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뿌리박혀 있다. 성서 신학은 ‘자연의 사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신의 보답이다. 가뭄과 역병은 죄악에 대한 징벌이다. 배가 폭풍을 만나면, 선원 중에 누가 신을 노하게 했는지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순진하고 무지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사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이야말로 능력주의 사고의 기원이다. 그것은권선징악의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부는 재능과노력의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의 친숙한 시각에서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디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든.
- P68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 P71

"내가 과연 선택 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를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돈을 벌어 마음껏 써보려고 일하는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의 일탈이며, 일종의 부패로 여겨졌다.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로록 절제하는 이런 규제된 접근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을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애초의 종교적 동기가 사라진 뒤에도,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축적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에 충실해서 보면 이 드라마의 주요포인트는 능력과 은총 사이의 고조된 긴장에 있다. 평생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본인이(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
- P74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능력주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지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베버는 이렇게 본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자는 때때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 자라고 표현하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한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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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은 눈이 점점 멀어져 이때쯤엔 겨우 서너 발짝 앞에 떨어져 있는 물체만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그의 눈앞엔 오래 전 그가 고향마을에서 보았던 구름이 걸린 앞산의 풍경과 햇빛에 반짝이던 강물, 언젠가 그가 아버지를 따라 산에 나무를하러 갔다가 굴 속에서 발견한 승냥이의 새끼, 또한 오래 전 헤어진 가족의 얼굴과 고향 친지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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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은 1년 반 뒤 자신의 대선 전략을 평가 반성하면서 자신의 패배에 기여했던 능력주의적 오만을 드러내보였다. "저는 미국GDP의 삼분의 이를 생산하는 지역의 삼분의 이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녀는 2018년 뭄바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낙관적이고,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고장들에서 이겼답니다." 트럼프에 대해선 "혹인의 권리를 못마땅해 하고", "여성들이일터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고장들에서 이겼다고 했다. 그녀는세계화 승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트럼프는 ‘루저들의 지지를 얻었다."1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한때 특권층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능력주의의 시대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은 "그래도 나는 미국의 부자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라며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 P55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시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대부분 맞아 들어간다.
- P5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더더욱)그렇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바람직하다. 이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주어진 결과, lot)‘라고 말할 때 그것은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 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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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GETTING IN

2019년 3월, 고등학생들이 대학입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연방 검찰은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포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 등의 명문대에 자녀를 집어넣기 위해 교묘히 설계된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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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사람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리운 마음이 없다는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 없다 (인불가이무지 무치지치 무치의 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依矣), 부끄러울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 으로 만들어진 글자다. 부끄러운 마음은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내 마음이 부끄럽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P217

맹자는 인간이 큰 재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까닭으로 세 가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바로 대궐과 같은 집과 아름다운 처첩들, 그리고 주위의 궁핍한 시림을 도울 수 있는 재력이다. 말하자면 富와 色. 그리고 자비심이다. 이 세 가지 모두를 맹자는 본심을 잃어버린 행위라고 질타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외로 여겨지는 점이 있다. 맹자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행위도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흔히 보이는 심리인데, 남을 돕는 일을 은근히 자랑하는 ‘과시욕‘, 남보다 내가 더 낫다는 ‘우월의식‘, 스스로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만족하는 ‘자기만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은, 맹자가 보기에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마음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 P221

 제자 자로가 완성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던 말로, 《논어》 (한문)에 나와 있다.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하고, 나라기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바치고, 오래된 약속일지라도 평소에 했던 말처럼 잊지 않는다면, 또한 완성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언 역가이위성인(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 우리가 잘 아는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성어가 나오는 말이다. 앞의 예문에서 맹자가 말했던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큰 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이 말들은 도무지 따를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위해 목숨을 던지고, 커다란 부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는가. ‘견리사의 견위수명‘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안중근 의사와같은 인물이 아니면 누구도 자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단호했던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아니 지키려고 노력할 수 있는한 마디의 말을 남겼다. 공자는 ‘오래된 약속도 평소의 말처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평소의 말과 행동에서 신의를 지키고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찰한다면, 비록 부와 권세 앞에서 흔들리기는 하지만 선한 마음을 지키려고노력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P222

나의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에서부터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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