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케팅 수단이 필요했고, 그쪽은 공정무역을 대표할 만한 상품이 필요했죠. ‘여기 확실한 공정 무역 제품이 있습니다. 사세요! 라고말이죠. 우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설교 시간에 우리 회사 초콜릿을 이야기해 주는 목사님도 많았습니다. 오전 예배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우리 회사 초콜릿을 돌렸습니다. 재단 덕분에 돈을 많이번 건 사실입니다. 그들도 우리 덕을 본 건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크레이그는 이별의 원인이 몇 가지 있었다고 했다.
"재단에서 터무니없는 규정을 내세우며 로고 사용료를 너무 많이 요구했습니다. 처음엔 2퍼센트라고 했다가, 좀 있다가 3퍼센트, 또 금방 4퍼센트를 달라고 했습니다. 얼굴이 어떻게 그리 확 변하는지."
사실 도매상이 지급하는 비용은 공정 무역 재단의 수익에서 가장 큰비중을 차지한다. 도매상이 공정 무역 재단의 브랜드 사용료로 지급하는 돈은 영국 공정 무역 재단 총수입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중 절반이 인증 제도를 운영하고 감독하는 행정비로 지출된다.
그렇다면 수입의 나머지 반은 농부들에게 돌아가는 것일까? 천만의말씀. 남은 돈은 공정 무역 브랜드의 캠페인과 홍보비로 나간다. 공정무역 재단은 브랜드 홍보 및 광고비로 수입의 절반가량을 쓴다. 이런 지출이 목표 달성에 상당히 성공적이었음을 수치가 말해 준다. - P72

P4공정무역 재단은 개발도상국의 농장을 인증하고 감사하는 세계 공정무역 상표 협회(FLO)와 별개로 운영된다. 영국 공정 무역 재단은 자신의로고를 사용하는 영국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는다. 그 돈으로 로고를 사용하는 영국 기업을 최대한 늘리는 활동을 벌인다. 당연히 많은 기업과계약할수록 사업은 성공적이다. 따라서 공정 무역 로고에 새로운 고객을끌어들이는 것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와 제휴를 맺음으로써 소비자들에게 공정 무역 로고를 알리는 것도 그들의 전략이다.
크레이그는 공정무역 재단의 접근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0년 즈음에 마야 골드바에서 공정 무역 마크를 떼어 냈는데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선구자적인 제품인데 마크를 떼라고 하니 억울하기도 했지요.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었는데 우리 손으로 딴죽을 건 셈이니까요. 그건 교황이 가톨릭교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이그의 가장 큰 고민은 공정 무역 재단이 브랜드 인지도가 확대되면서 제휴 업체로 영세 기업보다는 대기업을 선호하게 되고, 그리하여 영리를 우선으로 하는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점점 더 많이 보증하는 지금의 상황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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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른둘이다. 1986년의 이 가을날, 여전히 수도원에기거하는 서른두 명. 수도원은 낯빛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아찔한 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했다. 천 년이 흐르도록 아무것도변하지 않았다. 길의 깎아지름도, 그 아찔함도. 서른두 개의굳건한 마음과 허공을 굽어보는 곳에서 살려면 그래야만-한다 젊어서는 마찬가지로 굳건했던 서른두 개의 육신 몇시간 뒤면 그 수가 하나 줄 터이다. - P7

 그녀를 지키려고 여기에 있다는 설, 협소한 그 독실로부터 몇백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리석의 어둠에 갇혀 기다리고 있는 그녀, 40년 전부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그녀를. 사크라 수도원의 수도사들 모두는 그녀를 본 적이 한 번씩은 있었다.
모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수도원장인 빈첸초 신부에게 허락을 구하기만 하면 될 테지만, 감히그러는 수도사는 거의 없다. 사람들 말로는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간 자들에게 찾아든다는, 그런 불경한 생각들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어둠에 휩싸인 채 천사의 얼굴을 한 꿈에쫓기다 보면, 수도사들은 진력이, 그런 불경한 생각에 진력이난다.
죽어 가는 이가 버둥거리다가 눈을 떴고, 그러고는 다시 감는다. 수도사 중 한 명은 그 눈에서 기쁨을 읽었노라고 맹세한다 - 그가 틀렸다. 누군가가 그의 이마와 입술에 차가운물수건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환자가 다시 버둥거리고, 이번에야말로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네요.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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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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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떠나고 한참 뒤, 미국 대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가 이곳에 진출했다. 그리고 바나나와 목재를 수출해 수억 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하지만 풍토병이 퍼지면서 바나나로 돈을 버는 시대도 끝났다. 그 후 이 지역 사람들은 열대 우림 벌목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지난 50년 동안155만헥타르(서울 면적의 약 26배)에 달하는 산림이 벌목과 농업으로 손실되었다. 미스키토 지역의 산림 파괴에 대한 니카라과 환경 단체의 반발이 심해지자 니카라과 정부는 2006년 5월, 마호가니와 삼나무, 포초테,소나무, 맹그로브, 케이폭 나무에 대해 10년간 벌채 및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바닷가재잡이는 마지막 남은 돈벌이 수단이었다. - P29

