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이해해줘. 노력해봐." 하비에르가 말했다.
지난주 세바스티안의 폴더에서 하비에르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리디아는 정말로 고통스러워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살면서 그렇게 깊고 진정한 우정을 쌓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애착 관계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하지만 하비에르가 계산대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지금, 둘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오가고 사실로 확인된 지금, 리디아에게 남은 것은 부검뿐이었다. 그를 향한 애정은 이미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 애정이 유령처럼 희미하고 생기 없이 아직 책방에 남아 있는 게 느껴졌지만 이제 그녀의가슴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정은 사라지고 걸러졌다. 사체에서 피가 빠지듯이. 하비에르가 그녀의 손가락을 꽉 쥐었을 때 리디아는 희미한 포르말린 냄새를 맡았다. 하비에르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을 때는 그의 안경에 튄 핏방울이 보였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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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학대의 근거,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
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인 차이를 강조한 기독교의 입장은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재확인되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세상에는 물질과 영혼이 존재하는데, 사유하고 의심할 줄 아는 인간에게만 영혼(마음)이 있었다. 물질의 속성은 운동하는 것이고, 영혼의 속성은 사유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육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육체와 영혼과의 접점이 뇌 속에 있는 송과선이라는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혼을 통해 육체를 움직일 수 있다.
반면 동물의 육체는 우리가 본능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영혼 없이 움직인다. 즉 동물은 그 자체로 복잡한 기계, 복잡한 자동인형 automata에 불과하다. 인간의 육체도 자동인형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동물 기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 P98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bète machine은 영혼/물질의 이분법이 자연세계에 적용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유도되는 결론이었다. 동물기계론에 따르면 동물은 영혼이 없고, 생각이나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은 물론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이다. 불에 데었을 때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말단신경세포의 파괴를 고통으로 느끼게 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인데,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즐거움 없이먹고, 고통 없이 우는" 존재인 것이다. - P100

사이비과학은 이런 마음을 비집고 자라난다. 누군가 과학의 이름으로 내가, 한민족이, 한국 사람이 과학적으로 못났다고 한다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나를, 한민족을, 한국 사람을 잘났다고 하면 이런 얘기는 우리의 허영심을 살살 간지럽힌다.
"중국인들은 ‘천성이 그래." "여자가 그런 건 ‘자연‘스러운 거야." "저 사람은 범죄자의 ‘피‘를 타고났어." "유전자‘가 그런데 어쩌겠니." "그건 남자의 ‘본성‘이야."
여기서 ‘천성‘, ‘자연‘, ‘피‘, ‘유전자‘, ‘본성‘은 대부분 과학의 외피를 쓴 사이비과학이다. 사이비과학의 정반대는신중한 과학일 텐데, 신중한 과학은 인종의 자연적 차이, 인간성과 지능의 유전적 차이, 고정된 성차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18~19세기 사이비과학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과학이 만들어내는 차별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차별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차별은 항상 더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고, 더 은밀하게 우리의 허영심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그렇다. - P117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를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피 유토피아이다. 이것은 현실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 숨고자 하는 것으로, 예술과 문학에서 주로 나타나는 유토피아이다. 이런 유토피아는 주로깊은 산속이나 섬에 고립되어 있으며, 샹그릴라처럼 인간 삶의 조건이 완벽한 이상향의 장소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건 유토피아인데 이는 생활 조건을 실제로 변화 및 개선시키려는 노력에서 나타나는 개념으로, 이런 개선에는 물리적 환경만이 아니라 새로운 습관, 가치관 등이 포함된다. 사실상 지난 인류 역사에서는 재건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꾸준한 시도가 있었고 지금도 각 나라 곳곳에서 비슷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시골 마을 등지에서는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자기네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한다든지 하는 식의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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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의 ‘크로스‘

어떤 개념들은 오래 지속되는데, 그중 하나가 ‘두 문화‘라는 것이다. 두 문화는 1959년에 영국의 작가이자 화학자였던 찰스 스노Charles Snow가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에서 처음한 말이다. 그는 여기서 과학자들이 인문학에 대해 무지하고,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식인 행세를 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 P11

그런데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경쟁이 이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치킨게임을 할 때는 안전벨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와서 부딪치기에, 실제 충돌이 일어나면 양쪽 모두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딪힐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상대가 언젠가 핸들을 돌릴 것임을 알고 있고, 상대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필승의 방법이 있는가?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시동 걸고 출발 준비를 할 때 한쪽에서 핸들을 뽑아 보란 듯이 창밖으로 던진 후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핸들을 돌릴수 없는 상대를 보고 맞은편 차는 살기 위해 자신이 핸들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비슷한 상황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묘사된다. 영화 중반 이후에나 등장하는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핵전쟁을 억제하는 전략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전쟁억제력이란 적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는 예술이다."
핵전쟁 전략이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 같지만 결국 그 본질은 치킨게임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 P45

