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 저 호수, 저 집들, 저 성당이 보이세요? 오백 년 전에도 저 모든 것이 지금과 거의 흡사했어요. 도시가 텅 비어 있었다는것만 빼고 말이죠. 정체불명의 역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죠.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사람들은 그 역병을 흑사병이라고 불렀죠. 그건 신이 죄악에 물든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퍼뜨린 대재앙이었어요. 일군의 사람들이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들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즉 신체적인 아픔을 자신들에게 가했어요. 채찍이나 사슬로 자신을 후려치며 저 다리, 저 길들을 밤낮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그 고통으로 신을 찬양했어요.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이 빵을 굽고, 땅을 경작하고, 가축들을 먹일 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신체적 아픔은 이제 고통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사해주는 쾌락이었죠. 아픔이 기쁨이 되고, 삶의 의미, 쾌락이 되었던 겁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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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모처럼 떠받드는 명조인데, 시험 삼아 과연 너를 (정말로) 구원하는지 짐은 점을 치려 한다. 자식이 화를 당하는데 어찌 아비가 구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천명을 받들어 거병하여,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조선국왕을 포위했는데, 과연 조선이 부모로 섬기는 명이 그 자식을 구하러 오는지 지켜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당시 명의 군사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함은 쌍방 모두에게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 문장은 홍타이지의 군사적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조선에 대한 조롱섞인 엄중한 경고이자, 대단원의 여운을 이어주는 일종의 카덴차cadenza라 할 수 있다.
이상 살핀 후반부 내용은 사실상 서신의 골자를 담고 있으며, 구성으로 보아도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을 이룬다. 그런데 이런 내용 전체가 『승정원일기』에 완전히 누락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관청의 기록이므로 사정에 따라 내용을 적지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어떤 사정이었을까? 농성중이라 일일이 옮겨 적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테다. 지금까지 살핀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음이 확실하다. 대청 황제의 ‘정벌‘을 초래할 정도로 큰 죄, 곧 천명을 거스른 죄를 고스란히 인조에게 묻는 내용을 그대로는 도저히 실록에 기록할 수 없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천명은 오로지 명 황제에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 P141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 맥락에서 폭넓게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차이를 비교해 인식할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에 새롭게 이념화한 군부·신자 관계가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도 작동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국토(왕조의 하드웨어)가 황폐해졌어도 정체성(왕조의 소프트웨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군부·신자 관계에 재조지은이라는 경험이 배어들면서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명도 조선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북쪽으로는 만주 일대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병자호란은 기존의 국제 관계를 뿌리째 뒤흔든사건이었다. 조선이 명·청 교체를 현실로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16세기에 형성된 부자 관계라는 절대 가치 때문이었다. 과거에 송을 무너트린 여진이 중원을 차지하고 제국을 세운 뒤 종족과 무관하게 누구나 천명을 받을 수 있음을 설파한 바 있는데, 그 후예인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 또한 똑같은 논리로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배타적 화이 의식을 강조한 남송의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중화 문명국인 명과의 관계를 군신 및 부자 관계로 절대화한 나라였다. 이것이 바로 어떤 궁지에 몰리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었다. 또한 이 점이야말로 이길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척화를 외치다가 남한산성에 스스로 갇힌 이유였다. 금수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느니 성안에서 척화를 외치다 교화받은 인간, 곧 (소)중화인으로 당당하게 죽겠다는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런 국가정체성을 심히 조롱하고 유린한 홍타이지의 언설을 그대로 실록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후대에 남길 실록을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에게 굴복하였지만 『인조실록』을 편찬한 1653년까지, 더 나아가 『승정원일기』를 개수하던 18세기까지도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역사기록historiography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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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평화롭게 먹고, 자고, 일할 수 없다. 열정은 과거에 속하는 것들을 모두 파괴해버린다. 사람들이 열정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가 와해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여 위협을 통제하고, 이미먼지로 변해버린 구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낡아버린 것의 기술자들이다.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열정에서 찾기를 희망하며 무작정 뛰어든다. 그들은 행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 열정의 대상에게 돌리고, 불행이 닥치면 그를 죄인으로 삼는다. 그들은 뭔가 신비스러운 것이 그들에게 닥쳤기 때문에 행복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사건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그것에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덜 파괴적인 태도일까?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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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늘 배려해야 했다. 부하직원, 고객, 납품업자, 편견, 비밀, 거짓, 위선, 두려움, 압력이 끊임없이 난무하는 직장에서 그토록 영향력 있고 거만한 그남자들이 나이트클럽에 와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하룻밤 동안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350스위스프랑쯤 낭비하는 것은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룻밤? 마리아, 과장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건 사십오 분정도에 불과해. 아니, 옷 벗고, 예의상 애정 어린 몸짓을 하고, 하나마나한 대화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옷입는 시간을 빼면, 섹스를하는 시간은 고작 십일 분밖에 안 되잖아."
