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신현진이 전한 김형욱의 최후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이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이어지는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되었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도 일본 야쿠자를이용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지만, 한국 정부가 두고두고 야쿠자에게 코가 꿰일 것을 우려하여 포기한 바 있었다. 김재규는 해외담당차장-차장보담당 국장-프랑스 거점장-파견 요원으로 이어지는 공식 라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했다. 이상열은 일부 파견 요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핵심 과제는 신현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처리했다. 이상열은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노(No)라고 기록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 당시 신현진, 이만수와 직접 면담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국정원 쪽 간부들은 이상일이 살아 있는 한 신현진과 이만수도 더 이상의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2006년 4월 3일 사망했다. 신현진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법당 앞으로 가 끝없이 절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지만, 끝내 김형욱을 살해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형욱의 유해라도 수습하여 유가족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P381
시위대의 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시민들이 유신권력의최말단 촉수로 여긴 파출소였다. 파출소는 원래 병력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 병력마저도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기에 시위대의 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이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령하면 오토바이나 순찰차를 때려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어 짓밟고 불 질렀다. 시위대의 또 다른 공격 대상은 언론인과 언론사였다. 특히 17일 자 신문에 부산 시내를 들었다 놓은 16일의 격렬한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10월유신 7주년이라는 사실만 강조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한 기자는 "기자신분임을 밝혀도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진압대는 진압대대로 기자를 마구 폭행" 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4.19 당시 시위를 생중계했던 부산문화방송과 김주열의 시신 사진을 실어 혁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부산일보>는 5·16 장학회로 넘어가 어용이 되어 한국방송 부산방송국과 함께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기독교방송은 시위 현장의 한복판인 광복동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평소 용기 있게 유신체제를 비판해온 까닭에 아무 탈이 없었다. <국제신문>은 부산시경 바로 옆이라는 입지 조건 덕에 습격을 면했다. 당시 부마항쟁을 밀착 취재했던 조갑제는 시위대가 표적으로 삼은 언론기관은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선별된 것이란 평가를 기자사회에서 받았다"며 "민중의 분노는 폭발적이라고 해서 결코 눈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기자들, 특히 카메라를든 사진기자들이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언론에 대한 반감과 함께, 시위 군중들의 신원 노출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 P388
1979년 10월에 하필이면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나고, 1980년 5월에 하필이면 광주에서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난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그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의 존재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의 발발 이유를 김영삼제명이나 김대중 체포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30년 가까이 지속된 이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이 ‘양‘이라는 변수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좀 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시위의체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박정희는 부산의 데모는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았냐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라며 시위의 배후는 신민당이고, 데모에 나선 것은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똘마니들‘ 이 역사를 바꿨다. 부산시경의 ‘79부마사태의 분석‘ 이란 보고서를 보면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를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지적했다. 특히 야간이 되면서 시위대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 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상점종업원, 고교생 등 도시 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 한것이다. 광주항쟁에서도 일정하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지만, 항쟁의 전체 흐름을 볼 때 학생이나 자영업자, 사무직 등 중산층의 역할 또한 경시 할 수 없다. - P392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 패배한 주요한 이유를 경제문제의 악화에서 찾았다. 그런데 1979년도의 경기는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 부마항쟁 직후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부마항쟁이 발발한 첫 번째 이유는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부산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전에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꼽지만, 당대의 민중들, 그것도 박정희가 특별한 연고를 가진 부산 시민들은 정치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실패 때문에 박정희의 사진을 불태웠고 유신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시민들의저항이 확산되려 하자 박정희는 발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가 김재규의 총에 맞게 된다. - P393
재야민주 세력은 ‘선 개통령 선출, 후 개헌‘을 유신 잔당들이 "자신들의 부패한 특권지배를 끝내 온존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기극"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11월 24일 명동 YWCA 회관에서는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신랑은 민주화운동 진영의 꽃미남이었지만 신부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계엄령 때문에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장 결혼식‘을 빌려 국민대회를 연 것이다(이날의 신17랑 홍성엽은 ‘위장 결혼식‘을 한 탓인지 진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총각으로 살다 안타깝게 2005년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국민대회 준비위원장 백기완 등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 P405
1980년대는 살아남은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무거운 시대, 한마디로 죽음을 끼고 산 시대였다.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 라는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자 흩어졌던 시위대가 비명을 지르며 몰려왔다. 경찰이 최루탄을 하염없이 쏴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태훈의 몸 위로 최루탄 분말이 눈처럼 하얗게 쌓였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입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 P422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가려던 유신잔당과의싸움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유신체제의 핵심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광주만큼은 승리한 투쟁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오늘이다.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며 어두운 창문 너머로 꿈꾸던 30년뒤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33년 뒤의 대한민국이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겨우 ‘정규직이고, 자신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날밤 죽겠다고 도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것이 옳았다. 이런 상황이 고착되어버린다면 도청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죽음을 ‘홍어‘ 운운하며 모욕하는 벌레들이 아니라이런 현실이 고착되는 것을 방치하는 우리가 그들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 유신이 부활한 오늘, 도청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광주의 역사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 P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