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시간이 끝나고 저녁 교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친 것을 느낀다. 남은시간은 꿈결처럼 신전 앞에 서서 시선을 이것에 두었다가 저것에 두었다가 하면서 그저 흘러가게 두리라 생각한다. 명랑한 관람객 하나가 내게 지루한지 묻는다. 내가 특별히 지루해 보여서 물었다기보다는 종종 받는 질문이다. 딱히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그녀는 "좋네요!"라고 말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지루해하는법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다.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나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가해자들에게 공포나 증오가 아닌 애착이나 온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 현상-옮긴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할 삶에 적응해버렸다. - P101

 음악은 알 수 없는 리듬을 따라 내가 예상하는 음계에서 항상 조금 위나 아래에 있는 음들로 이어진다. 나는이것이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연주자가 마침내 손을 멈췄을 때는 아마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테지만 수많은 디테일로 채워진 그 연주를 듣는 동안 마치 수천번의 붓놀림으로 채운 그림이 순간순간 공중에 걸려 있는 듯했다. 나는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탐험해볼 자격만을 간신히 갖춘 갓난아기가 된 기분이다.
고쟁 연주자가 악기를 정리한 뒤 ‘딸깍‘ 하고 케이스를 닫는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원을 둘러싼 전시실들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내가 가진 생각 따위는 모두 제쳐두고 그곳의 중국화를 새롭게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타오른다. 시각 예술은그 획들을 화면에 잡아두며 끝나지 않는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너그럽게 느껴진다. - P110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초상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그의 천재성을 반영한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채와형태, 인물의 얼굴, 물결처럼 굼실거리는 머리카락 등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다양하고 매력적인 세상의 속성들이 훌륭한 표현 수단 안에 모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레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P114

나는 그녀가 이 유리 케이스 안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을 언젠가를 상상하며 이디아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어느 좋은 날라텍스 장갑을 낀 기술자들이 전시 스탠드의 속박을 풀고 그녀를 "제한구역, 관계자외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붙은 지하실로 데려갈 것이라 믿는다. 그녀를 수장고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포장 기술자가 유물들을 하역장으로 옮기기 전 주문 제작한운송 상자에 넣는 등록소 옆의 구역으로 향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디아가 나이지리아 베닌 시티에 계획 중인 새로운 박물관으로 보내질 것을 기대해본다. 1897년, 영국군이 베닌 시티를 정복, 약탈했고 여러 차례의 불법적인 거래 끝에 이디아는 결국 메트의 소장품이 되었다. 경비원인 나는 유물 반환 문제에 특별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우리 중 누구도 석방해야 할 강력한 이유가있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감옥의 교도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이 가면은 적어도 세계적인 도시의 공공 컬렉션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서아프리카 이야기를 하니 나이지리아, 가나, 토고, 부르키나파소, 카메룬출신의 경비원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P122

시선을 사로잡는 보기 드문 사람들도 있다. 한 노인이 감상에지쳐서 보행기에 몸을 엎드리면 그의 아내는 고개를 숙여 그의귀에 속삭인다. 몇 분 동안 그녀는 그가 체력이 모자라 놓치게될 중세의 유물들을 자세히 묘사해준다. 설명이 끝나면 그녀는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들은 다시 조금씩 나아간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분수대 앞에서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전두 닢을 건네며 말한다.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듣자마자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이 말해주리라 결심한다. - P143

내가 갈팡질팡하며 설명하는 동안 남자는 그런 이야기에 굶주린 듯 귀를 기울인다. 보기 드문 사람이다. 아는 척을 하거나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수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충돌을 반기는 사람. 나는 온종일 감탄했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남자의 개방적인 태도에 더 탄복한다. 남자는 나에게 감사를 표한 후 떠났고 그때부터 나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들이다. 간혹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향해 엄청나게 천천히독백을 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노력이 하도 정성스럽고 진지해서 그 마법의 힘이 풀릴까 두려워 감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 그녀는 <안데스의 오지 Heart of theAndes>(프레더릭 에드윈 처치 Frederic Edwin Church의 대형 풍경화, 1857년 봄의 에콰도르 여행에서 그린 수많은 스케치를 바탕으로 안데스산맥의풍경을 묘사했다-옮긴이)의 광활한 풍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좀 봐요... 얼마나 능숙하게 잘그렸는지 몇 달, 몇 년 동안 잊혀지지가 않지요... 계속 떠올리게 되죠. 휴식 같은 곳으로 나를 계속 데려다놓아요... 대단해... 사진을 보고 그린 것도 아닌데, 단지 눈으로 본 것일 텐데... 그리고 그렸을 텐데 말이죠..." - P146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 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 몸짓으로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속의 오키프는 털이 없는 영장류 같기도 하고, 또 일순간 근엄한여신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체일 것이다. 그렇지않은가? 인류라는 생물종의 신비로움이 나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사진에서 눈을 돌려 전시실을 둘러보니 문득 웃음이 터질 것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데 하나같이 벽에 걸린 무색의 움직임 없는 인물 사진들을 보느라 옆 사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람들은 흔해 빠진 대상들로 간주되는 듯하다. 정말이지 아무 때나 볼수 있는 대상 아닌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지나쳐 영원히 사라져버릴 낯선 이들에게 왜 구태여 관심을 쏟겠는가. 여기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조지아 오키프는 우리에게는 없는 미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멈춰 있다. 그녀는 영구적이다. 그 주변으로는 그녀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 (옛말에서 성스럽다Sacred는 단어의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세속의 영역을 분리하는 액자가 둘러져 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멈춰 서서무언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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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김씨

