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이 인간 본성의 한 특징. 가령 남자가 여자에 비해 더 광범위한 상황에서 섹스를 원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여성이 언제 누구와 섹스를 할지를 제어하고 싶어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진화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 본성의 한 특징이다. 또한 여성의 이익이 남성의 이익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것이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더 중요한 기본적 권리라는 것이 우리의 고유한 가치관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성의 성적 본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무관하게 강간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이 계산법에서,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싫어한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결정론적" 이고 실재론적"인 주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해 보라. 그러한 주장이 없으면 강간을 막으려는 노력과 강간을 받아들이도록 여성을 사회화하려는 노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방법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유연한 원재료라는 이른바 진보적 이론과 완전히 맞아떨어지게 된다. - P294

인간 본성을 부인하면 그 대가로 자유와 행복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행동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는 고귀한 권위주의적 근대 정신이라 불렸던 더 큰 지적 흐름의 일부였고, 그 본질은 "과학적" 원리를 이용해 사회를 하향식으로 재설계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었다. 예를 들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 설계가들이 전통과 취미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당대 도시들의 혼잡과 혼돈을 영속화시킬 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류가 재탄생할 장소를 건축해야 한다. 각사람이 전체와 질서정연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토피아에서 설계가들은 "깨끗한 식탁보"를 가지고 시작해서, "인간의 필요" 에 봉사하는 모든 건물과 공공 장소의 입안을 지도했다. 그들에게는 그 필요를 최소화시킨 개념이 있었다. 즉 각 개인에게는 정해진 만큼의 공기, 열, 빛 그리고 먹고 자고 일하고 출퇴근하는 등의 활동에 필요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가족과 친구들끼리 모이는 것도 인간의 욕구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 주방을 대신하는 거대한 공동 식당을 제안했다. 또한 그의 욕구목록에는 공공 장소에서 소집단들이 어울릴 수 있는 욕구가 포함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설계한 도시에는 대로, 거대한 건물, 넓은 광장들만 있고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잡담을 즐길 수 있다고 느낄 만한 소광장이나 교차로는 없었다. 가정은 "생활을 위한 기계" 여서 정원이나 장식같은 오래된 비효율 요소가 배제되었고, 또 장방형의 거대한 공영 주택단지에 효율적으로 묶였다. - P304

 상대주의적 분위기가 강한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런 잔학 행위들이 다른 세계의 문화적 관습이고 문화는 사람처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초유기체이기 때문에 이를 비난할 수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함정을 피하기 위해 페미니즘 철학자 마서 너스봄은 신체의 보전, 양심의 자유, 정치참여같이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주요 기능적 특성"으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것이 식민주의적인 "개화의 임무" 또는 "백인 여성의 의무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거만한 유럽인이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스봄의 "특성"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보편적 인간 본성을 기초로 했다면 그녀의 도덕적 주장은 충분히 옹호할 만하다. 인간 본성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을 확인하는 척도를 제공한다.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를 영원한 억압, 폭력, 탐욕으로몰아넣는 반동적 교의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 불행의 요소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인간의 해로운 행동을 줄이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와 싸우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포함된 성가신 사실들을 부인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좋은 사실들과 대립시켜야 한다. 사회적 변화를 위한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지적 · 도덕적 자원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그런 종류의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만드는 즐거움과 노고의 보편성을 인정해야 한다.
.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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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당황의 연속 •

‘의좋은형제축제‘라는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의좋은 형제? 밤마다 쌀가마니를 서로의 집에 몰래 옮기다가 달빛 아래 딱 마주쳤다는 그 동화 속 형제? 근데 이걸로 축제를, 그것도 사흘씩이나 한다고? ‘의좋은 형제‘와 ‘축제‘라는 이 터무니없는 조합(누군가에게는 ‘의좋은‘과 ‘형제‘의 조합부터가 터무니없겠지만) 앞에서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었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순간부터 집에서 쌀봉지만 봐도 피식거리며 축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우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P15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랬다. 마술을 보는 그 시간 동안 그가 우리에게 부린 마술. 이렇게 감화되면 안 되는데…… 얼마간의 냉소를 다시 장착해야 하는데 ...... 하는 각성의 순간도잠시. 그 또한 마술쇼가 끝나고 다른 팀이 무대에 오른 후에도 축제장 한편에 서서 인형을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이들, 마술 공연 때는 없었는데 어디선가 몰려든 아이들에게까지 계속 인형을 만들어 주느라 예정보다 한 시간가량 더 지체했던 마술사 앞에서 다시 사그라들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정성껏 인형을 만들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 P25

하나의 예술이자 수련인 어떤 행위, 그것도 이제는 고리타분하게 여겨져 세상으로부터 저 멀리 떠밀려 버린 듯한 어떤 행위를 끝까지 붙들고 모든 것을 쏟아 내는 사람들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조마조마한 존경심을 갖게 한다. 몇 시간 뒤, 무대 옆 게시판에 입상자 명단과 장원작이 나붙자 입상을 고대했을 백발의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내심의 섭섭함을 숨기거나 혹은 숨기지 않은 채 치열하게 작품에 관해 토론하고 바닥에 쭈그려앉아 노트에 장원작을 베껴 적는 모습 또한 그랬다. 주름진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꿈틀댈 때마다 그들의 진지하고 오래된 열정이 꿈틀대는 것 같아 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들 만큼. - P38

이미 수차례 읽은 책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라는 한 문장이면 끝나는 뻔한 이야기. 하지만 ‘이곳‘ 안에도 또 ‘이곳저곳‘이 있었다. 읍내를 통째로 무대로쓰는 이 거대한 연극의 한가운데에서 과거와 현재가 자꾸 겹쳤다.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휴대폰 가게, 영어 학원 등이 자리한 읍내가 너무 현실적이고(현실이니까……….) 일상적인(일상이니까….) 공간이라서 더 그랬다. 아까 마주친 학생들과 주민들을 행렬 안에서 발견해서 더 그랬다. 자꾸 상상하게 됐다. 동네 친구들끼리 모이면 장난이나 치고 깔깔대며 소소한 일상을 일궈 가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전란 앞에 의기투합하여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평범한 날들과 작별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7시에 GS25 앞에서 만나!" "김밥천국 앞에서 윗동네랑 합류하자!" 같은 약속아래 모여 드는 모습을 그 안에서 모두가 의병으로서 만나는 모습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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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잎에 감싸인 여름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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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마지막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천우신조덕이라고 생각하면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철저하게 방재를 한 주택은 요새지, 주택이 아니야. 살기 편할지 어떨지 의심스러워. 요새에 산다는 건 늘 재난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지"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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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닿는 부분은 현관손잡이 빼고는 나무가 좋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현관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니까 금속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편이 좋지. 밖에 있는 문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으면 실내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 같아서 뭔가 쑥스러워." - P145

"우리 집 같은 전통 화과자점은 십 년을 하루같이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게 일이야 똑같다는 데 가치가 있어. 새로운 작품을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만들어도 손님들이 신기해하는 잠깐 동안만 팔리고 손님들은 결국 늘 먹던 것을 원하더라고. 장인기라고 하면 숙련이라든가 세련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인내력과 지구력이야.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사실 아버지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부러울 거야." - P150

감자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흙은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금방 하얗게 말라간다. 오랜 시간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쪼이고있던 새끼 곰 등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면 이런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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