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호배타적인 영역을 고집하는 쪽에 가까운 전통 사회 (내 친구인 산사람들, 다니족, 이누피아크족)의 사례들을 수집한 결과, 다음과 같은 네조건이 복합적으로 결합된다는 걸 알아냈다. 첫째, 배타적인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인구밀도도 높아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 모두가 경계선을 순찰하는 데 특별히 시간을 할애하는 수고를 면할 수 있고, 구성원들이 정상적으로 수렵채집을 하는 동안 불법침입자까지 감시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배타적인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적이고 예측가능한 안정된 환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해당 영역의 구성원들은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영역 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해서 영역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다. 셋째, 영역 내에는 생산적인 밭, 과일나무 숲, 혹은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강둑이나 관개수로처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귀중한 고정자원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구성원들의 정체성이 굳건해야 한다. - P66

배타성이 없거나 덜 비배타적인 사회들은배타성 조건과는 정반대의 조건을 띠기 마련이다. 그런 조건의 하나가 희박한 인구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면서 우연히 불법침입자를 발견할 수는있겠지만, 인구가 적기 때문에 경계선의 순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한 가족으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경계선의 감시에 전적으로 매진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감시탑에 앉아 하루를 꼬박 보낼 수 있는 성인 남자가 그런 사회에 있겠는가. 두 번째 조건은 생산력이 떨어지고 변덕이 심한 환경이다. 이런 환경의 땅에서는 계절에 따라서 혹은 흉작인 해에는기본적인 자원조차 확보할 수 없어, 주기적으로 다른 부족의 영역에 들어가 자원을 구해야 한다. 셋째, 목숨과 바꿀 만한 소중한 자원이 없기때문에 죽음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영역이 공격을받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편이 더 낫다. 끝으로, 구성원들이 자주타부족을 방문하거나 타부족의 땅으로 이주한다면, 따라서 구성원의 수가 유동적이면 영역도 비배타적일 가능성이 크다. 구성원의 절반 가량이방문자이거나 타부족에서 이주한 사람이면, 타부족을 경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비배타적 영역에 관련된 이런 조건들 하에서도 누구나 어디에서든 무엇이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질서하게 땅이 분할되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 각 부족은 자기들만의 핵심적인 지역을 갖는다. 다니족처럼감시탑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완충지대를 두는 대신에 분명한 경계선이없다는 점에서, 또 핵심적인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땅의 소유권이 모호해진다는 점에서, 비배타적인 사회는 배타적인 사회와 다르다.  - P69

 그러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현대 시스템은 전통사회의 접근권과 제약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살았던 전통 사회 사람들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다른 영역에 친척이 있다는 명분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허락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편 수천만의 인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친척‘의 정의는 자국이나 우호국가의 모든 시민으로확대될 수 있고, 허락의 요청은 여권과 비자라는 수단을 통해 형식화되고 인정되지 않는가. - P75

원재료의 불균형한 분포로 인해, 이웃하지만 다른 환경을 차지한 집단들이 자신에게는 많은 반면에 상대에게는 한정된 자원을 공급하는 일반적인 패턴이 조성된다. 해안지역과 내륙 간의 거래가 대표적인 예이다.
위에서 알래스카 이누이트족에 대해 말했듯이, 해안지역 사람들은 해양포유동물과 어패류 같은 해양자원에 접근하기가 용이한 반면에, 내륙 사람들은 사냥터와 밭과 숲 같은 육상자원에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또 다른 공통된 패턴은 소금과 돌처럼 특정한 환경에서만 생산되는않지만 무척 국지적인 원재료의 거래에서 찾아진다. 두 다니족은 일루에카이마 염수호에서 모든 소금을 구했고, 노골로 분지에 있는 단 하나의 채석장에서 도끼와 까뀌를 만드는 모든 돌을 구했다. 한편 남서태평양에서는 날카로운 석공예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흑요석이 주로 뉴브리튼 섬의 탈라시 마을 근처에서 채석되었다. 탈라시 흑요석은 서쪽으로6,400킬로미터나 떨어진 보르네오 섬부터 동쪽으로 3,200킬로미터 떨어진 피지 섬까지 거래되었다.
원재료 거래에서 또 하나의 공통된 패턴은 이웃하지만 생존전략이 다른 집단들 사이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생존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원재료에 집중한다. 예컨대 수렵채집인들은 사냥한 짐승의 고기, 꿀과 수지(樹脂) 및 그 밖의 임산물을 근처의 농경인들에게 팔고, 대신 농경인들이키운 농작물을 받는다. 미국 남서부의 들소 사냥꾼들과 푸에블로족 농경인들, 말레이시아 반도의 사냥꾼인 세망족과 말레이 농경인들, 인도에서는 사냥꾼들과 농경인들의 관계, 아프리카 피그미족 사냥꾼들과 반투족농경인들, 필리핀의 아그타족 사냥꾼과 필리핀 농경인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목축인들과 농경인들의 거래, 아프리카에서는 목축인들과 수렵채집인들의 거래도 비슷한 형태를 띤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브라조 진지가 그곳에 상주하는 인디언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실로 놀라웠다. 백인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정교함과 높은 품질은 그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총에서부터 도끼, 옷, 바늘에 이르기까지, 노란 말은 그런것들을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그들이 지닌 불가해한 능력이 두려웠다. 백인들이 동부에 만들어놓았다는, 물소 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아간다는 거대한 마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해가 갈수록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상인들의 수는 급격히늘어만 갔다. 그리고 이제는 군인들을 보내 아리카라족과 치열히 싸우기까지 했다. 백인들이 아리카라 족을 벌하려 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이보낸 군인들이 겁쟁이에 바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노란 말은 정확히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알수없는 불길한 예감이 결국 큰 재앙을 불러들이고야 말거라고 확신했다.
글래스가 캠프로 들어서자 노란 말이 일어났다. 꺼져가는 모닥불이 그들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글래스는 어떻게든 자신을 성심껏 돌봐준수족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노란 말이 불쾌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소박한 선물로 적합한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약간의 담배나 칼 따위가 있겠지만 그런 하찮은 것들로는 감사의 마음을충분히 전할 수 없었다. 글래스는 노란 말에게 다가가 회색곰 발톱으로 만든 목걸이를 인디언의 목에 걸어주었다. - P1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프롤로그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아서

