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소소설 대환장 웃음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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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문장은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 '첫 문장'이다. 작가는 첫 문장의 조사를 '꽃은 피었다'로 적었다가 '꽃이 피었다'로 바꿨다. 그의 수필 '바다의 기별'에서는 이 조사 하나에 얼마나 심히 고민했는지 흔적이 있다. 그 결과는 '담배 한 갑을 태운 것'으로 설명됐다. 단순한 조사 하나, 단어 하나지만 그것이 갖는 어감은 아주 다르다. 문장을 여는 첫 문장에 그는 왜 그런 고민을 했을까? 김훈 작가는 현대 사회의 언어 사용에 대해 우려하곤 했다. 그는 사회가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마치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언어의 사용이 언어의 본질을 바꾸었다고 했다. 언어는 곧 소통의 도구이지만, 앞선 언어의 오사용으로 언어는 단절의 장벽을 만드는 무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이처럼 사실과 의견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했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라는 두 문장은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꽃이 피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서술한 문장이다. 곷이 피었다는 사건 자체에 중점을 둔다. 다만 '꽃이 피었다'는 꽃을 특정하거나 강조하며, 다른 상황이나 맥락, 대조되는 요소들과의 관계속에서 꽃이 피었다는 것을 말한다. 고로 한국어에 있는 '조사'인 '은'이나 '는'은 종종 비교나 대조 혹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강조를 하는 반면, '이'나 '가' 조사는 사건이나 상태의 간단한 서술에 쓰인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는 문장이 전달하려는 뉘앙스나 맥락을 크게 바꾼다. 김훈 작가가 '꽃이 피었다'라고 쓴 이유는 그 문장이 담담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는 또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또한 그의 문체를 좋아하는 1인으로 한때나마 그의 문체를 따라하고자 필사적이었다. 그의 글은 덧붙이기보다 덜어내기를 중요시 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덜어내고 불필요한 접속사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의 글이 동강동강난 짧은 문장 여럿의 나열처럼 보인다. 군더더기가 없다. 덜어진 접속사는 문맥의 흐름으로 '독자'의 문해력에 맡긴다. 그의 작업을 보면 '문학'이 단순히 글을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다듬기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은 쓰는 것보다 다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사'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예술품을 빗는 '장인'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글을 대하는 그 태도를 보면 경이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생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상상을 작품화해 내놓는다는 것이다. 매력적인 일이다. 음악가나 소설가, 화가 등 '창작물'을 만드는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몇 안되는 직업 중 하나다. 상품화한 글이 누군가의 취향이 되고, 팬층이 생겨난다는 것은 꽤 고귀한 일이다. 거기에는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 들어간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등장하고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는 인공지능이 개발되어도 이들은 결코 '멋진 문장'을 만들지라도 철학을 담을 수는 없다. 때로 인공지능은 문법적 정확성, 문체의 다양성, 심지어 창의적인 표현까지 흉내낼 수 있다. 다만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철학'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글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 생각이 깃든 철학이 결여되어 있다. '프랑츠 카프카'는 그 대표적인 예시다. '프랑크 카프카'는 20세기 초의 체코 출신 유대인 작가다. 그는 고뇌와 내면적 갈등을 그의 작품에 깊게 반영했는데, '변신'이라는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 괴상한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따지고 보면 카프카 자신의 소외감과 정체성의 혼란, 가족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카프카의 개인적인 경험과 심리적 갈등이 그 작품에 독특한 깊이와 의미를 부여한다. 단순히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생을 통해서 그 문학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철학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설령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글인지 보다, 누가 쓴 글인지를 먼저 살핀다. 고로 아무리 훌륭한 인공지능이라도 인간의 '삶'을 살아 갈 수는 없고, 단순한 알고리즘에 의한 데이터 조합에 '매력을 느낄 독자'도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AI가 이 모든 직업을 위협하는 시대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 작가다.

괴소소설을 보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단순히 이 책이 단편 소설이라면 그저 그런 소설일 수 있다. 다만 이 글을 쓴 이가 '히가시고 게이고'라면 읽으며 다양한 생각이 들게 된다. 지금껏 그가 써왔던 이야기와 문체, 풀어가는 방식과 함께 비교하며 읽다보니 소설이 담고 있는 재미 이상의 재미가 있었다. 이 소설은 짧은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짧고 쉽다. 간단히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어떤 부담감도 느끼고 싶지 않을 때 읽으면 좋다.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단편이라면 취미로 써둬도 좋겠다.'

다작 중 명작이 나온다고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작인 것 같다. 긴 글을 잘 쓰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단편을 써왔을까. 모든 연습은 작품이 되고, 모든 작품은 연습이 되어, 결과와 성장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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