다이버들에게 수심계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나 깊이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부 미국의 바닷가재잡이와 관련된 기업들은 그물로잡은 바닷가재만 구매할 수는 없다고 시인하면서도 ‘오직 얕은 바다에뛰어내려 손으로 잡은 바닷가재만 사들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기서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데 다이버들이 얼마나 깊이 잠수하는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다이버 스스로도 자신이 어디까지 잠수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다이버가 해협의 바닥 근처까지 가 보았다고 말했다. 배의 GPS를 보면 적어도 수심 30~40미터까지 내려간 것이 틀림없었다. 오전 작업이 끝나면 작업할 때마다 그 정도 깊이를 네댓 번씩 오르내렸다. 오전작업이 끝나면 생선과 밥으로 점심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오후 작업을 시작했다. 다이버 한 사람이 하루에 30미터 깊이를 총 열 번씩 왕복한다. 배에 탄 다이버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은 열다섯 살이었다.
젊은이들은 회사가 식사에다 공기통 비용까지 대주고 있으므로 자신들이 제도 다이버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에수에라에서 온 열일곱살짜리 소년 에두아르도는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그러다가 망가지는 몸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 P37

샌디 베이는 코카인으로 번 돈을 바탕으로 자체적인 개발 프로젝트를진행했다. 그 덕분에 새집과 학교, 교회가 들어섰다. 이것은 마약 거래가 야기한 여러 가지 모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코카인은 심각한 사회적문제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부 역시 가져다주었다. 다른 경제적 기회가전혀 없는 상황에서 코카인 무역이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빌위에서 온 전도사, 카를로스 코핀은 샌디 베이의 미스키토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에게 코카인이 정부보다 지역 사회 발전에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건 물어보나 마나죠. 당연히 코카인이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도움이 됐습니다. 안타깝지만 마약이 큰 공을 세운 것이 사실이에요. 저아름다운 집들을 보세요. 다 마약으로 지은 겁니다. 이건 세금과 같습니다. 학교나 교회는 정부가 세워 주지 않았어요. 다 어부들이 주운 물건에서 난 돈으로 지은 거죠. 마약에서 번 돈으로 학교도 세우고 교회 지붕도 바꿨습니다. 여기 목사들은 마약을 판 돈에서 자기 몫을 못 받으면성을 냅니다. 신자 한 사람이 15킬로그램짜리를 발견한다고 칩시다. 1킬로그램에 3500달러(388만 원)쯤 하니까 15를 곱하면 5만 2500달러5820만원)잖아요. 목사들은 여기에 십일조(10퍼센트)를 요구합니다. ‘신께서 주신 5250달러(582만원)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면서요." - P45

노먼은 니카라과 정부에 손을 벌리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공급망에서 가장 강력한 축은 니카라과 정부가 아니라, 미국 레스토랑과 해산물 기업이다. 그들이야말로 다이버들의 작업 환경에 가장 큰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존재다. 많은 기업이 공정한 거래와 사회적 책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의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업적인 이유도 깔려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 ‘윤리적‘인 것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드랍스터 컴퍼니의 메뉴판에는 자사가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해양 보존에 힘쓰고 있으니 고객님 앞에 놓인 음식은 맛도 훌륭할 뿐 아니라 기분까지 좋게 해 준다는 자랑스러운 문구가 실려 있다. 그러나 메뉴판 어디에도 니카라과 다이버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공급망의 이런 어두운면에 대해 묻자 다든(레드 랍스터 컴퍼니의 모회사)의 구매 및 조달 부서 상무, 빌 허지그가 이렇게 응수했다.
"저희 상품 설명서에는 다이빙을 해서 포획한 바닷가재를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수확한 바닷가재만 취급합니다. - P48

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윤리적 무역은 분명큰 사업이 되고 있다. 대기업이 이런 새로운 윤리적 이상을 옹호하는 이유가 얼마나 진실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윤리 인증이 경쟁 우위를 점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미국의 레드 랍스터 컴퍼니는레스토랑의 모든 메뉴판에 윤리적인 자격 요건을 갖췄다며 자랑스레 홍보한다. 이를 통해 고객 충성도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 맥도날드는 열대 우림 동맹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커피 판매량이 크게 상승했다. 윤리적인 행위로 인해 실적이 좋아졌다는 것으로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스키토 해안의 상황을 직접 보고 온 나로서는 전체 그림이 언제나 장밋빛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고무적인 일들이 과연 타당한지 의심해 봐야 한다. 더불어 윤리적 무역 자체가거대한 사업이 된 뒤에도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따져 봐야 한다. - P57

