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 우크라이나전쟁, 그리고 평화가 당연하지 않은 미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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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볼록한 부분도 있고 오목한 부분도 있다. 따뜻한 부분도 있고 차가운 부분도 있다. 볕이 잘드는 밝은 부분도 있고 그림자 지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우주에 완전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이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이 있고,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빈곤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완전히 똑같아야 한다고 보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PC사상은 모든 종류의 편견을 없애자고 한다. 종교, 출신, 인종, 성별, 장애, 직업 등에 대해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편견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맞다. 차별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다만 차별을 없애는 것과 그것들이 모두 똑같아야 하는 논리는 다르다. 모든 것이 똑같아야 하는 논리는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류가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다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다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고 동물과 인간도 다르고 기업인과 노동자도 다르다. 극단적인 동물애호가나 환경운동가, 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 중에는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미국 NBA 선수의 74%는 흑인 선수다. 산부인과 전공의 중 여성은 90%이고 환경파괴의 근본적 원인은 인구증가다. 도덕적 혹은 윤리적 올바름은 선민사상을 갖는다. 자신이 가진 도덕적 올바름의 가치로 타인을 평가한다. 가령 건강한 채식주의자, 페미니스트, 환경운동가, 동물애호가 등은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실현하며 산다. 다만 극단적인 쪽에서는 높은 선민의식으로 다른 이들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을 폄하하고 평가한다.

전쟁이 나지 않으면 좋다. 다만 전쟁은 언제나 있어 왔으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의 기록이 없는 시기는 고작해봐야 268년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전쟁이 있어 왔기 때문에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전쟁 상황이라는 것이 꽤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진우 작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을 보면 전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전쟁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전쟁 옹호론'과 다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인도적인 안쓰러움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들이 정한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치관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마치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서방 매스컴을 통해 이슈가 되어 있을 뿐, 비슷한 문제는 이미 세계 이곳 저곳에 있다. 매년 소말리아 내전으로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일본에서는 매년 2만명이 자살한다. 파키스탄에서도 매년 5만명의 어린 아이가 오염수로 사망하고 중국에서는 매년 1만 명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 모든 슬픔을 함께 하고 살아야 할까. 대한민국에서 매 38분마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살한다. 모든 죽음에 슬픔을 표할 수는 없다. 그것은 냉혹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전쟁은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화 할 수 없는 최악의 정치 행위다. 그러나 그렇다는 가치관과 그럼에도 그것이 피치 못하게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것이다. 파리가 붙어 있는 어린 흑인 아이가 흙탕물을 마시는 장면이 종종 영상으로 소개된다. 기부참여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인 영상을 송출하는 것을 '빈곤포르노'라고 부른다.

사람들에게 더 불쌍하고 가여운 모습이 노출되야 기부 참여를 높일 수 있다는 근거는 납득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영상에 노출된 이들은 '흑인'에 대한 또다른 편견을 갖게 된다.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pc사상은 그렇게 오류를 갖게 된다. 전쟁은 현실이다. 전쟁은 '악'이 '선'을 공격하는 '아마겟돈'과 다르다.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최근에는 한 연예인의 이야기를 뉴스로 접한 적 있다. 모두가 안타까워 할 사건에 그가 기부한 기부금의 액수를 문제시 한 것이다. 얼핏 듣기에도 꽤 거금이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그의 기부금을 비웃었다. 나또한 십수년 간 유니셰프를 통해 혹은 그 밖의 시설에 대략 천 만원 정도를 기부했다. 다만 단순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욕하고 우크라이나를 감싸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평가의 대상이 됐다. 자신의 월급에 십 분의 일도 기부하지 않으면서 우월한 도덕적 잣대로 상대의 선행을 평가하는 일은 모순적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국의 K2전차를 비롯한 다양한 방산 산업의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 또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는 다양한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그 누구하나 파병을 통해 돕진 않는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서 돈과 무기를 지원할 뿐이다. '국가'와 '이념'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인류애적'으로 보면 무기와 돈을 더 지원하면 전쟁은 길어지고 더 많은 사상자가 난다.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쟁이었다는 '한국전쟁'처럼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을 대신하여 대리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 관계는 인간 혹은 개인의 탐욕,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에 의해 작동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시스템의 갈등이다. 권위주의를 기반으로 정권을 잡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정권을 취하는 유럽과 미국의 시스템적인 갈등이다. 안정적인 정권 유지를 위협 받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시대는 단순히 무엇이 좋고 나쁘다로 규정할 수 없다.

그간 '영국', '일본', '미국'을 비롯한 해양 세력 국가들의 주도권이 두드러졌다. 해양 세력은 극강한 무역량을 바탕으로 세계화를 선도했으며 더 큰 부를 소유하고 영향력과 군사력을 확장했다. 다만 대륙세력은 해양세력에 의해 고립되기 일 수 였다. 어느 편을 들고 어느 쪽을 응원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무엇이 맞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쟁은 역사에서 피치 못하게 일어났었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누군가는 전쟁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얻는다. 주식의 등락이 요동치고 새로운 외교의 명분의 생긴다. 가치 판단보다는 현실 대응이 언제나 중요하다. 전쟁은 언제라도 일어 날 수 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미 일어났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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