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인류 역사의 기록 대부분에는 데이터가 누락되어서 생긴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다. ‘인간은 사냥꾼Man the Hunter‘이라는 이론부터 살펴보면 과거에 역사의 기록자들은 인류의 진화-문화적이든 생물학적이든 간에ㅡ에서 여성의 역할이 차지할 자리를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들의 삶이 인류 전체의 삶을 대변하게 되어버렸다. 인류의 나머지 반에 대해서는 침묵뿐인 경우가 많다.
이 침묵은 도처에 있다. 우리 문화 전반에 침묵이 산재한다. 영화, 뉴스, 문학, 과학, 도시계획, 경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여자 모양의 ‘부재‘가 남긴 흔적 때문에 훼손되었다. 이것이 바로 젠더 데이터 공백이다. - P14

남성 보편의 신화를 고집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방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얻은 교훈은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체성은무시하거나 오해하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최근의 대표적인 3가지 예인 트럼프, 브렉시트,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이하 ISIS로 표기)는 세계질서를 뒤집어놓은 국제적 현상인데 그 핵심은 모두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런데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무시는정확하게 성 중립적 보편성의 탈을 쓴 혼란스러운 남성성에 의해 초래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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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승자독식 어휘 중 하나인 ‘좋다‘는 다양한 뜻을 가지지만 기쁨의 감정에서 ‘좋다‘는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만하다‘이고 ‘좋아하다‘는 ‘좋은 느낌을 가지다‘이다. 여기서 보통 이상의 수준이란 사랑스럽다, 예쁘다, 귀엽다, 아름답다 등의 느낌을 주는 사물이나 대상을 일컫는다. ‘사랑스럽다‘는 ‘생김새나 행동이 사랑을 느낄 만큼 귀여운 데가 있다‘이고 ‘예쁘다‘는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이며 ‘귀엽다‘는 ‘예쁘고 곱거나 또는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이다. 또 ‘아름답다‘는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한 데가 있다‘이다. 사랑스럽다, 예쁘다. 귀엽다, 아름답다 등을 느끼면 그 존재를 귀하고 중요하게 여겨 몹시 보살피거나 위하는 마음을 가지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존중‘이다. - P72

마음이 아플 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없다. 씻고 먹고 자는 기본적인 기능조차 마비돼서 부엌 싱크대와 욕실 세면대의 물기는 완전히 말라붙어 먼지가 내려앉고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머릿속만큼이나 집안 공기는 탁하다.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받을 수조차 없는 까닭은 난파선처럼 부서져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있어서이다.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거짓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당신이 나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힘에 부치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없던 창문이 새로 난 것처럼 눈에 들어오고 창문 너머 어린이들이 온몸으로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하늘이 보이고 바람 냄새가 맡아진다. 갑자기 큰 숨을쉬고 싶어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는 광경을 보고 빨리듯 마트에 들어가 몇 가지 식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팔을 걷어붙이고 쌀을 씻고 콩나물과 파를 다듬는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처음 듣지만 내가 좋아하는 리듬이 나오고 밥 짓는 냄새와 국 끓는 냄새가 옅게 떠돈다.
가진 그릇 중 제일 예쁜 그릇에 밥을 퍼서 한 입씩 넣고 씹고 목구멍으로 넘길 때마다 따스하고 폭신하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침대보와 이불보를 새로 바꾸고 "네가 편해지면 언제든 연락해."라고 문자 남긴 친구에게 "이제 나 괜찮다."는 문자를 남기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어쩐지 딱딱했던 심장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것도 같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밑반찬을 몇 가지 더 만들고 빨래를 하고 산책을 하고 서점에 들러 신간을 둘러봐야겠다. 꽃도 사고 연필도 사야겠다. 그러고 싶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일은 어제만큼 아프지 않고 오늘보다 편할 것 같은 예감, 간질간질하다. 어쩌면 모레쯤은 말괄량이 삐삐처럼 보는 것마다 번쩍번쩍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고 뭐라도 저지르고 싶어서 기분이 근질근질한 날이 올 것이다. - P84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잘 참고 잘 억누르고 잘 없애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잘 분출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외부나 내부의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생각‘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좋거나 편하면 받아들이고 싫거나 힘들면 회피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감정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감정을 유발한 원인을 분석해서 어떤 감정인지 할 수 있는 한 세부적이고 정확하게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마음에서 감정조절은 이미 마쳤을 수 있다. 남은 것은 내가 느낀 이 감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의 기준은 기질이나 상황에 따라다르겠지만 설마 화목보다 불화, 즐거움보다 고통, 평안보다 불안을 목표로 삼는 이는 지극히 드물 거라고 본다. - P96