불과 몇 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문자도 없이, 특별한 재능 없이 자기 몸 하나를 걱정하던 동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던 인간이 이제는 급기야 자그마한 플루토늄 폭탄 하나로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기술을 소유하게 되었다. 실로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문명 발달과 달리 인간이 가진 야만성은 조금도 순화되거나 성숙해지지 못해서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사람을 고문하면서도 재미를 느끼는 존재이다. 인간의 지혜는 기술 발전에 걸맞게 발전하지 못했으니, 이는 마치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머리는 어린아이 같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고문을 즐기면서도 카메라를 잘 만드는 사람들, 덩치는 산만큼 커졌지만 마음은 아직도 유치한 사람들, 발전한 기술문명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 결국 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이 영화의 주제인 것이다. - P51

우리는 마리 퀴리에 대한 최근의 역사적 연구들을 통해 에브 퀴리가 묘사한 『퀴리 부인』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않은 그녀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조금 더 일반화하자면, 위인의 전기를 읽는 데는 여러 가지 독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읽는 이 전기의 원형原型을 만든 작가는 누구인가?
왜 그 작가는 위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는가? 왜 이런 내러티브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없는가? 여기에서 사실과 달리 작가에 의해 삽입된 부분, 아니면 빠진 부분은 없는가? 그런 부분들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전기를 읽는 작업은 인문학적인 해석의 힘을 이용해서 중층적으로 전기를 읽는 독법이다. - P81

사실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은 이분이 아니라 삼분된다.
세상에는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고, 인간 아래 존재가있게 된다. 서양에서는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를 천사, 신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신선, 부처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 아래에는 동물들, 미물들이 존재했는데, 인간 중에서도 특정한 부류의 인간들은 보통 인간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들이라고 간주되었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동물보다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을 뿐이었다. 20세기 중엽 이전의 수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예가해방된 뒤에도 흑인에 대한 편견은 널리 퍼져 있었다.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증오가 보편적이었고,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에 대한 혐오도 일반적이었다.
과학은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과학은 인간을 분류해서 이해하지만, 동시에 이런 분류는 차별을 낳기도 한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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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토요일

맨 처음에 발사된 총알 중 하나가 루카가 소변을 보려는 변기 위의 열린 창문으로 날아든다. 루카는 그것이 총알인 줄도 모른다. 미간에 총알이 박히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자신을 지나친 총알이 뒤쪽 타일 벽에 부드럽게 박히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진 총알세례는 귀청이 떨어질 듯 요란해서 헬리콥터 날개가 돌아가는 듯한 두두두, 탕탕, 딸칵딸칵 소리가 울려퍼진다. 비명도 쏟아지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총격으로 전멸된다. 루카가 바지지퍼를 올리고 변기 뚜껑을 내린 다음 그 위에 올라가 창밖을 내다보기도 전에, 저 끔찍한 아우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욕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엄마가 나타난다.
"미호("내 아들‘을 뜻하는 ‘mi hijo‘의 줄임말. - 옮긴이), 이리 와." 엄마가 어찌나 나직이 속삭이는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한다. - P11

루카는 아무 소리도내지 않은 채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집중한다. 이건 그냥 악몽이라고 전에도 많이 꿨던 끔찍한 악몽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잠에서 깼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냥 꿈이야. 왜냐하면 멕시코 도시에서는 저런 자들이 현대판 부기맨(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을 잡아가는 귀신 -옮긴이)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 앞에서는 잔인한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다른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라디오 채널을 돌려버리고, 자신들의 가장 큰 두려움을 감춘다 해도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서 전해 듣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놀이터, 축구장, 학교 화장실에는 섬뜩한이야기들이 모여들고 또 부풀려진다. 아이들은 부유하게 가난하건 중산층이건 모두 길에서 시체를 본 적이 있다. 살인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험에도 계급이 있고 어떤가족은 다른 가족보다 위험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루카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엄마와 아빠에게서 자신들이 그렇게 취약한 처지라는 증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두 사람은 아들 앞에서 늘 용감하게 행동했지만.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이 일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지는 건아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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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이미 상당한 시간동안 눈에 띄지 않게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어왔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것이다.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 Andersheit과 타자성 Fremdheit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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