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한 입 두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국물이 흘러들어오고 눈물이 흘러나가면서 내 눈에 옮아 있던 날 선 눈빛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J의 사리곰탕면이 새겨 넣은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누군가가 이틀을 꼬박 바쳐 요리한 음식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잊지마.‘ - P210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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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의 눈빛이었다. 그는 늘나를 세상 쓸모없고 성가신 사람 보듯 바라봤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들은 차곡차곡 내 눈 안으로도 들어와서 언젠가부터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 매일매일 규정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라는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그저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만 남는다는 것을. 나에게조차 나는 성가시고 하찮았다.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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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나를 일곱 살짜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저 그만한 계집아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나는 결코 그저 그만한 어린아이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게 건방지다면 하다못해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나 동네 사람들의 속마음 정도는 두루 알아맞힐 수 있는 눈치만큼은 환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실을 말하자면 내 나이는 여덟 살이거나 아홉 살, 둘 중의 하나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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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농담 반, 진담 반

2219 년 대학을 졸업하고 지구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A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행성 ‘프록시마B‘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그는 행성 이동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200년 전(2019년) 지구에 불시착한다. 미래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와 공학자가 미래 과학기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A에게 몰려든다. - P6

이번에는 당신의 삶을 돌이켜보라. 무엇이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대부분 과학이나 기술, 예술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하찮게 여기며,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정치는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왕의 이름을 달달외우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인터넷은 누가 개발했는지, 세계 인구가 지금처럼 많아질 수 있게 해준 화학 비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했다는 세탁기는 누가 개발했고, 소독약은 언제처음 쓰였는지, 에어컨, 컴퓨터, 기차는 누가 현실화했는지 전혀 알지못한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 Matin Luther를 모르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지만,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한 구텐베르크Gutenberg 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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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안에서 지나치게 오래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거센 돌풍이 방 전체를 흔들어대길 바란다. 누군가 없이 내가 먼저 알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나만을 믿고 살 수는없어서. - P75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있지 못하는 것.  - P152

그러고 나니 더욱더 드라마 등에서 챙김, 특히 ‘엄마의 챙김‘을 받지 못해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면서 엄마를 탓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그걸 보고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엄마들이 떠오를 때마다, 항변하고 싶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았던 아이들 역시 많았다고. 우산 속 자리도 아늑했겠지만 우산밖 빈자리가 우쭐했던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고. 그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가며 커간 아이들이 갖게 되는, 산성비도 부식시키지 못할 단단한 마음 같은 게 있다고.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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