댄은 소비자가 게으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정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강한 소비자는 어지간해서는 브랜드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댄이 말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브랜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내 차가 제일 좋아. 내 커피가 제일 좋아. 그리고 사람들은캐드버리나 네슬레 같은 유명한 대형 브랜드의 제품이 공정 무역을 위해)품질을 희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이 가난한 농부들을 지원하면서 더 윤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느끼길 원하지만, 그렇다고 품질이 낮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제품을 구매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대기업의 해법은 명백하다. 팔고 있는 제품을 그대로 생산하되, 소비자를 안심시킬 수 있는윤리적 로고를 붙이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얻는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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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이 모든 조각을 모아서 완벽하게 맞추는 손길도 있어야 합니다. 목표로 인도하고 전쟁의 불가피한 요소 앞에서 움츠리지 않는 지성 말이지요."
"그리고 그게 너의 역할이었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결국 네가다이달로스와 비슷한 거다. 너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것만다를 뿐."
그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란. 아무것도 섞지 않은 순수한포도주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죽자 아가멤논이 저를 아카이오이 최고의 전사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전사들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전쟁의 본질 앞에서는 움찔했거든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파악할 수있을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맨 가슴에서는 흉터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뭐가 들었는지 들어보려는 듯 흉터를 살짝 두드렸다. "예를 들면 어떤 것 말이냐?"
"첩자가 잡히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비밀을 캐낸 뒤에 처형해야 합니다. 폭도는 두들겨패야 하고요. 삐친 영웅이 있으면 달래주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고요. 필록테테스라는 위대한 영웅이 상처가 곪아서 불구가 됐을 때 병사들은 그 일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어느 섬에 버려두고 그가 자청해서 남은 거라고 말했죠. 아이아스와 아가멤논은 죽을때까지 트로이아의 잠긴 성문을 두드릴 기세였지만 목마라는 묘책 - P275

을 생각하고 트로이아 병사들이 그걸 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저였습니다. 정예부대와 함께 목마의 뱃속에 웅크리고 숨어서 공포와 중압감으로 떠는 병사가 있으면 그의 목에 칼을 갖다댔고요. 트로이아 병사들이 마침내 잠이 들자 우리는 보드라운 깃털의 병아리떼 속에 섞인 여우처럼 목마를 가르고 나왔습니다."
재판정에서 부를 노래도, 위대한 황금시대를 기리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입을 거치면 졸렬하지 않고, 타당하고 감동적이며 현명하도록 실용적으로 들렸다.
"애초에 참전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다른 왕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았으면서."
그는 뺨을 문질렀다. "아, 제가 한 어리석은 맹세 때문이었죠. 발을빼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아들이 한 살이었고 아직 신혼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이름을 떨칠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아가멤논이 보낸 남자들이 저를 데리러 왔을 때 미친 척을 했습니다. 알몸으로 나가서 겨울 들판을 쟁기질하면서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쟁기날이 지나가는 길에 제 갓난 아들을 두었지 뭡니까. 당연히 쟁기질을멈추었고 나머지와 함께 불려갔죠." - P276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걸알았다. 그가 전장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성정이 얇은 유리와도 같은 왕들과 골이 난 왕자들을 다독이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전사들 간의 균형을 도모해갔던 세월들. 불을 뿜는 아이에테스의 황소를 오로지 술책의 도움으로 길들인 것에 비견할 만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이타케로 돌아가면 그렇게 성미가 까다로운 영웅도, 각료회의도, 한밤중의 습격도 없었고, 그가 필사적으로 전략을 강구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면, 벽난로와 올리브 숲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가 나와 부부처럼 오순도순 지낸 것은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벽난로 옆에 앉았을 때, 내 꽃밭에서 일을 했을 때 그는 그 요령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도끼로 살이 아니라 나무를 쪼개면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하면 다이달로스가 만든 이음새처럼 부드럽게 다시 페넬로페에게 맞출 수 있을지.
그는 내 옆에서 잠을 잤다. 가끔 숨이 그의 목젖에 걸릴 때가 있었다. 컥.
파시파에라면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붙잡으라고 했을 것이다. 아이에테스라면 그에게서 기지를 없애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주입한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그의 멍한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가 내 무릎 가에 앉아서 흠모하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볼 것이다.

 그는 내게 자기 흉터를 보여주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무 흉터도 없는 척하는 나를 모르는 척 해주었다.
그가 배에 올라탔고 나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가고 없었다.

