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조 진지가 그곳에 상주하는 인디언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실로 놀라웠다. 백인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정교함과 높은 품질은 그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총에서부터 도끼, 옷, 바늘에 이르기까지, 노란 말은 그런것들을 뚝딱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그들이 지닌 불가해한 능력이 두려웠다. 백인들이 동부에 만들어놓았다는, 물소 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아간다는 거대한 마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해가 갈수록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상인들의 수는 급격히늘어만 갔다. 그리고 이제는 군인들을 보내 아리카라족과 치열히 싸우기까지 했다. 백인들이 아리카라 족을 벌하려 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이보낸 군인들이 겁쟁이에 바보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노란 말은 정확히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알수없는 불길한 예감이 결국 큰 재앙을 불러들이고야 말거라고 확신했다.
글래스가 캠프로 들어서자 노란 말이 일어났다. 꺼져가는 모닥불이 그들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글래스는 어떻게든 자신을 성심껏 돌봐준수족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노란 말이 불쾌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소박한 선물로 적합한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약간의 담배나 칼 따위가 있겠지만 그런 하찮은 것들로는 감사의 마음을충분히 전할 수 없었다. 글래스는 노란 말에게 다가가 회색곰 발톱으로 만든 목걸이를 인디언의 목에 걸어주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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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아서

공항의 한 장면
2006년 4월 30일 아침 7시, 나는 공항에서그날 아침 첫 비행기를 타려고 탑승 수속을밟던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가방을 꼭 움켜쥐고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가방이나 상자를 들고 배낭을 멘 여행객들, 아기를 안은 여행객까지 길게 줄을 늘어서서 탑승 수속대를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그 뒤로는 유니폼을 입은 항공사 직원들이 컴퓨터앞에 서 있었다. 낯익은 광경이었다. 역시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조종사와 스튜어디스, 수하물 검색관, 그리고 봇물처럼 밀려드는 여행객들 때문에 위엄 있게 서 있을 뿐 아무 역할도 못하는 두 명의 경찰관이눈에 띄었다. 검색관들은 수하물을 엑스선으로 검사했고, 항공사 직원들은 여행 가방에 물표를 달았으며, 수하물 담당자들은 물표를 단 여행 가방을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려놓으며 탑승자가 탄 항공기까지 올바르게옮겨지기를 바랐다. 탑승 수속대 맞은편에는 신문과 패스트푸드를 파는 상점들이 있었다. 벽시계와 공중전화, 현금인출기,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도 낯익은 것이었다. 물론 터미널 창밖으로 보이는 주로에서 있는 항공기들도 마찬가지였다. - P8

모든 인간 사회가 저마다 독특하지만, 문화적인 패턴이 있어 그런대로일반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적어도 네 가지 부분-인구 규모, 생존 방법, 정치의 집중화, 사회의 계층화에서 일정한 상관관계가 찾아진다.
인구 규모와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획득이 증대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하면,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소규모 유목민보다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자급농이 단위 면적당 더 많은 식량을 획득한다. 또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관개수로를 이용한 집약적 농법을이용하거나, 현대 국가의 기계화 농법을 이용하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훨씬 더 높아진다. 정치적 의사결정도 점점 집중화된다. 따라서 소규모 유목집단처럼 구성원 모두가 참석하는 토론으로 결정하던 방식에서, 현대 국가처럼 정치적 계급구조에서 위쪽에 존재하는 지도자들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사회의 계층화도 복잡해져서, 소규모 유목집단에서는 구성원들이 상대적으로 평등하지만, 중앙집권화된 대규모 사회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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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신현진이 전한 김형욱의 최후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이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이어지는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되었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도 일본 야쿠자를이용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두고두고 야쿠자에게 코가 꿰일 것을 우려하여 포기한 바 있었다. 김재규는 해외담당차장-차장보담당 국장-프랑스 거점장-파견 요원으로 이어지는 공식 라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했다. 이상열은 일부 파견 요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핵심 과제는 신현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처리했다. 이상열은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노(No)라고 기록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 당시 신현진, 이만수와 직접 면담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국정원 쪽 간부들은 이상일이 살아 있는 한 신현진과 이만수도 더 이상의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2006년 4월 3일 사망했다. 신현진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법당 앞으로 가 끝없이 절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지만, 끝내 김형욱을 살해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형욱의 유해라도 수습하여 유가족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P381

