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은 1년 반 뒤 자신의 대선 전략을 평가 반성하면서 자신의 패배에 기여했던 능력주의적 오만을 드러내보였다. "저는 미국GDP의 삼분의 이를 생산하는 지역의 삼분의 이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녀는 2018년 뭄바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낙관적이고, 다양하고,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고장들에서 이겼답니다." 트럼프에 대해선 "혹인의 권리를 못마땅해 하고", "여성들이일터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고장들에서 이겼다고 했다. 그녀는세계화 승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트럼프는 ‘루저들의 지지를 얻었다."1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한때 특권층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능력주의의 시대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은 "그래도 나는 미국의 부자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라며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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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시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대부분 맞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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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더더욱)그렇다.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바람직하다. 이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자이자 시민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주어진 결과, lot)‘라고 말할 때 그것은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 떠올린다. 그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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