무솔이 부락으로 뚫어나간 긔내를 따라 개울녘 둔치에 늘어선 미루나무 잎새들이 반짝거리고 볶이며 내뿜는 훈김에도, 파슬파슬하게 타들어 간 물길 옆의 갈밭에서는 빈차 지나간 장길처럼 익은흙이 일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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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를 유혹하는 행동은 아무도 없는 밀폐된 실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배우자는 그를 차지하려는 다수의 사람 간에사회적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배우자를 잘 유혹하려면 장래의 배우자감이 바라는 것들을 다 들어 주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들이 내는 유혹 신호를 간섭해서 방해해야 한다. 인간은 다른동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방해 수단을 진화시켰는데, 경쟁자를언어적으로 비방하는 전술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고, 넌지시 깎아내려서 평판을 낮추는 행동은 모두 배우자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기 위한 방책의 일부이다.
유혹 전술과 마찬가지로 비방 전술은 자원이나 외모처럼 장래의 배우자감에게 희망하는 자질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끔 이미 설계되어있는 이성의 심리 기제를 자기 이득에 맞게 이용해 먹는 전술이다.  - P200

남성들이 쓰는 기술 중의 하나는 확실한 자원을 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장차 높은 수입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돈이많다는 걸 뽐내 여성을 사로잡기, 비싼 차를 몰고 다니기, 직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말하기, 성취한 바를 자랑하기 등이 있다. 또 다른 기술은 여성을 속여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직업상의 성취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것이며, 예컨대 직장에서 어떤 신망을 받고 있는지 과장하기가 있다. 로드러너 수컷이 자기가 사냥한 먹이를 선사하듯이 남성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주된 방편으로서 자원을여성에게 선사한다.
남성은 또한 경쟁자들이 가진 자원을 깎아내린다. 
••••••
남성은 경쟁자가 자원을 획득하는 능력을 헐뜯음으로써 타인의 배우자 유혹 전략을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여성에게 경쟁자가궁핍하고, 돈이 없고, 야심이 없고, 싸구려 차를 몰고 다닌다고 흉을 본다. 여성은 남성보다 경쟁자가 가진 자원에 대해 헐뜯는 경향이 훨씬 덜하다.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남성들이 이 전술을 쓸 때보다 별로효과를 보지 못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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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재능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록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존경하는 음악인의 양대 산맥인 바흐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하지 않고 연주했다. 그리고 연주하는 내내 음악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예술가란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의 생각은 분명 아버지에게서물려받은 것이다. - P27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8개월 동안 나에게 현실세계란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병실과 퀸스에 있는 방 하나짜리형의 아파트가 전부였다.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 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 공간들이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서 있고 싶었다.
- P32

 뉴욕 평균 크기 아파트 약 3천 개를 합친 면적의 미술관은 너무도 장황하게 펼쳐져 있어서 이런 전시실 정도는 거의 붐비지않는다. 몇 분간 C구역에 서서 멈춘 게 아닐까 싶은 느린 속도로시간이 서서히 전진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앞으로 손깍지를 낀다. 뒤로 손깍지를 낀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본다. 문설주에 기댔다가 잠시 서성거렸다가 벽에 기대어본다. 새끼 오리처럼 아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주위를 경계하며 가만히 서 있는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준비가 되지 않은 듯 안절부절 못하고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주 동안 형이 죽은 뒤 처음으로 내 삶이방향을 잡았다고 느끼게 해준 일들을 지나오고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훈련을 받고, 뉴욕 주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하고, 지문을 등록하고, 근무복 제작실에서 미술관의 재단사가 내 치수를 재고...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망을 보는 것.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이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기나길게 느껴진 몇 분이 더 지난 후,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한다. - P33

