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보니 우리 아들 생각이 나는구나, 모모야. 방학이라서 엄마와 함께 니스 해변엘 갔는데, 내일 돌아오지. 녀석의 생일이거든.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줄까 하는데, 우리 아들녀석하고 놀고싶으면 우리집에 오도록 해라."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없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이제와서 이 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좋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단지 내가 훌륭한 회교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 - P62

그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듯내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 P69

로자 아줌마는 동물들의 세계가 인간세계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나. 특히 암사자의 세계가 그러하단다. 로자 아줌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암사자를 칭찬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이따금 상상 속에서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거기에는 새끼들을 돌보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암사자가 한 마리 있었다. 로자 아줌마는 바로 그것이 암사자들의 특성이라고 했다. 암사자들은 새끼를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나의 암사자를 불러들였다. 암사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뛰어올라 우리들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러길 원했고, 또 내가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그런데 수사자들은 평판이 좋지않았다. 세상 모든 수컷들과 마찬가지로 수사자들은 자기 혼자 먹고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내 암사자가 올거라고 하면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나니아조차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원래 낙천적이라 별다른 반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바나니아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 아이는 여유 있는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다. 나는 언젠가 그 아이를 보러 갈 것이다.
마침내 어느날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자는동안 내가 암사자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줌마는 물론 그것이 사실이아니며 다만 내가 자연의 법칙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져 집 안에 야생동물이 있다는 생각에 밤마다 공포에 떨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나에게는 꿈인 것이 아줌마에게는 악몽이 되었던것이다. 로자 아줌마는 꿈이 오래되면 악몽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두 마리의 암사자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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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인 카라마는 지금까지 낯선 젊은이들을포함해 수많은 사람을 돌봐줬다.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야 내가 청킹맨션의 보스이니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매사 귀찮아하는 성격의 카라마가 많은 젊은이를 돌봐줄 수 있었던 비결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적당히‘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의 일상적인 상호 부조의 대부분은 ‘겸사겸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2017년 1월경 카라마와 동료들은불법 체류가 적발돼 3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되었다가 나온마바야를 돌봐줬다. 카라마는 마바야가 무일푼이 되었다는 걸 알아서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우연히 마주치면밥을 사줬다. 하지만 딱히 더 신경을 써서 밥 먹자고 부르지는 않았고, 마주치지 않으면 한턱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날 장사가 잘된 누군가가 우연히 그와 마주치곤 했기에 -그들이 식사를 하러 가는 레스토랑은 항상 똑같다- 마바야는 늘 식사를 했다. 상대가 안내해줬으면 하는 곳이 목적지로 가는 길 도중에 있다면 데려가고, 침대가 비어 있으면 머물게 해준다. 아는 일이라면 친절히 가르쳐주고, 겸사겸사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상담은 선선히 거절하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약속을 연락도 없이 어기며,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어이, 재패니즈!"하고 웃으면서 찾아온다. - P94

그들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해 앞선 이가 준종잇조각 하나를 ‘길 안내‘ 삼아 중국과 홍콩에서 장사를시작한 그들에게 ‘궁지에 빠진 경험‘을 물으면 다들 수없이 겪어본 인생의 위기를 들려준다. 그 위기들을 극복할수 있었던 것은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말했듯이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신념은 ‘동포에게 친절히 대해야한다‘는 기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 give and take의 기회를 발견해내는 각자의 ‘지혜‘에서 비롯한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카라마의 휴대폰에는 정부 고관이나 대기업 사장, 사기꾼, 도둑, 전과자까지 온갖 사람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과의네트워크는 ‘겸사겸사‘에 의해 구축되어왔다. 상대를 불문하고 돕는 까닭은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P95

이처럼 타자의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이나 의무와 책임도 불문한 채, 무수히확대 증식하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이 각자 ‘겸사겸사 할수 있는 일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은 부담 없는 ‘서로 돕기‘를 촉진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한 안전망 safety net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 ‘열린 호수성‘은 구성원 간의 신뢰와 호수성을 키움으로써 ‘선한 사회‘를 목적 지향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시민 사회 조직‘의 논리보다 ICT나 사물인터넷 IoT, AI등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의해 주목받게 된 공유경제나 공짜경제Freeconomics 사상과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의 조합을 승차공유서비스 우버나 숙소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 또는 불특정 다수 유저의 게시물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무료로 이용하는 여러 사이트 같은 ‘플랫폼‘
이라고 생각하면 논리가 통한다. 조합 활동은 이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구축한 SNS상의 경매 시스템이나 전자화폐가 오가는 크라우드 펀딩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 P96

"매일 이스마일을 만나러 가면 그는 나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이스마일이 화를 낸다고 그의 말에 따르는 태도를 보이면 나를 자기 직원처럼 취급하겠지. 나는 파키스탄인과 수년 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건 예측이 아니라 사실이야. 만약 이스마일에게 고용되면 이스마일만 돈을 벌고 나는 그의 돈벌이를 위해일을 하게 돼. 우리 아프리카인이 홍콩의 업자들과 대등하게 비즈니스를 하려면 그들이 나를 그리워할 무렵에 가는게 딱 좋아."
카라마는 그들이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도록 때때로 달래줄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도 무릇 자신들을 대등하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루기 쉬운 인간‘이 되지 않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각이나 약속을 깨는 행동전부가 계산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은.
아프리카인 또는 불안정한 이민자/난민인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힘에 차이가 있는 홍콩의 업자들과 대등한 관계를구축하기 위한 흥정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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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들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평가하는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부조의 기준 • 규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합 운영과 조합내 상호 부조 면에서, 엄밀한 기준과 약속에 의해 ‘서로 무리하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기를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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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
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 "저 사람은 지금 수입한 천연석 품질이 나빠서 크게 손해를 보고있으니까 조금 주의하는 게 좋아",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自己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세 번째 배경은 난민으로 거주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유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오가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을 고려/계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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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홍콩조합 집회에서 한 여성이 발언했듯이 기본적으로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들의 생활사나 비즈니스에 대해 묻거나 들으면서 조사를 해왔는데, 대상자가 어떤 일을 태연히 설명해주더라도 주위사람들이 내게 "그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 놔둬"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라는 조언도 받곤했다. 타자의 복잡한 사정은 알 수 없는/알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타자의 ‘자기 책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두 번째 배경으로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간관 · 주체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기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불운‘의 영역인지를 묻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 이들은 애초에 개별적인 실천 · 행위의 귀결을 타인에 대한 인물 평가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이 안이하다‘,
‘별로 착하지 않다‘ 등 - 와 연결 지어 말하는 것 자체를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사정을 아는 개개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사태가 되어 안타깝다고 말하긴 하지만, 완전히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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