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연대기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유정호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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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세조는 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영화 '관상'으로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그는 '성공적인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된다. 반정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반정에 대한 역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게 역사는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세조의 이야기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조의 '성공적인 반역'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의 공과 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그 평가가 각각의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음도 알고 있다. 세조 뿐만 아니다. 선조의 몽진, 광해의 폐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해석은 일방향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대체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조선왕조실록'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원치 않는 기록이나 불리한 기록이 있을 수 있다. 하물며 왕의 기록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록은 왕명에 반하는 내용까지 기록한다. 시대가 흘러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해도 우리가 그 사건을 오해없이 바라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객관성 때문이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정도전과 새 국가를 건설했을 때부터 순종시대의 '경술국치'까지 500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보면 꼭 잘 짜여진 한편의 드라마 같다. 만들어지고 흥하고 쇠하고 망하기까지의 전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부분이 많다. 육아는 사람이 완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일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사람이 성장 과정을 배우며, 느끼는 바는 우리 모두는 환경도 어찌할 바 없는 '내재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기본 '시스템'은 그게 DNA에 각인이 되었는지 어쩐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설정된 시스템에 따라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쌍둥이를 키우며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두 아이의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내재적 시스템'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처럼 어찌할 바 없이 정해진 무언가를 '숙명'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조선의 건국부터 짜여진 '숙명' 같은 시스템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연유로 조선의 흥망성쇠를 이끌었을까.

조선이 건국되기 전, 고려는 봉건주의 국가였다. 군사적 공로에 따라 토지를 수여하고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공로자가 취하는 구조다. 그러다보니 귀족이라는 강력한 권력이 탄생했다. 귀족과 무인은 점차 세력이 확장되며 중앙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하다보니 지방 호족의 세력이 강해졌고 각각이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도도 낮았다. 그 결과, 국제적 이벤트에 대한 대응이 약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이성계는 이런 봉건제도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폐해에 대해서는 최근 방영하고 있는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침에 대한 대응 전략 부재, 귀족 간의 권력 다툼, 내란 등 고려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시스템의 한계는 혼란스러운 사회를 야기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전 후, 고려의 군사력은 명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성계의 눈에 해당 출정은 비합리적인 봉건제도의 결정판이 었을지 모른다.

이로써 태조는 중앙집권된 체제를 꿈꿨다. 군사력을 효율적으로조직하고 지위하는데에는 중앙집권 체제가 필수적이었다. 봉건국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후의 왕들은 짜여진 시스템에 걸맞는 성장을 촉진한다.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토지 관리를 정비하며 세수를 확보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유교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사회가 통합하면서 조선은 '안정적인 국가'로 거듭난다.

파편적인 '불교'의 성향을 벗어버리고, 질서정연한 '유교'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장려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유교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왕과 신하 사이의 도덕적 관계와 책임을 강조한다. 즉, 왕은 신하의 조언을 경청하고 정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됐다. 그 결과 조선은 '신하'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의 민주주의가 삼권분립에 의해 국가 권력을 분산하고 약화시키는 것처럼 왕권과 신권은 서로 견제하고 화합하며 국가를 운용해 나갔다.

정도전이 제시한 이념은 당시 혁신적이었는데,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명명하며 국왕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대표라는 인식을 갖는다. 이런 인식은 조선 500년 간 꾸준했다. 중종반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종은 스스로 반정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신하들에 의해 왕이 된 인물이다. 또한 조선 후기 철종은 정치란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신하들에 의해 왕위로 추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신하에 의해 제거되고 추대되기도 했다. 반대로 왕들은 왕위에 있으며 신하들의 반정을 언제나 견제하고 경계했다. 이런 시스템은 조선의 전근대까지 잘 이끌어 왔다. 다만, 중앙집권 체제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은 가능했지만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변화에 대응하는 유연성은 부족해싸. 경직된 중앙집권 체계는 사회 내부적으로 다양한 정치 세력에 대한 투쟁을 더 중시하게 됐다. 즉, 내부적으로 살아남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국가가 되어 결과적으로 외부 위협에 대한 효과적 전략을 갖지 못했다. 중앙집권적 체계는 외부 세계와 교류를 업격하게 통제했다.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통제 하다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유입, 새로운 세력과 부에 대한 견제가 따라온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무역'은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중범죄다. 이런 조선의 '내재적 DNA'는 산업혁명을 저해했다. 그저 조선의 정책 결정자들은 '산업'보다 '농업'을 중시했으며, 이는 '변화'보다 '유지와 질서' 그리고 '안정'에 더 촛점을 맞추게 되는 '조선의 태생적 DNA'였다.

결론적으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협력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탄생에 결정적이었으나, 봉건적 국가인 고려가 중앙집권적 국가인 조선에 멸하고, 다시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이 시대에 다시 흥하는 것 처럼,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으며 절대적이고 완전한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 역사 500년을 살피면 하나의 왕, 하나의 세대, 하나의 시대가 스치듯 지나가지면, 결과적으로 인생 100년과 너무도 닮아 있다. 고로 삶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 즉, 나를 흥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그것이 맞나게 되는 시대와 타이밍이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나를 흥하게 할 무기가 되어 줄 어느날을 기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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