공항의 한 장면
2006년 4월 30일 아침 7시, 나는 공항에서그날 아침 첫 비행기를 타려고 탑승 수속을밟던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가방을 꼭 움켜쥐고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가방이나 상자를 들고 배낭을 멘 여행객들, 아기를 안은 여행객까지 길게 줄을 늘어서서 탑승 수속대를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그 뒤로는 유니폼을 입은 항공사 직원들이 컴퓨터앞에 서 있었다. 낯익은 광경이었다. 역시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조종사와 스튜어디스, 수하물 검색관, 그리고 봇물처럼 밀려드는 여행객들 때문에 위엄 있게 서 있을 뿐 아무 역할도 못하는 두 명의 경찰관이눈에 띄었다. 검색관들은 수하물을 엑스선으로 검사했고, 항공사 직원들은 여행 가방에 물표를 달았으며, 수하물 담당자들은 물표를 단 여행 가방을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려놓으며 탑승자가 탄 항공기까지 올바르게옮겨지기를 바랐다. 탑승 수속대 맞은편에는 신문과 패스트푸드를 파는 상점들이 있었다. 벽시계와 공중전화, 현금인출기,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도 낯익은 것이었다. 물론 터미널 창밖으로 보이는 주로에서 있는 항공기들도 마찬가지였다. - P8

모든 인간 사회가 저마다 독특하지만, 문화적인 패턴이 있어 그런대로일반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적어도 네 가지 부분-인구 규모, 생존 방법, 정치의 집중화, 사회의 계층화에서 일정한 상관관계가 찾아진다.
인구 규모와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획득이 증대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하면,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소규모 유목민보다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자급농이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식량을 획득한다. 또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관개수로를 이용한 집약적 농법을이용하거나, 현대 국가의 기계화 농법을 이용하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훨씬 더 높아진다. 정치적 의사결정도 점점 집중화된다. 따라서 소규모 유목집단처럼 구성원 모두가 참석하는 토론으로 결정하던 방식에서, 현대 국가처럼 정치적 계급구조에서 위쪽에 존재하는 지도자들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사회의 계층화도 복잡해져서, 소규모 유목집단에서는 구성원들이 상대적으로 평등하지만, 중앙집권화된 대규모 사회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것이 신현진이 전한 김형욱의 최후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이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이어지는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되었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도 일본 야쿠자를이용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두고두고 야쿠자에게 코가 꿰일 것을 우려하여 포기한 바 있었다. 김재규는 해외담당차장-차장보담당 국장-프랑스 거점장-파견 요원으로 이어지는 공식 라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했다. 이상열은 일부 파견 요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핵심 과제는 신현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처리했다. 이상열은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노(No)라고 기록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 당시 신현진, 이만수와 직접 면담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국정원 쪽 간부들은 이상일이 살아 있는 한 신현진과 이만수도 더 이상의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2006년 4월 3일 사망했다. 신현진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법당 앞으로 가 끝없이 절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지만, 끝내 김형욱을 살해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형욱의 유해라도 수습하여 유가족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P381

