르게 노화되고 기능저하를 겪는다. 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외부 자극과 정보를 줄이고 가만히 눈을 감고 말 그대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것의 최고는 전인류사의 맥락을 보건데 '명상'과 '잠'이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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