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979년 7월에 발간된 <신동아>에 실린 글은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 전략이었다면 "1960년대 전반에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 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정희는 늘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운동‘ 이다"라고 강조했지만,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업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등 발전, 농가부채, 비민주적 농정,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 구조적인 문제는 손대지 않고 소득 증대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시행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뤘다면 지금의 농촌이 저렇게 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 P292
유신시대에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방위산업을 총괄했던 오원철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2년 초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라는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부는 캐나다와 교섭하여 고리 원자력발전소1. 2호기의 경수로 모델과 다른 캔두형 중수로(원전을 세우지 않고도 연료봉교환이 가능)를 도입하려 했다. 이것이 이제 설계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이다. 정부는 또 프랑스와 교섭하여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자했다. 한국보다 앞서 중수로를 도입한 인도가 1974년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중수로를 도입하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특히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단 한 기도 없는 상황에서 재처리 시설을 서둘러 도입하려한 것은 그 의심을 확신 수준으로 굳게 만들었다. 한국의 원자력 학계와업계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주학살을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미국이 불편해했던 핵 관련 기술을 일체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원자력 학계에서는 이를 치욕의 창씨개명 이라 부른다. + 스리마일사고 - P309
중학교 무시험과 고교 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군댔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 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58년 개띠 란 말도 있듯이 이 세대는 바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열은 대단했고, 이제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와 같이 소수 엘리트의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등보통교육‘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들에게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 P330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남민전이라는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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