시위대의 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시민들이 유신권력의최말단 촉수로 여긴 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원래 병력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 병력마저도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기에 시위대의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령하면 오토바이나 순찰차를 때려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어 짓밟고 불 질렀다. 시위대의 또 다른 공격 대상은 언론인과 언론사였다. 특히 17일 자 신문에 부산 시내를 들었다 놓은 16일의 격렬한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10월유신 7주년이라는 사실만 강조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한 기자는 "기자신분임을 밝혀도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진압대는 진압대대로 기자를 마구 폭행" 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4.19 당시 시위를 생중계했던 부산문화방송과 김주열의 시신 사진을 실어 혁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부산일보>는 5·16 장학회로 넘어가 어용이 되어 한국방송 부산방송국과 함께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기독교방송은 시위 현장의 한복판인 광복동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평소 용기 있게 유신체제를 비판해온 까닭에 아무 탈이 없었다. <국제신문>은 부산시경 바로 옆이라는 입지 조건 덕에 습격을 면했다. 당시 부마항쟁을 밀착 취재했던 조갑제는 시위대가 표적으로 삼은 언론기관은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선별된 것이란 평가를 기자사회에서 받았다"며 "민중의 분노는 폭발적이라고 해서 결코 눈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기자들, 특히 카메라를든 사진기자들이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언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시위 군중들의 신원 노출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 P388

1979년 10월에 하필이면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나고, 1980년 5월에 하필이면 광주에서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난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그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의 존재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의 발발 이유를 김영삼제명이나 김대중 체포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30년 가까이 지속된 이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이 ‘양‘이라는 변수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좀 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시위의체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박정희는 부산의 데모는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았냐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라며 시위의 배후는 신민당이고, 데모에 나선 것은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똘마니들‘ 이 역사를 바꿨다. 부산시경의 ‘79부마사태의 분석‘ 이란 보고서를 보면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를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지적했다. 특히 야간이 되면서 시위대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 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상점종업원, 고교생 등 도시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 한것이다. 광주항쟁에서도 일정하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지만, 항쟁의 전체 흐름을 볼 때 학생이나 자영업자, 사무직 등 중산층의 역할 또한 경시 할 수 없다. - P392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 패배한 주요한 이유를 경제문제의 악화에서 찾았다. 그런데 1979년도의 경기는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 부마항쟁 직후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부마항쟁이 발발한 첫 번째 이유는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부산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전에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꼽지만, 당대의 민중들, 그것도 박정희가 특별한 연고를 가진 부산 시민들은 정치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실패 때문에 박정희의 사진을 불태웠고 유신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시민들의저항이 확산되려 하자 박정희는 발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가 김재규의 총에 맞게 된다. - P393

재야민주 세력은 ‘선 개통령 선출, 후 개헌‘을 유신 잔당들이 "자신들의 부패한 특권지배를 끝내 온존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기극"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11월 24일 명동 YWCA 회관에서는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신랑은 민주화운동 진영의 꽃미남이었지만 신부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계엄령 때문에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장 결혼식‘을 빌려 국민대회를 연 것이다(이날의 신17랑 홍성엽은 ‘위장 결혼식‘을 한 탓인지 진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총각으로 살다 안타깝게 2005년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국민대회 준비위원장 백기완 등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 P405

 1980년대는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무거운 시대, 한마디로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 라는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자 흩어졌던 시위대가 비명을 지르며 몰려왔다. 경찰이 최루탄을 하염없이 쏴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태훈의 몸 위로 최루탄 분말이 눈처럼 하얗게 쌓였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입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 P422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싸움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유신체제의 핵심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주만큼은 승리한 투쟁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오늘이다.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이런 상황이 고착되어버린다면 도청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죽음을 ‘홍어‘ 운운하며 모욕하는 벌레들이 아니라이런 현실이 고착되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가 그들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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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979년 7월에 발간된 <신동아>에 실린 글은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농촌 근대화 전략이었다면 "1960년대 전반에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 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박정희는 늘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운동‘ 이다"라고 강조했지만,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업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등 발전, 농가부채, 비민주적 농정, 저농산물 가격 정책과 외국 농산물 수입 등 구조적인 문제는 손대지 않고 소득 증대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전시행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뤘다면 지금의 농촌이 저렇게 텅 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 P292

유신시대에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방위산업을 총괄했던 오원철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2년 초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라는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부는 캐나다와 교섭하여 고리 원자력발전소1. 2호기의 경수로 모델과 다른 캔두형 중수로(원전을 세우지 않고도 연료봉교환이 가능)를 도입하려 했다. 이것이 이제 설계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이다. 정부는 또 프랑스와 교섭하여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자했다. 한국보다 앞서 중수로를 도입한 인도가 1974년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중수로를 도입하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특히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단 한 기도 없는 상황에서 재처리 시설을 서둘러 도입하려한 것은 그 의심을 확신 수준으로 굳게 만들었다. 한국의 원자력 학계와업계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주학살을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미국이 불편해했던 핵 관련 기술을 일체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원자력 학계에서는 이를 치욕의 창씨개명 이라 부른다.
+ 스리마일사고 - P309

