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사랑 - 낭만의 혁명과 연애의 탄생
고은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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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은 '우정'이 존재하는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정은 무엇일까?' 우정은 상호간에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한 관계다. 그렇다면 남녀 사이에도 충분히 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정의할 때, 또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사랑 또한 강한 애착과 감정적 의존성을 만든다. 우정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에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고 때로 더 깊은 연결성과 감정적 연결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성'이다. 사랑과 우정에는 '목적의 유무'에 따른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을 말하기에,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나, 전우애, 동지애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바는 아니다. 이성 간의 사랑을 볼 때, 대체적으로 이 감정은 '육체적, 정서적, 문화적 요소'에서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목적성을 띈다. 쉽게 말해 이성은 '결혼'이라는 문화적 목적성을 '완성'으로 두고, 육체적 관계를 목적으로 두며, 정서적으로 상대의 감정적 독점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반면 '우정'은 '목적성'을 띄지 않는다. 우정에는 '완성'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상호관계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 간의 우정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만남에 '목적성'을 둘 수 있느냐가 중요한 듯 보인다.

역사의 이야기를 해보자. 과거 서양에서 '우정'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 아둔하게도 과거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다고 여겼다. 고로 여성에게 '우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다 여성의 정신적 능력이 재평가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부터다.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던 남성들은 여성과의 순수한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볼데마르'가 그렇다. 볼데마르는 '헨리에테'라는 분별력 있고 이해심 많은 여성을 만난다. 이후 그녀를 친구로 삼겠다는 결심한다. 결심 이후 그는 '헨리에테'와 결혼을 격렬하게 거부한다. 자신의 우정이 사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심한 탓이다. 그는 그녀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한다. 무릇 우정이란 순수하게 '정신적 관계'여야 하기에 '볼데마르'는 우정을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높게 평가했다. 우정에 대한 과거인들의 생각은 역시, '순수한 정신적 관계' 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위태로움에 대해 인지했다는 듯, 그는 그 순수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남녀 간에 순수한 '우정'이 이런 장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독일에서는 '삼자결혼'이라는 관계도 있었다. 삼자결혼이라는 관계는 이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이것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와 다르다. 한 사람이 여러 이성에 대한 '정신적 신체적' 독점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관계였다. '에밀리에 폰 베를랩슈'는 소설가 '장 파울'에게 다른 여성과의 결혼을 권유하면서 자신을 그 옆 친구로 살고 싶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신'과 '육체'에 대한 사랑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사랑'이 그렇게 과거 유럽에서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때로 일부는 일체적인 사랑을 더 본질에 가깝다고 봤다. 사랑에는 우정, 사교, 욕망, 열정 등이 모두 담겨져 있고 성적인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열정으로의 사랑'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가령, 종교, 도덕, 철학 등의 담론이 난무할 수 있다. 이 와중 그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곁다리를 붙일 수 없다는 의미다. 본질은 단순하여 그 자체가 물음이자 정답인 경우가 많다. 고로 사랑은 설명 불가하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바라본다. 누군가는 꽃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꽃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이를 '자기준거성'이라고 한다. 사랑은 '자기준거성'을 통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되고 이해된다. 즉, 사랑에 대한 우리 각자의 생각과 느낌은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 감정에 의해 형성된다. 누군가는 사랑을 보호받는 감정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돌보는 감정으로 여길 수 있다. 누군가는 얼굴이 빨개지는 감정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함게 웃고 즐기는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자기준거성은 사랑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독특한 안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안경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그렇다면 사랑 뿐만 아니라, 우정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다수의 정의에 의해 결정되는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다. 고로 남녀 사이의 사랑과 우정은 각자 개인들의 기준과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사안이지, 그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해 사유하고 경험하고 성찰했던 과거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역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개인으로써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감정인 듯 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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