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는 건 아냐.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 건 그냥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느낌이들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인 데다 벌써 깊이 묻어 버린 거니까."
사라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는 건 분명히 위험한 일이야."
"위험하다고, 어떻게?"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 P51

도쿄로 돌아오고서 다섯 달, 쓰쿠루는 죽음의 입구에서 살았다. 바닥없는 시커먼 구멍의 테두리에 아주 작은공간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 살았다. 잠을 자다 몸을 뒤척이면 그냥 허무의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고 말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를 느꼈을 따름이었다.
- P52

아마도 그때 꿈이라는 형태로 그의 내부를 통과하던 그 타는 듯한 삶의 감각이 그 순간까지 그를 집요하게 지배하던 죽음에 대한 동경을 죽여 없애고 지워 버린 것이 아닐까. 세찬 서풍이 두꺼운 구름을 날려 버리듯이. 쓰쿠루는그렇게 추측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체념을 닮은 조용한 사색뿐이었다. 그것은 색채가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중립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텅 비어 버린 오래되고 큰 집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오래되고 거대한 괘종시계가 시간을 새기는 울적한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었다. 입을 다물고 눈길 한번 떼지 않고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얇은 막 같은 것으로 감정을 몇 겹이나 감싸고 마음을 텅 비워 낸 채 한시간마다 착실하게 늙어 갔다.
- P62

"어떨까요? 난 모르죠. 그렇지만 아마도 그때 아버지에게는 믿느냐 안 믿느냐 문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아버지는그 이상한 이야기를 이상한 이야기 그대로 그냥 받아들였을 거예요. 뱀이 입에 문 먹이를 씹지도 않고 통째로 천천히 삼킨 다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소화시키듯이."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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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도 사회적 거래를 적용한다. 예컨대 초자연적 존재와의 관계조차 우리는 사회적 거래관계로 인식한다. 자연 세계를 사회적인 거래 관계로 의인화하는것은 세계의 공통된 현상이다. 우리는 트로이 전쟁에서의 패전, 고대 이집트의 메뚜기 재해, 나미브 사막의 가뭄, 주말에 교외로 나갔다가 겪게 된 재수없는 일 따위를 우리가 저지른 잘못때문에 신이 화를 내셨다〉라는 식으로 논리적 정당화를 한다. 고장이 잦은 기계를 발로 걷어차면서 그 무생물이 품고 있는 앙심에대해 욕설을 퍼붓는 우리의 일상 행동에서도 의인화의 습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제물과 음식을 바치고 정성껏 기도를하면 신이 흡족해 그 대가로 군사적 승리나 풍년 또는 천당 입장권 따위를 내려줄 것으로 기대한다. 종교가 있든 없든 간에 불운이나 행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대한 처벌이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한결같은 태도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우리는 사회적 거래 기관 social-exchange organ 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기전으로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뇌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것은 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확실한 사실들만큼이나 분명하다. 최근 심리학과 경제학 두 학문의 경계 영역에서 놀라운 가설 하나가 나타났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보다 뛰어나기단 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인간의 뇌에는 호혜주의를 구사해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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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따위 날달걀 하나 들이켜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 P7

또한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것이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異)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다자키는 처음부터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이름에 색깔이 있건 없건그 사람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건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했고, 스스로도 놀란 일이지만 꽤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다른 넷은 당연한 것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만일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하고.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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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매그위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나는 앞으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있을 자리는 바로 그곳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이제 그에 대한 나의 모든 혐오감은 완전히 녹아 없어졌으며,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쫓기고 부상당하고 족쇄에 묶인 이 사람에게서 나는 오직, 내 은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사와 관대함의 감정을 기나긴 세월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간직해 온, 그런 사람의 모습만을 보았기때문이다. 그에게서 나는 오직, 조에게 배은망덕하게 행동했던 나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의 모습만을 발견했던 것이다.
- P355

정말이지 조의 자상한 보살핌은 그때그때의 내 필요에 너무나 홀륭하게 잘 부합해 주었으므로 나는 그의 손 안에 놓인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예전처럼 친밀하고 솔직 단순한 태도로,
그리고 드러내지 않고 보호해 주는 태도로 내 곁에 앉아서 내게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고향 집의 낡은 부엌에서 지내던 그 시절 이후의 내 모든 삶이 지나간 내 열병의 정신이상증세의 하나였다는 믿음에 거의 빠져 들곤 했다.  - P393

다음 날 아침 나는 더욱 튼튼하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으며, 지체 없이 조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침 식사 전에 그에게 이야기하리라.
일단, 즉시 옷을 입고 그의 방으로 가서 그를 놀라게 하리라. 왜냐하면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방으로 갔다. 그는 방에 없었다. 방에 없는 것은 조만이 아니었다. 그의 짐 상자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침 식탁이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식탁위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편지의 짤막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난 이제 떠난다. 사랑하는 핍, 네가 다시 건강해졌고 내가 없이도 더 잘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추신, 언제나 최고의 친구.

편지 안에는 내가 체포당했던 원인인 빚과 그 소송 비용을 지불한 영수증이 동봉되어 있었다.  - P402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폐허의 장소에서 걸어 나갔다. 오래전 내가 대장간을 처음 떠났을 때 아침 안개가 걷혔던 것과 똑같이, 그렇게 저녁 안개가 그 순간 대지 위에서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 밑으로 넓게 펼쳐져 나타난, 고요한 달빛 속의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나는 그녀와의 또 다른 이별의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했다.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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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누구를 위해서 이 비밀을 밝히고자 하겠는가? 그 아버지를 위해서? 아이 어머니 때문에 그에게는 별로 득이 될 게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럼 그 어머니를 위해서? 만약 그녀가 그런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그녀는 현재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럼 그 딸을 위해서? 그녀의 출생 비밀을 밝혀 남편에게 알림으로써 20년 동안 피해 왔고 또 앞으로도 평생 안전하게 피할 수 있을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은 그 딸에게도 도움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하네, 하지만 핍, 여기에다 자네가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래서 그녀를 자네의 그 ‘가련한 환상‘, -그런데 그런 환상을 머릿속에 한두 번씩 품어 본 남자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네. - 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는 가정을 한번 덧붙여 보게. 그렇다면 나는 말하건대, 자네는 그렇게 비밀을 밝히느니 차라리 붕대를 감은 자네의 그 왼손을, 붕대를 감은 자네의 그 오른손으로 꽉 찍어서 잘라 낸 다음 그 도끼를 웨믹에게 주고는 남은 오른손마저 잘라내 버리라고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네, 그리고 자네는 아마 잘 생각해 보고 나면 정말로 주저 없이 그렇게 할 것이네."
나는 위믹을 바라보았다. 마우 엄숙한 얼굴로 있던 그는 자기입술에 집게손가락을 엄숙하게 갖다 댔다. 나는 똑같이 그렇게했다. 재거스 씨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자, 웨믹." 재거스 씨는 이제 평소의 태도를 다시 취하며 말했다. "핍 군이 들어왔을 때 어떤 항목을 하던 중이었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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