내가 태어났을 때 형인 톰은 채 두 살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형도 어린이였고, 내가 사춘기를 거칠 때는 형도 10대였다. 그리고 내가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이한 직후 형이 이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런 건 모두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동생에게 형은 언제나 다 큰 어른인 법이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교실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부를 한 번쓱 쳐다보고는 반쯤은 기쁘고 반쯤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브링리라고? 톰 브링리 동생?"이라고 물었다. 백 살까지 산다 해도나는 어딜 가나 톰 브링리의 동생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 P55

자가면역질환으로 위기가 극에 달하자 형은 우리를 한 사람씩 차례로 자기 방으로 불러 작별 인사를 했다. 방에서 나온 후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져 더 이상 부서질 수도 없게 된 심장을부여잡고  의료 정보가 담긴 소책자 뒤에 이렇게 갈겨썼다.

이제 곧 말을 못 하게 될 거야. 하지만 행복해. 여러 가지로 운이좋았지. 가족, 크리스타를 잘 돌봐줘. 수학을 끝내지 못한 건 후회가 돼.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넌 걱정 안 해. 훌륭한 녀석. 사랑해. 나도 괜찮은 사람으로 산거 같아. 잠들었는데 그사이에 누가비디오를 대여점에 돌려줘버렸어. 누구나 고통을 겪지, 내 차례야. 누구나 죽어, 내 차례고, 고통을 피하는 약을 먹고 싶기도 하고 먹고 싶지 않기도 해. 죽는 건 상관없어. 다만 고통을 겪고 싶진 않아. 모두들 늙어가는 걸 보고 싶은데... 크리스타를 행복하게 해줘. 행복한 추억이 많아. 너랑 이야기한 것도 좋은 추억이야.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 P61

그 그림을 뒤로하고 어머니를 찾으러 초기 르네상스 전시실로 갔다. 어머니는 내가 찾은 그림보다 더 인정사정없고, 더 아름답고, 심지어 더 진실되어 보이는 그림 앞에 서 있었다. 14세기에 활동한 피렌체 출신의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 Nicolas diPietro Gerini라는 거장이 그린 그림이었다. 특징 없는 금색 배경 앞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 게 확실한 젊은이를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이다. 마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이 그림은 ‘통Lamentation‘ 혹은 ‘피에타 Pieta‘라고 부르는 장르에 속한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 P67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침묵 속에서 빙빙돌고, 서성거리고, 다시 돌아가고, 교감하고, 눈을 들어 아름다운것들을 보면서 슬픔과 달콤함만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다.
지친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브루클린을 향해 달리는 지하철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형태를갖추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해결책이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브루클린의 5번가를 따라 걸으면서 멕시코 식당 대여섯 개를 지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3층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문에 열쇠를 넣고 돌릴 즈음에는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2008년 가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일을 시작했다. - P70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렇게 뛰어난 많은 사람을께 일한다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거야!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어! 나는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자리의 명함을 지니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만 계속하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이 달갑지 않은 역설을 직시하는 데는 거의 3년이 걸렸다. 내가 만약 덜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동안 틈틈이 내 생각들을 흐릿하게나마 적어두었을 테고, 영감을 주는 주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과감히 도전해 글을 써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빅 리그였기에 내 생각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고 야망은 이상하리만치 줄어들었다. 나는 「평론 한 마디」라는 섹션에 들어가는 한 단락짜리 서평을 쓰는 데도 스스로가 아닌 목소리를 사용하고, 내 것이 아닌 권위를 주장하고, 정말 그렇게느끼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의견들을 피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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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하층의 경비원 배치 사무실 앞에 빈 예술품 운송 상자들이 쌓여 있다. 1층의 무기와 갑옷 전시관 바로아래에 있는 사무실이다. 놓여 있는 운송 상자들은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커다란 박스처럼 생긴 것도 있고, 캔버스처럼폭은 넓고 두께가 얇은 것도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고, 옅은 색의 가공하지 않은 원목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져서 희귀한 보물 혹은 이국적인 야수까지도 담아 운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보인다. 근무복을 입고 출근한 첫날, 이 견고하고 낭만적인 물건들 곁에 서서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너무 강렬하게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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