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뭔가에 대해 확실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질적인 부나정신적인 부나 마찬가지다. 내가 종종 겪었던 것처럼, 확실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뭔가를 잃은 사람은 결국 깨닫게 된다. 진실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구태여 걱정할 필요가 뭐 있는가. 오늘이내 존재의 첫날이거나 마지막 날인 양 사는 것이 오히려 낫지않은가. - P45

그런데 달아나야 할까? 나는 이제 막 도착했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매일 밤 춤을 추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전에는 좋아서 줬지만, 지금은 돈과 명성을 위해 춘다. 다리가 아픈 건 견딜 만하다. 가장 힘든 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제물일 수도 있고, 자신의 보물을 찾아 떠난 모험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볼 것인지에 달려 있다. - P60

갇혔다는 기분이 들 것이고, 커브가 두려울 것이고, 거기서내려 토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롤러코스터의 궤도가 내 운명이라는 확신, 신이 그 롤러코스터를 운전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진다면, 악몽은 흥분으로 변할 것이다. 롤러코스터는 그냥 그것 자체, 종착지가 있는 안전하고 믿을 만한 놀이로 변할것이다. 어쨌든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은, 주변 경치를 바라보고 스릴을 즐기며 소리를 질러대야 하리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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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
나는 경배받는 여자이자 멸시받는 여자이니
나는 창녀이자 성녀이니
나는 아내이자 동정녀이니
나는 어머니이자 딸이니
나는 내 어머니의 팔이니
나는 불임이자 다산이니
나는 유부녀이자 독신녀이니
나는 빛 가운데 분만하는 여자이자 결코 출산해본 적이 없는 여자이니
나는 출산의 고통을 위로하는 여자이니
나는 아내이자 남편이니
그리고 나를 창조한 것이 내 남자라
나는 내 아버지의 어머니이니
나는 내 남편의 누이이니
그리고 그는 버려진 내 자식이니
언제나 날 존중하라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

<이시스 찬가>, 기원전 3~4세기경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 - P-1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잠깐 ‘옛날 옛적에‘ 는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줄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다. 어떻게 이러한 명백한 모순을 이제부터 들어갈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린 삶의 매 순간 한 발은 동화 속에, 또 한발은 나락 속에 담근 채 살아가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시작하도록하자! - P15

이튿날, 그녀는 정성을 다해 치장하고, 어머니가 개학날을 위해 특별히 맞춰준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학이 끝난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등교길에 나섰다. 하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애태우며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야 마리아는 소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아인 멀리 떠났어."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마리아는 어떤 것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또한 ‘멀리‘라고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세상은넓고 그녀가 사는 도시는 깨알만큼 작다는 것. 마음에 드는 존재들은 결국에는 늘 떠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녀는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언젠가는 소년을 찾아 자기도 이곳을 떠나리라고.
그리고 아홉 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관습에 따라 금요일마다 영성체를 받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간구했다. 이 도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동안 그녀는 마음을 앓았고, 소년의 소식을 묻고 다녔다. 하지만 소년이 어디로 이사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깨달아갔다. 세상은 너무 넓고, 사랑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는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가 계시는 하늘나라는 너무나 멀어서 아이들의 소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라고.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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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빛을 손으로 막으며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금속 쐐기를 다시 내려가 리즈옆에 섰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검은 머리는 비를 막아주려는 듯 뺨을 덮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를,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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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고려의 선배들은 중원의 시세에 따라 수시로 황제국을 바꿨는데, 약 250년쯤 지난 17세기 전반 조선의 후배들은 왜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까?
조선의 위정자들이 국력의 강약이나 존망보다 더 상위에 둔가치는 인륜에 기초한 의리였다. 주자학의 융성과 함께 조선에서 뿌리를 아주 깊게 내린 지존의 가치, 곧 명과 조선을 군부·신자 관계로 보는 인식이 17세기에 매우 확고하였다.
조선인의 중화 인식은 핵심이 사대事大ㅎ였다. 문자 그대로 큰나라를 섬긴다는 뜻인데, 여기서 ‘대大‘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적잖이 달랐다. 한국사에 국한해 보아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대는 대개 강대국을 의미하였다. 고려 때 황제국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이념적 고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중심은 중원인데, 어떤 북방 종족이 중원을 점령했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들에게 천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해석이 얼마든지가능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의미가 사뭇 달라졌다. 흔히 중화의 요건으로는 공간(중원)·종족(한인)·문화(유교) 세 가지를 보는데, 고려에서는 종족 기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복왕조conquest dynasty의 시대였기에 한인이라는 종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고려의 상황만 복잡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화이관으로 무장한 주자학이 아직 나오지않았거나, 등장했더라도 아직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사정이 달랐다. 조빈의 주장에도 나오듯이, 조선 태조가 천조(명)를 치러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새 왕조를 세운 일은 존왕尊王의 실천이었다. 또한 지금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 몰린 상태임에도 척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명을 단순히 강대국으로만 간주한게 아니라 유교적 중화 문명을 담지한 천자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곧 군사력의 강약을 초월하여 문명론 차원에서 중화를 인식한 결과였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의리라는 국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당시 양반 지배층이 골몰한 고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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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지 않던 척화론이 다시금 거세게 타오른 결정적 계기는홍타이지의 청제였다. 천명을 받은 천자인 황제가 둘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형편에 따라 절충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정묘년의 맹약은 이제 폐기 수순을 밟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청과 조선의 관계도 더는 형제 관계일 수 없었다. 군부인 명 황제에 등을 돌리고 청 황제를 새 군주로 섬기지 않는다면,
다른 말로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 곧 국가정체성을 시세에 따라 바꿀 수 없다면 전쟁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조선의 패배는 명약관화하였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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