감정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진통제를 취하면 (여기서 진통제란 약물을 포함해 감정의 억압과 회피에 동원되는 모든 수단을가리킨다) 당장의 아픔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감정조절에 실패한다. 이것이 앞서 말한 위염보다 심각한 부작용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상처가 깊어도 붕대로 꽁꽁 싸매고 모르는 체하면 괜찮을줄 알았다. 그런데 과거의 아픔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홀연히 돌아온다. 싸매둔 붕대를 풀면 고약한 냄새와 함께 상처가 썩어 깊이 병들어 있다. 과거에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아서, 아파야 할 때 아파하지않아서 빚으로 돌아오니 인간의 의식이란 얼마나 지독한가. - P97

나쁜 일이 나와 부딪쳐 깨져 마음을 아리고 쓰리고 저리게 만드는 것이 아픔이다. 나쁜 일의 기준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두자고 앞서 말했는데 여기에는 죽음이나 이별, 사고,
파산, 실패 등 운명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 없는 것도 있지만 이러한 것도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눌 수 없는 기쁨, 위로(애도) 받지 못하는 슬픔, 존중받지 못하는 분노, 물리칠 수 없는 혐오, 보호받지 못하는 공포(불안 걱정 두려움), 발견할 수 없는 희망, 인정받지 못하는 신뢰, 충족되지 못하는 욕구..……..….
몸이나 마음이 느끼는 감각이 다같이 ‘아프다‘일지라도 에너지와 방향은 저마다 달라서 각각에 맞는 대처가 필요하다. 아픔이 모두 슬픔인 줄 알아 분노나 혐오, 공포, 희망, 신뢰, 욕구불만까지 "괜찮아질 거야" 식의 위로로 다루려 하면 맞지 않다. 그런데 감정을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슬픔과 분노, 공포가 그렇다. 우리의 마음은 종종 분노나 공포를 슬픔으로 위장하고 반대로 슬픔을 분노나 공포로 위장하기도 하며 관습적으로 행해질 때가 많아 스스로 쉽게 알아차리지못한다. - P107

나흘째 새벽 홀연히 이 말 하나가 가슴속에 떠올랐다. ‘나는 너무 미래에 살고 있구나.‘ 불안도 두려움도 다 그로 말미암은 것, 미래 때문에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다 놓치고있구나. 큰맘 먹고 여기까지 와서 아주 단단히 손해 보는 일을하고 있구나.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구나, 앞으로는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거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거부하리라. 더 이상 과거를 되새김질하지 마라. 과거에 머무르지 마라. 현재에 살아라. 과거를 변화시킬 순 없지만 현재를 변화시킬순 있다. 미래는 내 소관이 아니다. 미래여, 네 마음대로 하라. 하기는 내가 뭐라 한들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테지만. 그때마다 나는 번번이 어쩔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너한테 더 이상 내 현재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구나. 너에게는 달콤한 꿈만을 취하리라. 그것이 비록 환영이라 할지라도 매일의 강을 건널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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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한번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과연 약자를 보완하는 서비스가 도입될까? "소외 계층을 위한 대책을 내놓아라!" 말은 쉽다. 하지만 지속적인 불황에서 사회 정책은 점점 효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빅데이터가 도입된 이후 이런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되는 추세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약자는 배제된다. 효율적인 빅데이터는 소수자를 배제하고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과연 효율을 무시한 채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방식을 습득한 기계는 인간의 편견까지 그대로 물려받는다.
이전에 존재하던 소수자 배척은 빅데이터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배척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공정함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자가 얼마나 피해를 받는지도 빅데이터로 수치화할 수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런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빅데이터가과정이 아니라 효율성만을 찾아간다면 그 길은 필연적으로 차별로 흐르게 된다. - P318

