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 생의 마지막 순간, 영혼에 새겨진 가장 찬란한 사랑 이야기
하세가와 카오리 지음, 김진환 옮김 / 서사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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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라는 거죠. 출생지나 시대, 재해처럼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지배당한다는 건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 입니다. 분노나 증오에만 집중하다 보면 직면하는 현실마다 본인만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하세가와 카오리의 연작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중, 이와 같은 대사가 있다. '부모'를 탓하는 이에게 하는 조언이다. '발상의 전환'. 어떤 생각을 해내는 일을 '발상'이라고 한다. 생각은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스스로 해내기도 한다.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과 스스로 해내는 생각은 분명 다르다. 영어에서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look'과 'see'가 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look은 '감각동사'고 see는 '지각동사'다. 영어에서 '감각동사'는 자동사다. '지각동사'는 타동사다. 즉, 둘 다 '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look은 보는 '나'가 '주체성'을 띄고 있다. see는 '목적'을 보고 깨닫는 행위다. 다르다. 뿌옇게 쌓여 있는 먼지 밑 책을 보면, '책'을 'look'하는 동안에, 먼지는 'see'하게 된다. 둘 다 보는 것이지만, 하나는 보고자 하여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여지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그렇다. 눈 앞에 무언가를 보고자하면, 그것에 촛점이 맞춰지고 나머지는 흐려진다. 사진에서 이처럼 '피사체'를 선택하고 나머지 배경을 흐리는 것을 '아웃포커싱'이라고 한다. 포커스가 나가 있는 배경도 그러나 보여진다. 보고 있지 않아도 보여진다. 촛점을 옮겨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옮겨진 촛점을 제외하고 다시 나머지가 흐려진다. 즉 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다양한 것들은 '보여진다'. 책 테두리, 페이지를 잡고 있는 손, 손 등 위에 모공 하나 하나까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보지 않고 '글자'를 본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글자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본다. 발상의 전환은 없는 내용을 있다고 망상하여 믿으라는 거짓 긍정주의가 아니다. 실재하는 것들 중에 다른 것에 포커스를 두고 나머지를 흐리라는 것이다. 쓰레기장에서도 피어 있는 꽃송이에 포커스를 맞추고, 전쟁통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인간미에 포커스를 두라는 것이다. 그것은 숨어 있지 않다. 그저 다른 것에 맞춰진 포커스 통에 흐려졌을 뿐이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자신이 불행해야만 하는 창의적인 생각들을 없애라. 슬픈 일을 겪거나, 실패한 이들을 보면 오롯하게 세상 모든 것에 포커스를 흐리고 '불평', '우울', '어둠'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날 그냥 가만 놔두시라고 해. 그게 나한테 가장 고마운 일이니까!"

부모님과 화해할 생각이 없는 이는 발악한다. 이에 '발상의 전환'은 소설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음악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죽은 사람의 '혼'을 데리러 오는 '신부름꾼을 '사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우리는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동양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위치가 있다. 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에는 죽은 이의 혼을 데리러 가는 '사신'이 등장한다. 서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사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쉽게 '죽는 이들'로부터 주목 받는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쉽게 읽히는 라이트 소설이다.

오래 전에 개봉한 영화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봤다. 꽤 예전에 개봉 했으나, 이제야 봤다.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 싸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영화는 '살인자' 없는 '살인'을 보여준다. 시각적으로 꽤 폭력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 한 작품이다. 다만 예로부터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문화도 있다. 내세관을 가지거나 윤회관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도 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이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음'이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다. 누구나 겪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전무한 정보 덕분에 '죽음'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죽음' 뒤에 남아 있는 세계가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이를 사신은 마중한다. 살면서 그럴 때가 있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나 자책 말이다. 흐려진 배경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나. 마음이 정하는 포커스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라도 그 위치를 옮겨, 위를 향할 수도 있고 아래를 향할 수도 있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살면서는 뭐든 수정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나, 죽음 뒤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소설은 가볍에 읽을 수 있는 라이트 소설이었으나, '휘리릭'하고 넘겨 읽는 가벼움 속에 삶의 철학이 묻은 한 구절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그날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 그 말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하게 될 말이자, 생각이다. 죽음은 대게 예고없이 다가온다. 그 대상은 '나' 혹은 '가족'이 될지, 그 시기가 당장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대하고, 오늘 하루를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살자.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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