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국사 2 경제.사회편 - EBS 이희명 선생님 생강 시리즈
이희명 지음 / 스터디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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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쇄국정책'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는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로 묘사할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피면 '쇄국정책'이 '그나마의 최선'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다. 이는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연관있다. 조선 후기의 조세 체계는 주로 '토지'를 기반으로 했다. 다시말해, 세수 확보를 위해 정부는 농업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했다. 반면 상공업의 발달은 자본과 자원의 분산을 의미하며 중앙 집권 통제력을 약화 시키는 요인으로 여겼다. 상공업이 발달하면 경제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다. 이는 새로운 사회 계층의 출현을 의미한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상공업이 발달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발생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의 발달이 끝이 아니다. 이는 영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었다. 영국은 도시화가 가속화 됐고 중산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688년에는 명예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이 제한되고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로 전환됐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는 경제적 변화가 우선한다. 프랑스도 상공업과 제조업이 발달하며 '부르주아'라는 신흥 계급이 생겨난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맞는 정치적 권리를 주장한다. 이런 결과로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우리가 말하는 시대는 '조선왕조시대'다. '조선왕조'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은 '왕조'의 몰락이다. 상공업을 발달하고 서양과 무역을 하며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과 결이 맞지 않는다. 결국 조선이 건국 당시부터 갖고 있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았을 뿐이다.

'중앙집권체제'가 '상공업의 발달'을 막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중앙집권체제는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일관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일관된 규범과 기준을 확립하도록 한다. 대규모 프로젝트와 안보 정책에 효율적이고 빠른 의사결정 능력과 표준화 시스템을 가질 수 있다. 실례로 봉건국가였던 네덜란드가 중앙집권국가였던 영국에게 패권을 넘겨 주었던 사례를 본다면 정치체제는 그 시대에 따라 장단점이 있을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흥선대원군 시대의 조선은 상공업이 구조적으로 발달할 수 없는 '농업 기반 사회'였다. 이런 농업 기반 사회에서 외국과의 무역은 자칫 중대한 안보적 위기를 만들어낸다.

공급과 수요의 법칙

공급보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올라간다. 다시,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은 내려간다. 이 법칙에 따라 쌀 가격은 크게 요동친다. 농업 기반 사회인 조선의 '쌀 생산량'은 거의 정해져 있다. 게다가 19세기 조선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던 시기다. 분쟁이 줄고 중앙 권력의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세도정치'하면 정치적 불안감이 커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극소수의 권력이 국가를 운영되면 정치적으로는 안정화에 접어든다. 이런 이유에 조선 후기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즉,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농업생산량은 정해져 있는데 수요가 폭발하는 것이다. 이는 쌀값폭등으로 이어진다. 당시의 쌀은 지금의 쌀과는 다르다.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쌀'이다. 노동력이나 군운용도 모두 쌀로 지급한다. 고로 '쌀값폭등'은 현대로 치자면, '오일쇼크'나 '하이퍼 인플레이션'와 비견할 수 있다. 조선의 주요 생산품이 '쌀'인 와중에 '외국'과 교역을 한다면 조선 내부의 '쌀'이 외부로 반출된다. 쌀이 반출되면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쌀값이 폭등한다. 쌀값이 폭등하면 국가 운영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친다.

일단 '군 운용비용이 증가'한다. 쌀값이 폭등하면 국가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증가한다. 당시 군인들에게 지급하던 임금은 '쌀'이었다. 또한 군인들의 식량 조달에 대한 비용이 상승하고 전체 국방 예산에 대한 부담이 높아진다. 또한 중앙 집권 국가의 큰 장점이던 대규모 사업 또한 불가능해진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임금 부담'도 대폭 높아진다. 또한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사회적 불안과 불만을 증가 시킨다. 상류 계급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라도 도시 빈민이나 농민들의 반란이나 소요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사적으로 개항'을 막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생겨난다. 반면 조선과 교역상대는 어떤가. 교역 상대국은 '기계를 통한 엄청난 생산성'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들어오는 저렴한 상품들은 국내 산업을 위협한다. 즉,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그가 단순히 고지식한 '노인'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인으로써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실제로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맞는다.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의 항구를 개항하면서, 일본 외에도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시작한다. 실제로 교역이 시작되면서 대량의 곡물이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 반대로 값싼 공산품이 수입된다. 이런 상황은 결국 '조선내부의 쌀부족' 현상으로 이어진다.

흥선대원군이 우려대로 쌀이 부족해지자, 쌀값이 상승했고 물가는 폭등했다. 게다가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아, 귀금속이 대량으로 해외에 유출된다. 일부 지주는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그 이익을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되어 대지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쌀에 대한 '시장독점'과 '수요폭발'이 일어나자, 국가는 '군인'에게 지급할 '임금'인 쌀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1882년 쌀겨와 모래가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좋지 못한 급여를 받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그것이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의 진압과정에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로써 조선의 내정에 대한 청의 간섭은 더 커진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군대는 조선에 주둔하게 된다. 이후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차 확대된다. 그 과정에서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는데, 외국 공사관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제로 고종이 직접 러시아로 간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외교 관례와 영토의 개념으로 볼 때, 조선의 황제가 러시아의 영토로 피신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로시아는 러시아인을 조선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앉히고 광산 채굴권이나 삼림 벌채권을 얻었다. 그러나 쌀유출은 계속 이어졌다. 철도가 놓이며 더 많은 식량과 자원이 철도와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 쌀값 폭등은 더 가속화된다. 뒤늦게 '방곡령'을 통해 쌀의 유출을 막아보려고도 했으나, 이미 구조적으로 경제적 파탄이 났기 늦은 상황이었다.

일본 또한 조선의 쌀값폭등이 달갑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수입국이었기에, 조선의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조선의 쌀을 증식하여 쌀 생산량을 높이는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증산에 필요한 시설을 확대하고 화학비료를 사용을 권장한다. 실제로 더 많은 쌀이 생산되었으나 수확량에 비례하여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쌀값이 안정되지 않았다. 식량 사정도 악화됐다. 쌀값이 높아지자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처지에 쳐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항이 불러 일으킨 연쇄적인 불행의 도미노는 국가의 재정과 안보를 파탄시키고, 결국 '경술국치'까지 이어진다.

가만 보면,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의 멸망은 시대적으로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경제'가 '안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지독한 방식으로 학습했다. 어느 통계를 보니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돈'과 '경제'에 삶의 촛점을 맞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삶'에 직결된다는 위기감을 우리 모두가 역사를 통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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