데이터가 추가되고 시스템이 벅잡해질수록, 우리는 인공지능이 내린 결과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나마 앞의 사례에서는 정해진 몇 개의 수치로만 작동했기 때문에, 우리가 문제를 발견하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들은 모두 기초적인 빅데이터 사용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복잡한 빅데이터는 풀어서 설명할 수도 없고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다. 머신러닝을 통해 스스로 발전한 인공지능은 그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조차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인공지능은 막대한 데이터 중에서 알아서 답을 찾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나마 인종, 성별처럼 눈에 보이는 집단적 차별은 수정할 수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개인적 차별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차별이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데이터가 내린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빅데이터의 피해를 보는 사람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다. 강자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에는 곧 데이터가 수정되거나 폐기될 것이다. 하지만 약자에게는 그럴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은 피해는 드러나지도 않는다. 데이터과학자 출신 사회 운동가캐시 오닐 Cathy O‘Neil은 빅데이터를 "대량살상 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라 부른다. 데이터의 탁월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신뢰가 가져오는 폭력성은 사회의 불평등을 고착하고 변화를 가로막을 명분이 된다. - P327

그런데 21세기 들어오면서 유튜브같이 전 세계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사이트들이 생겨났다. 유튜브에서 중요한 것은 조회 수다. 제1세계 백인 남성이든, 동쪽 구석의 10대 아시안이든 조회 수는 동등하다. 힘을 가진 백인 남성이 본다고 10번 조회한 것으로 쳐주진 않는다. 전세계인이 동시에 사용하는 채널이 생김으로써 모두가 1표라는 생각지도않은 민주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비틀스는 백인이고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BTS는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동양인이다. 기존의 방식대로라면 BTS는 결코 미국에 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미국 주류 사회가 알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유튜브의 높은 조회 수는 그곳이 미국이든 필리핀이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조회 수라는 것도 인프라가 잘 갖춰진 주류 세계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범위는 점점 확대되고 있고, 기존에는 무시당했던 이들에게도 기회가 제공된다. BTS는 미국에서 주류 백인이 아닌 십대 아시안과 히스패닉, LGBT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미국의 구성원이지만 과거에는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동일한(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기록되는) 데이터로 존재한다. 시장은 그들의 소비력을 알게 됐고, 이제는 그들의 요구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 P337

빅데이터라는 쓰나미가 우리 앞에 와 있다. 이 쓰나미는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선사할 수도 있고, 반대로 빅브라더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될 수도 있다.
데이터과학자 다비도위츠는 자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이렇게 예언한다.
"차세대 킨제이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푸코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마르크스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소크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 P338

라디오존데는 전파로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다른 국가 혹은 기업이 얼마든지 가로챌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세계 고층 기상관측망을 구성하는 모든 관측소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협정 세계시 기준으로 10시와 12시 (한국시간 오전 오후 9시, 태풍 등 긴급한 현안이 있는 경우 지역별로 추가할 수 있음) 라디오존데를 쏘아 올려 측정한 데이터를 공유한다. 라디오존데의 1회 비행 시간은 60분에서 90분 사이다. 정보를 제공하며 하늘로 올라가다 보면 대기가 점점 줄어들어 기압이 낮아지고그러면 풍선 속 공기가 팽창해 풍선이 터져버린다. 이 높이가 지상에서 37km쯤 된다. 풍선이 터지면 라디오존데는 달려 있는 낙하산을 타고 어디론가 떨어지는데, 대부분 그냥 버려진다. 즉, 일회용이다(낙하산을 씌우는 것은 혹시 모를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풍선을 포함한1회 발사 비용은 40만 원 정도로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기간이 누적되면 무시 못할 액수가 된다. 우리나라는 여덟 곳에서 하루 두 번 발사하니 하루에 총 16대가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87만 대의 라디오존데가 사용되고 버려진다.  - P362