노래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 장면을 묘사할까? 외로운 곳 위에 서있는 여신,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연인. 촉촉하지만 뜻을 헤아릴 수없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두 눈, 동물들이그녀의 치맛자락으로 모인다. 참피나무가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가 한손을 들어 자기배를 만진다. - P306

MENU"그림자는 필요 없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그리고너 같은 것은 내 의도를 물을 자격이 없고."
우뚝하고 꼿꼿한 그녀가 번쩍하고 하얗게 등장하자 번개의 발톱이 밤하늘을 갈랐다. 말갈기가 달린 투구가 천장에 닿았다. 거울 갑옷이 번뜩거렸다. 손에 쥔 창은 길고 가늘었고, 예리한 날이 장작불빛을 받고 어른거렸다. 그녀는 확신으로 이글거렸고 혼잡스럽고 얼룩진 이 세상의 모든 부스러기들이 그 앞에서 오그라들었다. 제우스의 총애를 받는 눈부신 딸, 아테나였다.
"내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다시 그 금속을 베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전에도 높은 신 앞에 선 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헤르메스, 아폴론.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들과 다르게 나를 관통했다. 오디세우스가 예전에 얘기하길그녀는 머리카락 두께로 벼려진 칼날과 같다고, 워낙 정교하기 때문에 맥박이 뛸 때마다 내 몸속의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 칼에 베인 줄도 모를거라고 했다.
그녀가 티끌 하나 없는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내놓아라."
방안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심지어 내 옆에서 탁탁거리는 장작불마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느껴졌다.
"싫습니다."
그녀의 눈은 은색과 바위 같은 회색이 서로 엮여 있었다. "나한테맞서겠다는 거냐?"
공기가 답답해졌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그 유명한 아이기스가 반짝였다. 금실로 테두리를 꿰맨 가죽 - P318

갑옷이었다. 그녀가 직접 벗겨서 무두질한 티탄 신족의 거죽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었다. 항복하고 자비를 빌지 않으면 네 거죽을 입고 다녀주마. 혀가 말랐고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온 세상을 통틀어 아는 게 한가지 있다면 신들에게 자비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살갗을 잡고 비틀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마음이 진정됐다. - P319

트리곤의 꼬리. 내가 아이의 손에 쥐어준 죽음의 도구"그분의 얼굴이 그냥...... 멈추었어요. 그대로 쓰러졌어요. 독을닦아내려고 했지만 상처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요. 제 어머니에게로모시고 갈게요, 제가 말했어요. 어머니가 도와주실 거라고요. 그분의입술이 하얘졌어요. 저는 그분을 안았어요. 저는 키르케 여신에게서태어난 당신의 아들 텔레고노스입니다. 그분은 제 얘기를 들었어요.제가 생각하기에는 들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 다음 저를 쳐다보고....... 숨을 거두셨어요."
내 입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분명해졌다. 꽁꽁 감추고 있었던 아테나의 절박함, 텔레고노스를 살려두면 우리 둘다 후회하게 될 거라며 지었던 굳은 표정. 그녀는 이 아이가 자신이사랑하는 사람을 해칠까봐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테나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나는 손으로 입을 눌렀다. "오디세우스"
아이는 그 단어가 무슨 저주라도 되는 양 몸을 움츠렸다. "저는 경고하려고 했어요. 저는......" 아이는 목이 메어서 더이상 말을 잇지못했다.
나와 그렇게 많은 밤을 함께한 남자가 내가 들려 보낸 무기에 찔려 내 아들의 품에서 죽다니. 운명의 여신들이 나와 아테나와 우리모두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예언에 반항하면 할수록 그 예언은 더욱 단단히 숨통을조인다는 것.  - P376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건. 왜였일까요? 한순간의 자 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면 구혼자들은 찾아올 일이 없었겠죠. 제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제 삶도.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걸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게 끔찍한 인생이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을 꼬드겨놓고 내팽개친 게 아닙니까."
나는 그게 아니라고 얘기하려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의 곁에누워 있으면서도, 페넬로페를 생각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시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텔레마코스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 P416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는아테나.그녀는 아끼는 영웅을 고향으로 데려가 백성들 사이에서 자신과 함께 찬양을 누리며 떠받들어지는 광경을 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가전하는 승전담과, 함께 쓰러뜨린 트로이아군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운운하며 지은 탐욕스러운 눈빛을 기억했다. 발톱으로 먹잇감을 거머쥔 올빼미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총아가 재미없고 가정적인 인간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고군분투하고 목표를 향해 달리고, 항상 허를 찌르는 새로운 지략과 불쑥 소환하는 번뜩임으로 그녀에게 재미를 선사하며, 눈부시고 탁월하게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아야 했다.
창밖에서는 나무들이 까만 하늘을 등지고 몸부림쳤다. 그 섬뜩한빛 속에서 페넬로페의 얼굴선이 다이달로스가 만든 조각상처럼 정교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좀더 질투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남편을 빼앗아간 여신은 내가아니었다.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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