시위대의 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시민들이 유신권력의최말단 촉수로 여긴 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원래 병력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 병력마저도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기에 시위대의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령하면 오토바이나 순찰차를 때려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어 짓밟고 불 질렀다. 시위대의 또 다른 공격 대상은 언론인과 언론사였다. 특히 17일 자 신문에 부산 시내를 들었다 놓은 16일의 격렬한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10월유신 7주년이라는 사실만 강조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한 기자는 "기자신분임을 밝혀도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진압대는 진압대대로 기자를 마구 폭행" 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4.19 당시 시위를 생중계했던 부산문화방송과 김주열의 시신 사진을 실어 혁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부산일보>는 5·16 장학회로 넘어가 어용이 되어 한국방송 부산방송국과 함께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기독교방송은 시위 현장의 한복판인 광복동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평소 용기 있게 유신체제를 비판해온 까닭에 아무 탈이 없었다. <국제신문>은 부산시경 바로 옆이라는 입지 조건 덕에 습격을 면했다. 당시 부마항쟁을 밀착 취재했던 조갑제는 시위대가 표적으로 삼은 언론기관은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선별된 것이란 평가를 기자사회에서 받았다"며 "민중의 분노는 폭발적이라고 해서 결코 눈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기자들, 특히 카메라를든 사진기자들이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언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시위 군중들의 신원 노출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 P388

1979년 10월에 하필이면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나고, 1980년 5월에 하필이면 광주에서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난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그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의 존재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의 발발 이유를 김영삼제명이나 김대중 체포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30년 가까이 지속된 이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이 ‘양‘이라는 변수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좀 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시위의체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박정희는 부산의 데모는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았냐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라며 시위의 배후는 신민당이고, 데모에 나선 것은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똘마니들‘ 이 역사를 바꿨다. 부산시경의 ‘79부마사태의 분석‘ 이란 보고서를 보면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를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지적했다. 특히 야간이 되면서 시위대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 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상점종업원, 고교생 등 도시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 한것이다. 광주항쟁에서도 일정하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지만, 항쟁의 전체 흐름을 볼 때 학생이나 자영업자, 사무직 등 중산층의 역할 또한 경시 할 수 없다. - P392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 패배한 주요한 이유를 경제문제의 악화에서 찾았다. 그런데 1979년도의 경기는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 부마항쟁 직후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부마항쟁이 발발한 첫 번째 이유는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부산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전에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꼽지만, 당대의 민중들, 그것도 박정희가 특별한 연고를 가진 부산 시민들은 정치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실패 때문에 박정희의 사진을 불태웠고 유신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시민들의저항이 확산되려 하자 박정희는 발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가 김재규의 총에 맞게 된다. - P393

재야민주 세력은 ‘선 개통령 선출, 후 개헌‘을 유신 잔당들이 "자신들의 부패한 특권지배를 끝내 온존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기극"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11월 24일 명동 YWCA 회관에서는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신랑은 민주화운동 진영의 꽃미남이었지만 신부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계엄령 때문에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장 결혼식‘을 빌려 국민대회를 연 것이다(이날의 신17랑 홍성엽은 ‘위장 결혼식‘을 한 탓인지 진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총각으로 살다 안타깝게 2005년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국민대회 준비위원장 백기완 등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 P405

 1980년대는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무거운 시대, 한마디로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 라는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자 흩어졌던 시위대가 비명을 지르며 몰려왔다. 경찰이 최루탄을 하염없이 쏴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태훈의 몸 위로 최루탄 분말이 눈처럼 하얗게 쌓였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입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 P422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싸움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유신체제의 핵심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주만큼은 승리한 투쟁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오늘이다.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이런 상황이 고착되어버린다면 도청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죽음을 ‘홍어‘ 운운하며 모욕하는 벌레들이 아니라이런 현실이 고착되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가 그들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 P4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박정희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979년 7월에 발간된 <신동아>에 실린 글은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 전략이었다면 "1960년대 전반에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 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정희는 늘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운동‘ 이다"라고 강조했지만,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업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등 발전, 농가부채, 비민주적 농정,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 구조적인 문제는 손대지 않고 소득 증대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시행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뤘다면 지금의 농촌이 저렇게 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 P292

유신시대에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방위산업을 총괄했던 오원철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2년 초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라는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부는 캐나다와 교섭하여 고리 원자력발전소1. 2호기의 경수로 모델과 다른 캔두형 중수로(원전을 세우지 않고도 연료봉교환이 가능)를 도입하려 했다. 이것이 이제 설계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이다. 정부는 또 프랑스와 교섭하여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자했다. 한국보다 앞서 중수로를 도입한 인도가 1974년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중수로를 도입하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특히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단 한 기도 없는 상황에서 재처리 시설을 서둘러 도입하려한 것은 그 의심을 확신 수준으로 굳게 만들었다. 한국의 원자력 학계와업계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주학살을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미국이 불편해했던 핵 관련 기술을 일체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원자력 학계에서는 이를 치욕의 창씨개명 이라 부른다.
+ 스리마일사고 - P309

중학교 무시험과 고교 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군댔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 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58년 개띠 란 말도 있듯이 이 세대는 바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열은 대단했고, 이제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와 같이 소수 엘리트의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등보통교육‘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들에게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 P330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남민전이라는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 P3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