이름만큼 사용법도 간단하다. 가벼운 기체(보통 헬륨)를 넣은 네오프렌(고무의 일종) 풍선에 라디오존데를 달아 하늘로 띄우면 된다. 라디오존데는 1초에 한 번씩 전파를 지상으로 쏘는데, 전파는 기온, 기압, 습도 등에 따라 파장이 변한다. 지상에서는 전파의 파장을 통해 하늘 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라디오존데에는 GPS가 달린 경우가 많아서, 데이터가 측정된 위도와 경도, 고도를 정확히 알 수있고, 그만큼 더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 P361

기상청은 최근 정확도가 떨어진 것이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비가 내리는 패턴의 변화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과거의여름을 떠올려보라. 장마가 와서 오랫동안 비가 내리고 이후 무더위가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여름은 장마는 사라지고, 비가 스콜처럼 갑자기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친다. 비구름이 넓게 형성되어 지속해서 내리는 비는 예측하기 쉽지만, 불안정한 적란운에서 내리는 소나기는 예측하기 어렵다. 기후 변화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패턴을 무너뜨려서, 앞으로 일기예보는 한층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은 유독 어려운 점이 많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양기후의 특성이 있으면서도, 편서풍대에 위치해 대륙의 영향 역시 많이받는다. 나라는 좁은데 지역은 많이 나뉘어 있고 산줄기가 많아, 바로옆 동네인데도 날씨가 다른 경우가 많다. 한반도에 한해 1.5km 격자를쓰는 것도 작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지만, 관측 자체가 그 정도로 세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예보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 P375

한국의 연간 강수량은 지구 평균보다 많지만, 영토가 좁고 인구가많아 상대적 물부족 국가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식량 대부분을 수입하기때문이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7%로 상당히 낮은 편이다. 가축 사료까지 포함하면 24%까지 떨어진다. 우리가 먹든 가축이 먹든 합쳐서76%는 해외에서 수입한다. 해외에서 식량을 사 온다는 것은 식량 자체를 사는 것이기도 하지만, 식량을 기르는 데 들어가는 물을 사는 것이기도 하다. "식량 안보" 같은 유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은 식량 자급을 하고 싶어도 물이 부족해서 할 수가 없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물이 들어간다. 해외에서 식량을 사 오기 때문에 우리가 물을 펑펑 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후변화와 세계 인구 증가로 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면, 식량 수출국들은 수출을 줄이거나 가격을 올릴 것이고, 그러면 한국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 P404

심각해지는 빈부 격차와 경제 위기는 다시 우생학을 깨운다. 우리는우생학의 망령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일으킨 끔찍한 범죄때문에 그대로 묻었을 뿐이다. 자국 우선주의, 난민 사태,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빈곤한 철학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학을 알아야 한다. 군대를 군인에게만 맡길 수 없듯이 과학을 과학자에게만 맡길 순없다. 그러기에 과학은 너무도 중요하다.
물론 철학도 마찬가지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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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나의‘이다. 나의 꽃,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기억………. 그것들이 ‘나‘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개별성과 주체성, 고유성을 만든다. 이에 따른 논리로 만약 ‘나의‘ 기억, ‘나의‘ 감정, ‘나의‘ 느낌이 없다면 나의 사고, 나의 선택, 나의 판단, 나의 결정이 없고, 이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인지 알지도,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 한다. 그래도 살기는 사는데 그 삶은 마치...… ‘오리지널Original‘이 아니라 ‘보증 받은 복제품Certified Copy‘이랄까. - P17

