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토요일

맨 처음에 발사된 총알 중 하나가 루카가 소변을 보려는 변기 위의 열린 창문으로 날아든다. 루카는 그것이 총알인 줄도 모른다. 미간에 총알이 박히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자신을 지나친 총알이 뒤쪽 타일 벽에 부드럽게 박히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진 총알세례는 귀청이 떨어질 듯 요란해서 헬리콥터 날개가 돌아가는 듯한 두두두, 탕탕, 딸칵딸칵 소리가 울려퍼진다. 비명도 쏟아지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총격으로 전멸된다. 루카가 바지지퍼를 올리고 변기 뚜껑을 내린 다음 그 위에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기도 전에, 저 끔찍한 아우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욕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엄마가 나타난다.
"미호("내 아들‘을 뜻하는 ‘mi hijo‘의 줄임말. - 옮긴이), 이리 와." 엄마가 어찌나 나직이 속삭이는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한다. - P11

루카는 아무 소리도내지 않은 채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집중한다. 이건 그냥 악몽이라고 전에도 많이 꿨던 끔찍한 악몽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잠에서 깼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냥 꿈이야. 왜냐하면 멕시코 도시에서는 저런 자들이 현대판 부기맨(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을 잡아가는 귀신 -옮긴이)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 앞에서는 잔인한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다른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라디오 채널을 돌려버리고, 자신들의 가장 큰 두려움을 감춘다 해도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서 전해 듣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놀이터, 축구장, 학교 화장실에는 섬뜩한이야기들이 모여들고 또 부풀려진다. 아이들은 부유하게 가난하건 중산층이건 모두 길에서 시체를 본 적이 있다. 살인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험에도 계급이 있고 어떤가족은 다른 가족보다 위험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루카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엄마와 아빠에게서 자신들이 그렇게 취약한 처지라는 증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두 사람은 아들 앞에서 늘 용감하게 행동했지만.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이 일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지는 건아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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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이미 상당한 시간동안 눈에 띄지 않게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어왔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것이다.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 Andersheit과 타자성 Fremdheit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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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유유가 발견한 아르테미시닌은 클로르퀸에 내성이 생긴 열대형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아르테미시닌 덕분에 지난십여 년 동안 말라리아 사망률이 절반으로 줄었고,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투유유 교수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 중국 전통 한의사들은 매우 착잡해했다.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에 따르면 "중국 한의사들은 토종 식물에서 단일 성분을 분리해 사용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며 모든 약초는 함께 복용해야 한다"고 믿어왔는데, 투유유의 발견으로 자신들의 신념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 P195

1163년 마침내 교회는 치료법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수도승이나 성직자에게 방혈 시술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 결과 이제까지 해왔던 머리 손질과 면도 같은 일에 더해 이발사가 방혈 시술, 발치, 심지어는 절단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이발사들은 의료 교육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대부분 문맹이라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으로 방혈 시술을 했다.
이발소 앞에서 돌아가는 흰색과 적색 줄무늬 봉은 중세 시대에 시술을 하고 난 뒤 가게 밖에 걸어놓은 피 묻은 수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세 영국에서 각각 다른 길드에 속했던 외과 의사와 이발사는 16세기 중반에 이발사-외과의barber-surgeon 라는 하나의 직종으로 합쳐졌다. 하지만 이후 전혀 다른 전문 직종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 잡으면서 1745년에 두 직종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 P217

르네상스 시대에 인체에 관한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방혈요법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1628년 영국 내과 의사인 윌리엄 하비 williamHarvey는 과거의 이론을 뒤집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1400년 전 갈레노스는 심장을 단순히 동맥과 정맥이 지나는 통로로만 생각했을뿐, 펌프 작용으로 온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의 중요한 기능을 알지못했다. 하비는 심장이 박동함으로써 혈액을 동맥으로 내보내며 이렇게 내보내진 혈액이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온다는 혈액순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 P218

과학자들은 노화의 생물학적 비밀을 풀어 평균수명을 120세까지 늘리기 위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미래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 인간수명에 큰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서도 노령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인구의 감소, 사회복지와의료비 부담 등 많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미래평균수명의 연장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태어나서 생애 마지막 날까지 항상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강수명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수명이란 평균수명에서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한 기간을 뺀 기간으로, ‘삶의질‘을 판단하는 지표가 된다. 현대 과학은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 P248

하지만 인공지능이 의사와 약사를 온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진 소통과 공감능력은 인공지능이 따라잡지 못하는 영역일지도모른다. 사람들은 진료하면서 눈 한 번 더 맞추며 믿음을 주고, 경과를 세심히 물어보고, 자기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의사를 원한다.
지난번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몸 상태가 어땠는지, 부작용은 없었는지, 약 먹을 때 주의 사항을 친절히 알려주는 약사를 원한다. 우리에게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따뜻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가슴 차가운 전문가가 발 디딜 곳은 더더욱 없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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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집에 20년 넘게 살면서 집 구조를 많이 바꿨어.
수리도 여러 번 하고, 옥상 올라가는 계단도 부엌이 아니라 거실에 있었지. 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는 거야. 아궁이를 없애고 기름보일러를 들여놓고, 쥐도 안 나오고, 우리나라가 워낙 빨리 발전하잖니. 그러니까..."
엄마는 거기서 말을 흐렸고, 나도 뭐라고 더 말을 하지 않았어. - P100

한참을 웃고 나서 문득 ‘옛날에도 우리집에 이렇게 개미가 많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분명히 한때 우리 집에서는 쥐가 나왔어. 그런데 쥐가 나오지 않게 됐다고 해서 집의 위생상태가 나아진 건 아니야. 쥐가 사라지자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바퀴벌레 다음에는 개미가 나오고, 그랬던 거야. 뭐가 바뀌긴 했는데 나아진 건 아니었어. - P102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 P124

"만약 남극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블로를 잡아다 헬리콥터에 태워서 하와이에 내려다 줬다면..……… 파블로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내가 물었어.
"어쨌든 하와이에 갔잖아."
지명이 고집했지.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 P160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어 나이스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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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랑은 내가 호주로 떠나는 날, 인천공항에서 공식적으로 헤어졌지. 그날 지명이가 자기 아버지 차를 몰고 와서 나를 공항까지 바래다줬어. 지지리 가난한 우리 집은 다섯 식구가 사는데도 자동차 한 대가 없었어. 지명이가 없었다면 흐물흐물한 이민 가방과 트렁크를 공항까지 들고 오는 것도 큰일이었을 거야. - P9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봐야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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