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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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을 덮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단순히 소설책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이 책은 소설책이 아니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파고 들어간다. 역사의 배경에서 평범하지 않은 선택들을 하게 된 평범한 사람의 '악'을 이 책은 이야기한다. 책의 중반 부까지는 흔히 말하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이 책의 주인공(?)인 '카페시우스'가 있다. '악의 어떻게 조직화되고 보편화되는가'라는 소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의 중반부까지는 '이게 실화인가' 싶은 역사적 사실들이 담담하게 나열되어져 있다. 예전 어떤 채식주의자는 유튜브에 있는 병아리 감별 영상을 보고 채식을 결심했다고 한다. 영상은 갓 태어난 병아리들을 숫컷인지 암컷인지를 감별하고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숫컷은 분쇄기로 던저 버린다. 동물을 보면서도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가 갖는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찰라의 순간에 생과 사를 가르는 병아리 감별사처럼 주인공 카페시우스는 '노동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른다.' 그의 손가락에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갈라졌다. 그는 평범한 약사였다. 그를 소개하는 첫 장면은 그를 기억하는 유대인 가족들의 시선으로 부터 시작한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과 같은 전개방식이 독특했다. 그를 사람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관료화된 '악'에 의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이 '악마'가 되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내용은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쉰들러리스트',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같은 영화들이다. 해당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이 모두 이 책에 나온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너무 영화화했네'라고 생각했던 잔인한 장면이 결국은 '축소된 재연'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람을 죽이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군에 입대했을때를 생각해보자면 말이다. 내가 군에 있을 때, 이해하지 못할 '부조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런 부조리들을 바라보면서 비합리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런 부조리들이 왜 존재해야하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이유없이 상병이 되면 일병, 이등병의 군기를 잡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위치인 병장이되면 그런 부조리에 무뎌지면서 되려 악해진다. 마치 조금씩 스며들어가는 스펀지의 물처럼 '악'은 관계와 상황, 환경에 의해 조금씩 받아들여진다. 굉장히 논란이 되었던 '윤일병 사건'들도 군대라는 특수한 위치와 장소에 모이기 전까지 가해자들이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로 인해 죽은 수많은 사람들... 그는 분명 악이다. 하지만 ...

군대에 있으면 직급이 올라갈수록 부대 내에서 맡아야 하는 역할이 존재한다. 상병이 되면, 부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정규적으로 후임들을 불러모아 불필요한 교육을 해야했다. 강압적으로 시키지는 않지만 그 위치가 되면 누구나 그랬고 나또한 그래야할 것 같은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좋은 친구 혹은 형과 동생으로 이어질 관계들이 불필요하게 긴장감이 형성되는 관계가 된다. 자신도 모르게 '정서적 가혹행위'를 하게 되는 그런 문화는 그 상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과연 개인의 탓일까. 그리고 그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면 그 개인은 무고한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뒤를 넘기면 마지막에는 굉장히 와닿는 문구가 있다. 중반부까지 읽어왔던 내용에 후반부에서부터 지리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법정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법정 내용이 길어지면서, 점차 책의 절반 부분을 차지하던 '악행'에 대해 무뎌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 시대의 대중들처럼 책을 넘어가면서 조금씩 악에 무뎌진다. 재판이 20년 이상 이어지며 조금씩 잊혀져가고 용서해가게 된다. 결코 책의 초반의 상황이라면 무뎌질수 없는 감정들이 책 한장 한장 넘어가면서 무뎌지기 시작한다. '직접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라는 생각도 들기도한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악인지 점차 희미해져간다. 무정한 대중들의 시선은 점차 '과거는 잊고 새로운 미래!'를 외친 다. 우리 근현대사와 너무나 닮아있던 독일의 역사를 보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해온다. 친일 청산을 이야기하며 항상 선진국의 사례를 이야기 하지만, 너무나 닮아 있는 독일의 모습은 결국 우리의 모습이었다. 사형제가 없는 독일에서 혹은 엄청난 판결을 받지만 얼마 후 풀려나는 전범인들을 보고 욕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는 정의 인지, 정치인지 잘 모르겠다.

사법에서 '엄벌'과 '교화' 사이에 대다수의 선진국들은 '교화'를 택한다. "나쁜 놈은 '천벌'을 주자" 보다는 "그를 교화시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자"를 따진다. '쳐 죽일 놈들'이라는 나쁜 놈들을 보면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엄벌'을 기대하지만 국가는 그들을 '교화'시키고 사회구성원으로 구실을 할수 있도록 노력한다. 최대한 '감형'을 하려고 하고 될 수 있으면 내보내려 한다. 그러한 사법기관의 유연함이 없다면, 범죄는 더 잔혹해지고 숨어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죄수자를 관리하기 위해 들어가는 여러가지 행정과 세금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관리가 필요한 죄수자를 내보냄으로써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사회구성원'이 필요한 국가로써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가지 말이 많다. 얼마 있으면 '조두순'의 출소가 있다. 그런 이유로 사실 이런 교화와 엄벌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무엇일까?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에 대한 보복이 일어난다. 이것은 정치적인 일이다. 노론과 소론도 그랬고, 개혁파와 온건파가 그랬으며, 친일파와 친러파가 그랬다. 국가에 항구를 개방하자는 개혁파가 이기면 다시 온건과 급진으로 나누고 그 중 하나가 정권을 잡으면 상대쪽은 사라져야 했다. 단, 안정적인 정치를 위해 상대를 '악'으로 몰아세우고 얼마 뒤에 그들을 '교화'의 명목으로 풀어준다. 단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들어왔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정권교체가 가능할 뿐이지, 이는 지금 이순간에도 계속되어져 간다. 박근혜 정부 때, '악'의 부품으로써의 역할을 다했던 사람들을 색출하고 죄를 묻자는 이야기나 노무현 정부 때, '악'의 부품으로써 역할을 다했던 사람들을 색출하고 죄를 묻자는 이야기를 보자면 사실상 스케일과 명분만 달라질 뿐,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이와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기분이 든다. 미국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다면 과연 역사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무엇이라고 기록했을까? 그리고 그 홀로코스트의 부품들을 무엇이라고 기록했을까? 과연 지금의 우리는 전혀 '악'이 아닌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같은 상황에서 '절대 선'의 편에 서서 사회를 등질 수 있을까?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고만가지 감정들이 오묘하게 뒤섞이며 결론짓지 못한 책의 감상에 가슴이 먹먹함을 느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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