한때는 그도 우듬지에 있었다. 보드라운 초록 잎사귀로 무성했고 햇살과 빗방울에 뒤덮여 반짝였다. 에너지로 바꾸어 고스란히 줄기에, 뿌리에 내주었다. 그 덕에 나무는 성큼성큼 성장했다. 줄기가 높이 자랄수록 그는 제자리를 지키는데도 자꾸만 아래에 놓였고 어느새인가 우듬지를 올려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새로운 우듬지에 난 이파리 사이로 햇살은 조각나 흩어져 부스러기처럼 떨어질 뿐이었고 나날이 빼빼 말랐다. 잎사귀들이 모두 떠났고 삭정이가 되더니 강풍 불어 후드득 꺾였다. 딱딱하게 굳은 심장처럼 밑동만 남아 고스란히 나무에 박혔다.
아무도 그가 죽은 줄 몰랐다.
옹이는 그가 살았고 사랑했다는 흔적이다. 더 이상 햇볕과 바람과 비를 받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줄 게 없어서 산 채로 묻혔다. 나무의 생채기가 되어버린 옹이는 무늬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솜씨 좋은 목수가 옹이를 나무의 무늬로 살려놓을까.

옹이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옹이가 내 삶의 무늬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옹이야말로 나의 삶을 세상에 유일한 작품으로 만들 수있다. - P25

"A가 B에 힘을 가하면 B는 같은 크기의 힘을 반대 방향으로 A한테 가한다." A가 마음일 수도, B가 마음일 수도, 둘 다 마음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마음이 작용한다는 것은 마음에 힘을 가하는 자극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의 일이라 눈, 귀, 코, 혀, 살갗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의 자극뿐 아니라 기억, 상상, 욕망, 생각 같은 내부의 자극에 대해서도 작용할 수 있다. 이처럼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자극에 대해 마음이 일으키는 반응‘을 감정이라고 한다. 어떤 자극인지, 어느 정도의 세기인지에 따라 반응은 제각각 다른 형태와 강도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감정의 다양성이다. 최종 목표는 자신의 마음에 가해진 것과 같은 크기의 힘을 반대 방향으로 가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 P27

기쁨은 생이라는 고해에 놓인 징검다리다. 덕분에 다음에 올 내가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 사람에게한 번 일어난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기쁨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기쁨을 징검다리 삼아 생을 건넌다. 기쁨이 설령 공포로 뒤바뀐다 해도 과거에 놓은 징검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징검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 정확히는 나의 감정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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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시기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거려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해야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에 대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감기가 들지 않고는 절대로 코를 안 흘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딴 아이도 안흘렸다. 그래서 학교나 유치원 갈 때 가슴에 손수건 매다는 습관까지 없어져 버렸다. 나도 이제는 요즘 아이들이 코를 안 흘리는 걸 이상해하는 대신 그땐 왜 그렇게 코를 흘렸는지를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 P13

한 번 출타하시면 며칠 만에 돌아오실 적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가장 큰 낙이었다. 사랑마루는
울타리 없는 바깥마당에 면해 있었다. 아래윗간으로 나누어진 사랑채는 마루도 길어서 가운데 기둥이 있었다. 그 가운데 기둥을 한 팔로 안거나 기대고 앉아 있으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길이 저 멀리 산모롱이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지점까지 바라볼수가 있었다. 
흰옷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초가지붕마다 뿜어 올린 저녁연기가 스멀스멀 먹물처럼 퍼져길과 논밭과 수풀과 동산의 경계를 부드럽게 지워버려, 마침내 잿빛 하늘을 인 거대한 한덩어리가 되었을 때도 흰옷 입은 사람이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것은 잘 분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다들 흰옷을 입었다.
특히 송도 나들이를 갈 때는 때도 안 묻은 고운 흰옷으로 호사를했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와 딴 사람이 헷갈리지 않았다. - P19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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