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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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이해하는 철학 중 '블록 우주'라고 있다. 시간을 하나의 '블록(Block)'으로 생각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블록처럼 고정되어 있다. 시간은 과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정된 하나의 블록 처럼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고정된 시간을 경험할 뿐이다. 이 이론에서는 모든 사건과 상태는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시공간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이론 중 하나이며 연구나 검증이 어렵기에 '유사과학'의 범주에 들어가 있지는 않는다. 굳이 '블록 우주론'을 들고 오지 않더라도 현재, 과거, 미래는 동시에 내재되어 보인다. 씨앗을 보면 수박을 볼 수 있고, 수박을 보면 씨앗을 볼 수 있다. 시간이라는 함수값을 지우고 보면 수박과 씨앗은 함께 존재한다. 때로 우리는 '세종대왕'의 어린시절을 보며 '세종대왕'의 업적과 인과관계를 찾으려 한다. 다시, 세종대왕의 업적을 보며 어린시절과의 인과관계를 찾으려 한다. '이도'라는 인물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 안에는 그의 미래가 이미 함께 존재하는 바와 같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가령 아침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신다고 해보자. 물은 식도를 타고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내려간 물은 위를 지나 소장으로 이동한다. 소장 내부 벽면에는 몰을 흡수하기 위한 수송체가 있다. 수송체는 수분과 미네랄을 흡수한다. 이는 모세혈관을 통해 혈류로 들어간다. 소장에서 흡수되지 못한 물은 다시 대장으로 흘러간다. 대장은 수분의 일부를 재흡수한다. 이렇게 흡수된 물은 혈관을 타고 이동하거나 세포에 잠시 머물다가 6시간 정도 지나서 일부 소변이나 대변으로 배출된다. 배출되는 소변은 화장실 변기관을 타고 하수관으로 이동한다. 하수관은 지역내 하수처리 시설로 연결된다. 하수 처리 시설은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 다양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정화 과정을 겪는다. 이후 이는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바다나 강, 하천 등으로 배출된다.

자, 이제 나의 몸의 일부였던 물이 바다나 강, 하천으로 갔다. 배출된 물은 머물지 않는다. 지구가 자전하며 생성되는 바람의 영향으로 수표면을 이동한다. 혹은 바다로 간 물은 달과 태양의 조석력으로 마구 섞인다. 혹, 지구의 중력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섞인다. 바다의 다른 물과 섞여 어디론가 흘러가거나 바다 생물의 몸에 들어가 일부가 되기도 한다. 바다의 온도 차이로 열도 현상이 일어나면 위 아래로 섞이며 해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류는 태양 에너지에 의해 기체로 바뀐다. 이것이 상승하는 공기와 대류가 되면 수증기를 삼킨 공기는 상승하며 차가워진다. 공기가 차가워지면 수중기는 응축된다. 응축되면 작은 물방울이 형성된다. 증기 분자들은 작은 물방울로 모여 구름 형태가 된다. 구름은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대기를 타고 다니다가 크고 무거워지면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떨어지면 지표면에 스며든다. 이중 일부는 흙과 지반을 통과해 지하수가 된다. 일부는 강이나 강물, 호수가 된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물과 식물의 식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일부는 정수 처리가 되어 주택, 학교, 회사 등의 소비자에게 배급된다. 이것이 다시 한 잔의 물이 되어 나의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이렇게 돌고 돈다. 물은 때로 나를 채우기도 하고, 남을 채우기도 한다. 물의 순환 과정을 살피면, 나를 채우던 물이 고양이를 채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때로 나무가 되거나 풀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자동차가 되거나, 핸드폰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어떤 것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갖더 버린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70%는 물로 이뤄져 있다. 인간은 이처럼 돌도 도는 순환의 과정에서 임시적으로 고여있는 형태일 뿐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외부를 돌고 돌아 다시 들어온다. 그것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순환하는 어떤 커다란 유기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커다란 유기체는 모두 '나'이기도 하다.

윤회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었던 물의 순환의 예를 들었다. 비약이라면 비약이다. 어쨌건 우리는 돌고 도는 유기체의 일부이며, 그 유기체 자체이기도 하다. 고로 사람은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물은 물이라 규정할 수 없으며, 나는 나라고 규정할 수 없다. 불교철학에서는 이처럼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설명한다.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너'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그런 것들이 모두 착각이라는 것이다. 실제 우주는 하나 덩어리가 끝없이 움직이며 형태를 변형하는 유기체일 뿐이다. 고로 우주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슬픔', '악', '선', '기쁨' 따위는 없다. 모두 그저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이처럼 구별할 수 없는 큰 덩어리에 인간은 구별 지어 이름 짓길 좋아한다. 구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는 동양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노자' 철학에서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를 '도'라고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범'이라고 한다. 그것을 '도'라고 이름 지엇지만, 혹은 '범'이라고 이름 지엇지만 그것이 가르키는 대상이 너무 모호한 하나의 덩어리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를 '신'으로 규정하는데 이 전체를 '하나'라고 부르며, 기독교 철학에서 이를 '유일신', '하나님'으로 규정한다.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각각의 조합이다. 고로 각각은 모두 전체이다. 이것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를 가르켜, '도가도 비상도'했다. 이는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의미다. 언어가 가진 한계성을 명확하게 하는 일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불완전하다. 언어는 인간의 작디 작은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고로 완전한 '우주'라고 하는 일원적인 덩어리를 인간의 지성 크기로 난도질한다. 고로 언어는 우주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쉽게 말해 인간이 가진 '종이'가 2차원 평면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정확한 지도를 제작한다손 치더라도 구형의 지구를 표현 할 수 없다. 아무리 정확한 지도도 그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한계 때문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진리는 경험이며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더이상 진리가 아니다. 고로 지식은 언어로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은 언어로 얻을 수 없다. 그저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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