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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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있다. 태양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태양 중심부에서 만들어진 광자가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분. 우리는 8분 전 태양의 모습은 알 수 있어도 그것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본질을 두고 날아 오는 것은 '빛' 뿐이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우주를 날아와 우리 안구 조직인 망막에 닿는다. 망막은 1억개가 넘는 광수용체 세포를 갖고 있다. 광수용체는 빛을 검출한다. 검출된 정보는 1백만 개가 넘는 시신경 세포로 전달 된다. 모든 신경 세포는 시냅스에 의해 다른 신경 세포와 연결된다. 신경세포는 정보에 의해 자극을 받으면 전기적 신호로 재빨리 바꾼다. 초당 120m의 속도로 축색돌기를 거쳐 시냅스에 보내진다. 시냅스에서는 이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화학적 신호로 바꾼다. 다시 이것을 옆 신경세포에 전달하면 다시 이는 전기 신호로 바꾸어 다른 세포에 전달한다. 빛이 보낸 신호를 화학과 전기적 신호를 주고 받으며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로 '보인다'는 것은 '존재'의 여부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심지어 이 전기적, 화학적 신호들은 자는 동안에도 활성화되어 '꿈'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꿈'에서 확신하기 어렵다.

만약 눈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빨간 사과가 있다는 사실도 같은 원리로 확인한다. 일단 사과를 보기 위해서 '광원'이 있어야 한다. 광원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과는 보이지 않기에 존재하는지 알길이 있다. 사과를 본다고 해보자. 태양광이나 형광등 불빛에서 나오는 광원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광원에서 쏟아져 나온 광자들은 사과 표면에 부딪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사과에 흡수가 되고 일부는 튕겨져 나온다. 이 팅겨진 일부가 나의 망막에 들어온다. 이후 과정은 앞과 같다. 감각 기관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여부는 그것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빛의 속도'라는 딜레이를 갖는다. 빛은 1초에 30만km를 날아가지만 그것이 '동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로 '광자'가 전달해주는 '정보'만 있을 뿐 세계가 존재하는지 알길은 없다.

만약 그것을 만져서 확인하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도 확인할 수 없다. 만진다는 것은 실제로 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는 입자다. 그러나 전자는 입자가 아니다. 파동이다. 아니다. 파동이 아니다. 입자다. 이것이 무슨 말 인고 하면, 전자는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 전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가자고 있다. 만약 사과를 만진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는 사과를 만진 적 없다. 이유는 이렇다. 사과를 구성하는 원자 속 전자와 손가락에 있는 원자의 전자는 서로 마이너스 전하를 갖는다. 고로 이 둘은 반발력을 가져 결코 닿지 않는다. 사과의 전자와 손의 전자는 전자기력을 갖는다. 결국 이 둘은 반발하여 서로 접근할 수 없고 일정 근접거리에서 멈춘다. 이때 우리의 피부에는 압력과 온도 등 진동을 인식하는 수용기가 있다. 이 수용기를 통해 물리량이 측정된다. 이들은 다시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 옆 신경세포를 전달하며 '뇌'까지 가서 닿는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내부의 전기적 신호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외부의 존재와 관련 없다. 오감을 통해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전자신호'다. 그렇다면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빨간 사과 또한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둘다 '전자신호'의 해석으로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실재인가. 알 수 없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만난 적 있다. 양자 역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고로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앞서 말한 것처럼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것이 입자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관찰하지 않으면 그것은 파동이 된다. 이 말을 아인슈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는 또한 양성자를 돌고 있지 않으며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때서야 입자가 된다. 고로 전자가 어느 곳에서 관찰될 지는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어느 곳에서 발견될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고로 사과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없을 수도 있으며 중국이나 미국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네." 이에 닐스보어는 말한다. "신에게 이래라 저라래 하지 마시오." 모든 것은 확률적 가능성으로만 있다가 그것을 관찰하면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존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다. 가장 작은 입자라는 '원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졌다.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백번 양보하여 전자를 입자라고 보더라도 원자는 '물질'이라고 보기 힘들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는 그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99.999%가 텅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하면 원자핵 하나의 크기를 축구공이라고 해보자. 그 경우 전자는 고작 먼지 크기 밖에 되지 않으며 그 거리는 서울 시청에서 수원쯤 된다. 고로 원자는 서울 시청에 있는 축구공 주변을 부유하는 먼지이 공간 비율을 갖는다. 결국 '사과'는 공간이다. 사과를 구성하는 99.999%는 빈공간이며 그것은 나의 손, 나의 발, 달, 지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세상은 이처럼 모두 비워져 있다. 또한 물질이라는 것도 굉장히 불안정적이다. 빈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가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즉 멀리서 지켜 보기에 그저 0일 뿐이지만 그 0을 확대하면 무수한 1과 -1이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다시 0이 됐다가 다시 1이 됐다가 -1이 되길 반복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총합은 0이다'라고 했다. 엄청나게 출렁거리는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사이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스로 양의 에너지를 움켜 쥐고 그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끓는 물의 거품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며 그 거품은 존재하는 실체인지를 따져 묻는다면 알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환영일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신호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관찰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과연 가상 현실과 다를 바는 무엇인가. 이에 일론 머스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닐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고 했다. 많은 과학자들 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정보로만 존재하는 혹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채워진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모든 것이 '무'하다는 노자,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붓다, 모든 것이 확률이라는 양자역학, 모든 것은 0이라는 스티븐 호킹. 왜 모든 현자는 모든 것이 공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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