11분.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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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보면, 전운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조정신료들의 선택은 전략적 판단에 따른 방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당시의 척화론은 정책policy으로 보기 어렵다. 상황에 따라수시로 절충이 가능한 정책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바꿀 수 없는 국시 곧 국가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라가 설사 망할지라도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가 조정을 뒤덮었고, 그런 논의를 제어할 권위를 가진 자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 국가정체성을수호하자는 주장이었기에, 척화론은 국왕의 권위보다 한참 더 위에 있었다. - P114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의 건국은 조선에 매우 특별한 의미였다. 당 몰락 후 중원은 북방 정복왕조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명은400여 년 만에 한인이 중원을 확실하게 ‘정화‘한 매우 특별한 ‘중화제국[中朝]‘이었다. 단순한 강대국 차원이 아니라 주-한-당-송으로 이어진 유교적 중화문명의 담지자, 곧 한인의 중화제국이자 천자국이었다. 특히 주자학을 국시로 천명하고 출범한 조선왕조에서는 주자학적 화이관이 매우 강고하였다. 그 결과 16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명·조선 관계의 본질을 이전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를 추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충과 효에 동시에 기초한 군부·신자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명과 조선은 군신 관계를 넘어 부자 관계로까지 이념화된 상황이었다. 
군신관계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관계가 아닌 상대적 가치였다. 이에 비해 부자 관계는 부모가 아무리 패악하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부자 관계를 스스로 끊을 길이 없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였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라는 말이 조선 사회에서 널리 회자한 이유였다. 또한 바로 이 점이 명·청 교체를 맞아 조선인이 이전 고려 때와는 달리 천자(군부)를 바꾸는 데심각한 윤리적 부담을 느낀 이유였다. 이륜彛倫 문제가 복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확인했듯이, 척화론에는 명과 조선이 부자 관계로 묶여 있음을 강조한 논변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는 척화론의 기본 논리가 명과 조선은 충과 효에 동시에 기초한 군부·신자관계라는 절대 가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상황을 초월하는 가치, 다른 말로 조선왕조의 국시이자 존재 이유, 곧 국가정체성이었다는 것이다. - P122

요컨대, 누란지세累卵之勢의 국가 위기에서도 척화론이 여론을 주도한 연유를 사대 의리나 재조지은, 예교질서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더 본질적인 변수가 있었다. 군위신강(충)과 부위자강(효)에 기반한 군부·신자 관계라는 정체성이 가장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또한 이런 명분론적 척화론의 기저에는 바로 양반지배층의기득권(지배 구조)을 고수하기 위한 현실적 이해관계도 강하게 복류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척화론이 조선왕조의국시이자 정체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조야를 뒤덮었을 뿐만아니라 조선 후기 내내 정치·지성사의 흐름을 주도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이자 의리론으로만 파악한다면, 당시 조선은 정말이지 매우 ‘이상한‘ 나라로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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