중학교 무시험과 고교 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군댔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 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58년 개띠 란 말도 있듯이 이 세대는 바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열은 대단했고, 이제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와 같이 소수 엘리트의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등보통교육‘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들에게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 P330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남민전이라는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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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사건을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신체제의 파탄을 가져온 계기를 제공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겠지만,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 노동자들이었고, 이들 여성 노동자들이 활약한 사업장은 모두 다 산선이나 노동청년회와 아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 기독교는 최근 들어 ‘개독교‘ 라는 모멸적인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많은 종교 중에서 신뢰도 1위라는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일반 대중의 신뢰를 받을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저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의 모습처럼 살고자 했던 산업선교회 덕분일 것이다. 산선이나 가톨릭노동청년회의 기여가 없었더라면 전태일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노동운동의 공백기는 이어졌을 것이다. 제대로 서지 못하는 아이도 보행기를 태워주면 붕붕 날다시피 움직인다. 산업선교회는 어리고 어린 한국 노동운동에서 보행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에 들어 산업선교회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꼭 전두환의 탄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노동운동이 더 이상 보행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3

사람들 사이에 <동아일보> 보는 맛으로 산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74년 12월 16일부터 몇몇 회사가 <동아일보>로부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광고 효과는 매우컸기 때문에 광고를 한번 실으려면 현금을 주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 <동아일보>에서 광고주들이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를 취소하고 동판을 회수해간 것이다. <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예약된 광고를 앞당겨 싣거나 <신동아>, <여성동아> 같은 자매지의 책 광고를 실으며 버텼지만, 광고의 98퍼센트가 해약되자 12월 26일 광고면을백지로 발행했다. 영향력과 발행 부스에서 단연 1위를 자랑하던 신문에서 광고가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광고탄압으로 자유언론의 목을 죄려 했지만,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로언론인 홍종인이 12월 28일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 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동아일보> 구성원들로서는 "차마 받기에 가슴 아픈, 정말 가슴 아픈 성금과 격려고"에목이 메었다.
- P226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목 놓아 외쳤던 유신군대에서는 군기빠졌다는 민주군대에 비해 열 배도 넘는 젊은이들이 집으로 돌아오지못했다. 군사정권 시절과 민주화 이후를 비교해볼 때 한국군의 병력이나 구조가 크게 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달라진 것은 민주화에 따라 군이 더 이상 성역이 아니게 되어 민간사회가 군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수 있게 되었고, 군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개 값‘ 만도 못했던 것이 이제이등병의 죽음에 대해서도 경우에 따라 지휘 선상에 있는 지휘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사망사고를 적당히 덮을 수 없게 되자 실효성 있는 구타 및 가혹 행위 근절이나 자살방지프로그램 개발 등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고, 실제로 사망사고 발생 건수는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 P262

잠시 주춤했던 장발단속은 ‘월남 패망과 더불어 급격히 강화되었다.
문무 양쪽에서 일본식 황민화 교육을 제대로 받은 박정희는 젊은이들의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사고방식을 아주 못마땅해했다. 유신시대 국민의 외모와 사상은 당연히 국가의 통제 대상이었다. 유신공주였던 박근혜대통령이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처음 다룬 안건이 경범죄처벌법 시행령이라는 사실‘은 오늘에까지 드리운 유신의 짙은 그림자를 절감하게 한다. 과다노출을 단속하겠다는 것이 꼭 유신시대의 미니스커트 단속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절망케 하는 것은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고, 국내외에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아주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인 첫 번째 국무회의의 첫 번째 안건이 왜 하필 경범죄처벌법의 노출단속 조항이어야 하는가 하는점이다. 대통령이 되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국민에 대한 통제였을까? 비교하기도 참 민망하지만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다룬 안건은 연필 생산에 관한 정령이었다.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백성들, 너나없이 못 배운 한에 사무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법을그는 알았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리고 그의 참모들은 첫 번째국무회의의 첫 번째 안건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할까에 관한 고민이전혀 없었단 말인가? 그 점에 관한 한 정녕 유신의 적통을 이은 정권임에 틀림없다. 주월 한국군이 유신의 십자군 구국의 십자군이 되라는 박정희의 말을 받아 최태민이 구국십자군을 만들었고, 십자군 알바단은 박근혜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니, 십자군 원정은 참 오래 계속되고 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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