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자꾸만 아버지의영정을 곁눈질했다. 나도 아버지를 보았다. 고등학생 대따라가지 못했던 두 사람의 대화를 쉰 가까운 지금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 P181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돌고 돌아 만난다. 학수는 아이 얼굴을 보고서도 자기가 도움을 준 할머니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 P239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경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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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 중인 데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 글러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아니다.
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이부진이나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빨갱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황사장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 P76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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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 P7

민중이었던 방물장수와의 하룻밤 동침도 내켜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낯선 사내의 손을 덥석 잡고는 한없이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렸던 그때도 지금도 나는 저러한 급작스러운 전이가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 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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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에 선택의 법칙이 하는 역할은 헛간 벽에 그려진 표적이 하는 역할과 유사하다. 당신이 화살을 쏜 다음에 표적을 그린다면, 표적의 정중앙에 화살을 쉽게 꽂을 수 있다. 또한 당신이 과거의 주가를 돌이켜본다면, 언제 주가가 치솟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주가가 치솟을 미래 날짜를 예측하는것보다 훨씬 쉽다. 위대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 Niels Bahr 에 따르면 "예측은 매우어렵다. 특히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를 내다보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내려 애쓰는 대신에 과거를 돌아보며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살피면 판단이 옳을 확률을 0에서 1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행동을 ‘예측prediction‘과 대비해 ‘사후예측postdiction‘이라고 한다. - P149

예측과 사후예측의 극명한 대비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한 예로 큰 재난을당한 뒤 사람들은 "왜 우리는 재난을 예상 못했을까?"라고 물으면서 처음부터 징후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9-11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문제는 위험 징후가 대체로 수많은 다른 조짐과 사건 사이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사후에 조각들을 맞춰 그것들이 연속적인 사슬을 이루어 참사로 이어졌음을 보여주기는 쉽다. 그러나 사전에는 수많은 조각들과 잠재적사슬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건들이 서로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조각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각들을 맞출 수 있는방식의 수가 엄청나게 많으며 또한 어느 한 방식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기억을 소급해서 조정함으로써 재난에 이른 사슬을 확인하고는 사후에 "자, 이걸 보라고, 위험 징후가 우리 눈앞에 있었어!"라고 말하는 본능적인 경향이 있다. 이를 ‘사후설명 편향hindsight bias‘이라고 한다. 이것은 오래된 개념이며 선택의 법칙이 나타나는 한 방식이다. - P149

골턴은 부모에게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자식에게는 덜 극단적으로나타날 가능성이 높음을 발견했다. 예컨대 어머니와 아버지의 키가 모두 매우 크면, 자식의 키는 크기는 해도 부모보다는 평균에 더 가까운 경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키가 작은 부모는 평균보다 작지만, 자신들보다는 큰 자식을 낳는 경향이 있었다. 골턴은 다른 유전적 특징들에서도 똑같은 현상이나타난다고 보았다. 마치 어떤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세대들을 끌어당겨 평균 키에 가까워지게 만들기라도 하는 듯했다. 골턴의 천재성은, 이렇게 대상들을 다시 평균 쪽으로 끌어당기는 외견상의 힘이 단지 통계적 선택 현상의결과 (비록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선택의 법칙의 발현일 뿐임을깨달은 데 있다. - P158

평균으로의 회귀 효과는 어디에나 있다. 일단 이 현상에 대한 경계심을품고 나면, 어디에서나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점수, 결과, 반응에 무작위성이 섞여 있는 경우라면 언제나 평균으로의 회귀가 일어난다. 예컨대 시험, 검사, 직장, 스포츠 경기 등에서 거둔 성적(실적)을 생각해보자. 진정한 실력,
성실성, 기타 요인들이 성적을 좌우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적은 또한 어느 정도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시험당일에 기분이 특히 좋았거나 시험 문제가 우연히 예상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우수한 실적을 올린 것은 유망한 거래처의 대표가 알고 보니고교 동창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수한 성적에 끼어 있는 우연의 몫은 다음번에는 줄어들 개연성이 높은데, 그때는 마치 퇴보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평균으로의 회귀가 주는 교훈은 결과를 액면가대로 덥석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좋은 성적은 주로 우연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극단적으로 좋은 성적이 어느 정도는 ‘유리한‘ 우연에서 비롯된다면, 극단적으로 나쁜 성적도 어느 정도는 ‘불리한‘ 우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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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판탈레온 판토하는 그녀 뒤를 쫓아내려가면서 그녀의 불그스레한 등과 통통한 엉덩이, 힘줄이 불거져나온 종아리를 본다. "여긴 일은 많지만 돈은 그다지 많이 못 받는 곳이야 그런데 뭐 때문에 이토록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은 거지? 근사하게 생긴 짱꼴라 포르피리오 때문인가?"
"안정적이기 때문이에요, 판토하 씨." 추추페는 머리로 울긋불긋한색깔의 옷들을 가리킨다. 그 옷들은 마치 벌떼처럼 떼를 지어 웅성거린다. "거리에서 하는 일은 전혀 안정적이지 않아요. "세탁부‘가 행운의 하루를 보내면 그 이후 사흘은 공쳐야 해요. 휴가도 없고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죠."
"‘코딱지‘는 자기 매음굴에서 무자비해요." 젖빨개는 호각을 불어 여자들을 조용히 시키고 가까이 오라고 지시한다. "그 작자는 아가씨들을 배고파 죽게 만들고 함부로 다뤄요. 그리고 피곤해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보이면 즉시 내쫓고요. 배려라든가 인간성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여기는 다르지요." 추추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항상 손님이 있고, 근무 시간은 여덟 시간이고, 매우 잘 조직되어 있어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심지어 벌금을 내라고 해도 대원들이 아무런 불평도 안 하고 참는 거 보셨죠?"
"사실 첫날은 약간 걱정됐어." 레오노르 부인은 빵을 잘라 버터와잼을 바르고는 한입 물어 맛을 보면서 씹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않니? ‘아기 빵‘은 이키토스에서 최고로 맛있어. 얘야, 한번 맛보지않을래?"
"좋소. 그럼 네 명을 뽑도록 하겠소." 판탈레온 판토하가 지시한다. "뭘 기다리나? 어서 줄을 세워, 짱꼴라."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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