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한국사 2 근현대 - 김진영 선생님,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 생강 시리즈
김진영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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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유효한 인간의 본능.

'편하게 일하고 싶다.'

이는 게으름이나 방만이 아니라 '효율성'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인물이 있다. '제임스 와트'다. 그는 기존의 증기기관을 개선하여 더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싶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방직 공장은 강이나 하천 등에 위치해야 했다. 이유는 물이 떨어지는 낙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낙수는 수차를 돌리고 수차는 기계를 돌렸다. 이러한 방식으로 방직기는 돌아갔다.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반드시 강과 하천 같은 지리적 조건이 필요했으며, 계절에 따라 수위 변동이 심했다. 혹여 가뭄이나 홍수가 발생하면 생산량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공급량이 일정하지 않으니, 가격에 대한 변동이 커지고 생산자는 그 위험부담을 안아야 했다. 이것이 사업적으로 꽤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불안정한 사업은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다 앞서말한 '제임스 와트'는 수력을 이용하지 않는 방식을 생각하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떨어지는 물이 없어도 바퀴를 돌릴 수 있을까.'

그는 기존에 있던 증기기관을 개선하기로 했다. 증기기관은 무엇일까. 증기기관은 물을 끓여 그 증기로 피스톤을 움직이고 그 피스톤이 바퀴를 돌리게 하는 원리였다. 이는 산업혁명의 불씨를 당겼다. 영국은 비교적 석탄이 흔한 지역이었다. 특히 뉴캐슬, 랭커셔, 요크셔, 웨일스 지역에 석탄이 흔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 석탄 생산은 활발했다.

영국의 기후는 대체로 습하고 추운 편이다. 당시 석탄 난방은 영국 가정에서 매우 흔한 방식이었다. 이런 산업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으로 활발한 석탄 산업이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원료인 '석탄'을 활용하여 작동하는 '와트'의 증기기관은 말그대로 혁명이었다.

공장들은 더이상 자연수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위치에서 자유로워지고 일정한 생산량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면직물 생산의 효율을 높였다. 면직물 생산량이 일관적이고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가격은 낮아졌다. 높아지는 공급과 포화된 수요는 필연적으로 '경제 침체와 공황'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산업혁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경제 공황과 침체가 발생했다. 이에 영국은 생산된 제품을 '수출'하여 생산공급에 맞는 '수요처'를 찾고자 했다. 그렇게 영국의 시선이 밖을 향하여 찾게 된 것이 '식민지'다. 식민지는 '값싼 노동력과 원료의 출처'이자 '좋은 판매처'였다. 제국주의는 이렇게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가'를 낳았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자본가는 '서구 자본'을 말한다. 즉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값싸게' 원료를 공급해 갔고, 식민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사용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제국'의 자본가와 '식민의 '노동가'라는 계급이 탄생했다.

이때,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국가 중에 '제국주의'에 합류하지 못한 국가가 있다. 바로 '독일', '미국', '소련'이다.

독일은 1871년 뒤늦게 통일을 하고 빠르게 산업화를 이뤘으나 이미 제국 열강들이 많은 식민지를 확보한 상황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미국은 광대한 영토와 자원 덕분에 식민지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고 소련의 경우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토대로 방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 식민지가 필요치 않았다. 이 세 국가는 이후 근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식민지는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 공급원이자 새로운 시장이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산력이 크게 늘었으나 공급과잉은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1873년과 1890년대에 유럽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독일은 높은 생산성을 토대로한 군사력을 가졌다. 이에 따라 식민지 확보를 하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기존 열강들과 충돌이 잦아졌다.

미국은 커다란 시장과 원자재를 갖고 있어,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소련의 경우는 달랐다. 소련의 초반인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말까지도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을 하고 있었다. 산업화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서구 기업들은 러시아의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는 외국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문제를 발생했다.

이에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이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혁명이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된다. 여기에는 '노동자'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 된다.

이미 제국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볼세비키 혁명은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이념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추구하면서 공산주의는 곧 식민지 해방과 국가 건설로 여겨진 것이다. 실제로 식민지였던 일부 국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술비했다. 1949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기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했으며,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이 프랑스와 맞서 싸우고 미국과 전쟁을 통해 공산국가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조선도 비슷한 바람이 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은 일부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자본가, 즉 서구열강의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와 경제적 부당성, 양극화 등에 맞서기 위해 1920년 조선에서도 다양한 사회주의 단체가 결성된다. 이들은 당시 조선 사회 다수를 이루던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일본 자본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운동을 버린다.

일본제국은 당연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탄압하였다. 이렇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이데올로기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와중에 미국과의 패전에서 갑작스러운 일본 제국이 패망하며 갑작스러운 '독립'이 이루어진다.

식민지 지배는 꽤 큰 인적,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비용이나 행정비용이 들어가고 치안 유치를 비롯한 다양한 발생이 필요하다. 이미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식민지'를 건설할 필요가 크게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는 '국영 기업체'를 통해 경제를 조정하고 국가산업화를 추진하고자 하는데, 이는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하게 만든다. 또한 미국은 '자본가'들의 나라다. 고로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괄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미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세워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갖고 있는 소련 정부는 그들의 정책 방향성을 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일관적으로 이끌 수 밖에 없었다. 고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정치적, 안보적 동맹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경을 맞닿고 있는 조선의 독립에 적극 지원하며 사회주의화 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남쪽으로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북쪽'으로는 소련의 '사회주의'가 부딪치면서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이 발생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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