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데일리 티칭 - 소원을 이루어주는 시크릿 습관 365
론다 번 지음, 이민영 옮김 / 살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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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전기장판 위에서 잠을 자는데 온도가 너무 낮게 설정된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조금 쌀쌀하다 싶어 온도를 올렸다. 발끝에서 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온기를 느끼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보니, 너무 놀라웠다. 분명 따뜻함 위에서 포근히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전기장판은 전기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마치 단물을 마시고 깨어나보니 해골물이었다던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가 떠올랐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 비록 그것이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날 꿀맛 같은 잠을 잤고 그것은 거짓이라도 나에게 진실을 주었다. 완벽한 거짓은 간혹 진실을 닮았다. 다시 생각해본다면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별것 없다. 내가 그날 '전원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것일까. 세상에는 분명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내가 인지하지 않는 이상 객관적이지 않다. 설령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네모 모양이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죽는 이상 그 진실에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진실이라는 것은 마냥 알아야만 하는 가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진실과 거짓은 구별할 필요도 사라진다.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진실이라면 나에게 철저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거짓을 믿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더욱 나아가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진실이라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거짓의 가치는 진실을 상회하고 남는다.

우리의 작은 지성은 '완전한 진실'에 대해 알기 쉽지 않다. 완전한 진실은 객관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남산은 남쪽에 있기에 남산이지만, 제주에서 바라보기에 그것은 '북산'에 가깝다. 진실과 객관성이란 결국 주관의 판단에 좌지우지 되는 유연한 것이며 고로 모든 객관화 필연적으로 오류를 낳는다. 고로 가장 완벽한 객관화는 자신을 기점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진실보다 상회한다면 거짓이 낫다. 고로 '나'는 인생 여정 중 가장 완벽한 장소와 완벽한 시간에 있다. 거기에 그 어떤 객관성이란 없다. 내가 그렇게 믿으면 그럴뿐이다. 지금은 인생 최고의 전성기이며, 다시 내일, '지금'을 인지하는 순간 그 전성기는 그 순간으로 바뀐다. 모든 것은 믿기에 따름이다. 에너지라는 것은 언제든 모양을 바꾸되 총량은 지킨다. 그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에너지가 모양을 바꾸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다. 수력발전에서 만든 에너지로 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화력 발전소로 만든 에너지를 통해 불을 끌수도 있다. 열량은 보존하되 모양만 바뀐다. 고로 에너지의 주체는 '원인인자'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있다. 밑으로 크게 움직이건, 위로 크게 움직이건 움직임 자체가 에너지다. 고로 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얻는 이들보다 양쪽으로 얻는 효율이 좋다.

예전 한 행동학 실험에서 참가자들의 행동을 관찰한 적이 있었다. 이들에게 빈통이 있는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다만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 참가자들은 모두 공을 가지고 빈통 앞에 섰다. 얼마 뒤에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같은 행동을 취했다. 바로 공을 빈통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아무 지시나 요구가 없어도 당연스럽게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봐서 우리는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빈통에 던진 공이 들어가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그저 빈 시간과 빈 공간을 부여받은 이들이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하는 일종의 '놀이'와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빈 공간에 빈 시간을 부여받고 빈통 앞에 테니스공을 들고 서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때 우리가 던진 공은 통에 들어가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다만 이 놀이에서 규칙이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없다. 그것은 다만 자기가 설정한 기준일 뿐이며 그 기준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 고로 모든 것이 '공'하다고 했다. 도가에서는 모든 것이 '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고 모두 비어있는 것 투성이에서 그것들을 활용하는 것은 활용하는 이의 능동성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아무 행동도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통속에 들어간 것을 성공으로 정의해도 그만이고, 통속에 들어간 것을 실패라고 정의해도 그만이다. 모든 것은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100년 전 캐나다의 스포츠 강사가 주변에 있는 복숭아 농장에서 가져 온 복숭아 바구니에 축구공을 던져 놓는 경기를 개발했다. 바구니를 사다리에 고정하여 높게 세웠고, 공이 들어 갈 때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던 번거러움을 없애기 위해 바구니 아랫부분에 구멍을 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농구'의 시초다.

100년 전까지는 그저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집어 넣는 행동에 불과한 일이 거기에 의미을 부여하는 순간, '블록버스터 스포츠'로 탈바꿈한다. 마이클 조던의 능력도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되고,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주관적인 의미에 '사회적 합의'를 거쳐 나름의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약속'이나 '합의' 또한 사피엔스의 인지혁명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고로 그것 또한 모래성 위에 쌓아 올린 아슬아슬한 탑일 뿐이다. 누군가는 빙상 위에 돌을 밀어 넣는 행위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일부는 그것을 '컬링'이라고 부르고, 그물 속으로 공을 차 넣는 행위에 누군가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일부는 그것을 축구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주에 원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인지 해야지만 그것은 의미를 겨우 부여 받는다. 발과 다리를 이용해 공을 네트 넘어로 차 넣는 게임인 '세팍 타크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지만,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다. 모든 것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생기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면 그렇게 될 뿐이고, 저러한 의미를 부여하면 저렇게 될 뿐이다. 그것을 부여하는 이는 누구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그 흥미롭고 창조적인 놀이가 바로 '인생'이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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