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나를 일곱 살짜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저 그만한 계집아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나는 결코 그저 그만한 어린아이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게 건방지다면 하다못해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나 동네 사람들의 속마음 정도는 두루 알아맞힐 수 있는 눈치만큼은 환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실을 말하자면 내 나이는 여덟 살이거나 아홉 살, 둘 중의 하나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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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농담 반, 진담 반

2219 년 대학을 졸업하고 지구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A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행성 ‘프록시마B‘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그는 행성 이동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200년 전(2019년) 지구에 불시착한다. 미래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와 공학자가 미래 과학기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A에게 몰려든다. - P6

이번에는 당신의 삶을 돌이켜보라. 무엇이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대부분 과학이나 기술, 예술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하찮게 여기며,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정치는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왕의 이름을 달달외우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인터넷은 누가 개발했는지, 세계 인구가 지금처럼 많아질 수 있게 해준 화학 비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했다는 세탁기는 누가 개발했고, 소독약은 언제처음 쓰였는지, 에어컨, 컴퓨터, 기차는 누가 현실화했는지 전혀 알지못한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 Matin Luther를 모르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지만,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한 구텐베르크Gutenberg 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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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안에서 지나치게 오래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거센 돌풍이 방 전체를 흔들어대길 바란다. 누군가 없이 내가 먼저 알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나만을 믿고 살 수는없어서. - P75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있지 못하는 것.  - P152

그러고 나니 더욱더 드라마 등에서 챙김, 특히 ‘엄마의 챙김‘을 받지 못해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면서 엄마를 탓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그걸 보고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엄마들이 떠오를 때마다, 항변하고 싶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았던 아이들 역시 많았다고. 우산 속 자리도 아늑했겠지만 우산밖 빈자리가 우쭐했던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고. 그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가며 커간 아이들이 갖게 되는, 산성비도 부식시키지 못할 단단한 마음 같은 게 있다고.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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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트럭은 멈추었다. 노모와 어린 딸과,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그는 이렇게 하여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遠美洞)의 한 주민이 되었다. 트럭이 멈추자 맨 처음 고개를 내민 것은 강남부동산의 주인 영감이었고 이어서 어디선가 꼬마가 서넛 튀어나와 트럭을 에워쌌다. 미장원집 여자는 퍼머를 말다 말고 흘낏 문을 열어보았다.
지물포집 사내도 도배일을 나가다 트럭이 멈춘 것을 보았다. 연립주택의 이층 창문으로 나타난 퀭한 눈의 한 청년도 트럭이 짐을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국문학』, 1986. 3] - P36

다음 날 아침, 그는 이른 밥상을 앞에 놓고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이제는 새벽밥에도 익숙한 그였다. 거리를 헤매는 동안의 부실한 식사를 생각해서라도 아침밥만은 꼬박꼬박 챙겨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식욕이었다. 간밤의 과음때문이거나 모자란 잠과의 씨름 때문에 거의 그대로인 채의 밥그릇을 남겨놓고 허둥지둥 뛰어나가던 그였다. 출근 시간마다의 그 지쳐 있는 몸짓과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까지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을 아내역시 남편의 묵묵한 식욕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랫목 이불 밑에 시린 손을 묻어놓고 그녀는 심란한 표정으로 그를쳐다보았다. 지난날의 돌을 씹는 듯한, 지겨운 요식 행위에 불과했던 식사법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도 그를 숨 막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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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 이거였다. 나는 갑자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싶어졌다. 지구상의 중요도에 있어서 김도 못 되고, 김위에 바르는 기름도 못 되고, 그 기름을 바르는 솔도 못되는 4차적인 (4차 산업혁명적인 게 아니라 그냥 4차적인) 존재이지만, 그래서 범국민적인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보는 순간, ‘세상에 이런 물건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김솔처럼) 잊고 있던 다른 무언가에 대한 재인식을 동시에 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 인식이라는 것들이 딱 김에 기름 바르는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김솔통. 드디어 찾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 두괄식을 만들어줄 첫 문장. - P19

놀라움에 발이 묶여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그들은
‘가벼운 몸풀기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나로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들은 이제 박쥐 인간이 아니라 배트우먼처럼 보였다. 예순 개를 가뿐히 마치고 땅에 내려와 숨을 고르는 것도 왜 그리 멋지던지. 그때까지도 넋을 잃고 보고 있는 내게 언니 중한 명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어유 야, 놀랄 것 없어. 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는 딱 너같았는데,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
오, 그렇구나,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음이 터졌다. 언니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말해서 그 말의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뻔했다. - P35

언젠가부터 소위 말하는 ‘솔직함‘이라는 것들에 지쳤다. 솔직함은 멋진 미덕이고,
나 역시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하려고 노력하며,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곤 하지만, 솔직함을 무기 삼아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환멸 같은게 생기는건 어쩔 수없다. 이를테면 매해 4월 16일을 전후로 온오프에서 자주 보고 들었던 "세월호 이제 지겹다" 같은 말들.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으로 시작하는(조심스러우면 하지 마………) 어린이나 난민, 성소수자같은 사회적 약자를 사회 바깥으로 더 밀어내고 배제하는 말들.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그런 말들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는 비난과 조롱들.
깨어 있는 사람인 척하는 가식이다, ‘맞말‘하는 걸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피시충이다, 약자를 위하는척하지만 결국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는 위선자들이다. 적어도 난 솔직하다.....… 등등.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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