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물체는 해와 달인데, 인간이나 물가의 날벌레, 모래알과 마찬가지로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에는 상위 범주도 없으며 원자 간의 위계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체(天體)도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진공(眞空, void)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움직임도 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천체는 단순히 자연질서의 한 부분이며, 원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로서, 천체를 구성하는 원자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창조와 파괴의 원리를 따른다.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 - P95

 "쾌락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라고 했을 때 에피쿠로스는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는 편지글 중 하나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방탕하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네." "생각 없이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면서……육욕적인 사랑에 탐닉하고…… 산해진미로 풍성한 호화로운 식탁을 즐기는것" 같은 욕망을 채우려는 과열된 시도는 쾌락을 지속시키는 열쇠인 마음의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너무나 끔찍한 악덕으로고통 받고 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책 중 하나에서 신봉자인 필로데모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작 가장 필수적인 욕망들은 마치 본성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하곤 한다." 쾌락으로 이끄는 가장 필수적인 이 욕구들은 대체 무엇인가? 필로데모스는 계속한다. "신중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는, 용감하고 온화하고 관대하게 살지 않고는, 벗을 사귀고 인류를 사랑하지 않고는" 쾌락을 누리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 P99

아무리 쾌락이 가장 절제되고 사려 깊은 언어로 정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쾌락이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적인 주장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여타 이교도나 그들의 대척점에 있던 유대인은 물론이고 후일의 기독교인 모두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충격을 받았다.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신과 조상들에 대한 경배는 어쩌고? 가족과 도시, 나아가서는 국가에 대한 봉사는? 성실하게 법과 명령을 따르는 것은? 덕이나 신을 따르는 것은? 에피쿠로스의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혐오의 형태를 수반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쾌락의 추구를 최고의 선으로 보는 에피쿠로스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가 직접 자신의 사상을 가르쳤던 때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의 사상이 던진 충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존슨의 작품과 같은 졸렬한 모조품 안에서 비틀린 에너지를 발산하며 살아남았다.
이런 모조품의 뒤에는 반쯤 숨겨진 공포가 자리한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사실은 호소력 있는 목표이며 충분히 인간의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원칙으로 성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성공한다면, 사회를 지탱하는 희생, 야망, 사회적 지위, 규율, 신성함 등으로 대표되는 유서 깊은 다른 원칙들 전체가 그 원칙들이 봉사해온 사회기관들과 함께 거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쾌락의 추구라는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을 괴이하고 관능적인 방종으로 몰고 갔던 것은―성,
권력, 돈, 때로는 존슨의 예에서처럼) 얼토당토않게 값비싼 음식을 즐기는 사치스러운 미식 같은 것에만 목을 맨다고 묘사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도전을 막기 위함이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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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조가 보기에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다. 그가 보기에 수도원은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기 힘든 자들을 모아놓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은 약골,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자식을 수도원에 보내버렸다. 상인은 아둔하거나 무기력한 자식을 그곳에 내다버렸고 농부는 자기 힘으로 먹일 수 없는 남아도는 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곳을 이용했다.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들은 초창기의 좀더 금욕적이던 시대의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원에 딸린 정원이나 밭에서 최소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조가 판단하기에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게으름뱅이였다. 수도원의 두꺼운 외벽 뒤에 사는이 기생충들은 기도말만 웅얼거리며 수도원의 방대한 소유지를 경작한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입으로 살아갔다. 교회는 유력한 대지주였으며 종종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귀족보다도 더 부유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세속적인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유 토지의 소작문제나 그 밖의 권리나 특혜에 대해서 강한 목소리를 냈다. 독일 북부힐데스하임에 주교가 새로 선임되었을 때, 신임 주교는 교구의 도서관을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서고 대신 무기고로 안내를 받았는데, 벽에 걸린 창과 전투용 도끼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주교의 권리로 얻은, 그리고 주교로서 당신이 지켜야 할 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부유한 수도원의 구성원들이 이런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흐릿한 빛 속에 앉아 가만히 수입을 헤아리고 있노라면,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도-때로는 야만적인 힘을 써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 P50

 이미 초기 수도원 회칙에서부터 수도사들이 해야 할 노동의 구분은 가시화되어 있었다.ㅜ프랑스의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성 페레올루스(530-581)의 「회칙」에 따르면 "쟁기를 손에 쥐고 땅에 설 수 없는 자는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잡고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붙들고 쓸 수 없는 자는 쟁기라도 잡아야 했다). 드물게 뛰어난 능력-다른 수도사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름답고 명료한 손글씨로 정확하게 필사하는 능력을 갖춘 수도사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게르만족 전통이 있는 지역과 아일랜드에 존재했던 ‘속죄배상금(Wergeld)‘은 죽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살인에 대한 배상비용에 차별을 두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뛰어난 필사가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있다. 평범한 촌부를 죽인 경우 배상금은 200실링으로 책정되었다. 낮은계급의 성직자는 300실링이었으며, 만약 그가 살해되던 때에 미사를 올리는 중이었다면 400실링으로 올랐다. 그리고 폭력의 행사로 필사가가살해된 경우,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배상금이 책정되었다.
생명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시대에 필사가에게 이렇게 높은 배상금이 지불된 것은 독서를 명하는 회칙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원이 필요한 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힘든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중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수도원 도서관도 고대 로마 제국의도서관이나 당시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존재했던 도서관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기 전의 오랜 세월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수의 책이나마 모을 수 있었던것은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고 불린 궁극의 시설 덕분이었다.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사들이 오랜 시간 앉아서 필사를 하던 작업 공간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수도원에 자리가 생기는 대로 작업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설령 한기에 손가락이 곱아드는 곳이더라도 최소한 빛은 잘드는 곳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필사 목적에 맞게 특별히 설계하고 건축한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중한 책을 수집하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면서 훌륭한 수도원마다 깨끗한 유리창이 갖춰진 방을 준비하고 많게는 30명의 수도사가 한꺼번에 같이 앉아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들은 개인 책상에 앉아서 필사를 했고 때로는 그들의 집중을 돕기 위해서 책상 사이에 칸막이까지 설치되었다. - P52

결국 고대 사상을 담은 책들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직 양피지의 놀라운 내구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 책 사냥꾼이라면 잘 알고있었던 것처럼 제아무리 강한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반드시 생존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종종 칼, 브러시, 헝겊조각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세네카, 루크레티우스의 글이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다. 이런 작업은 분명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었겠지만, 실제로 자신이 지우고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필사가가 있었다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원본의 잉크가 좀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면, 이런 작업을 거친후에도 여전히 지우려고 했던 원래 문헌의 내용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키케로의 「국가론(Dere publica)』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다. 우정에 관해서 논한 세네카의 서한을 필사한 단 하나뿐인 사본도 6세기 후반에 필사된 「구약성서」 아래에서 해독되었다. 이처럼 이상하게 글자가 중첩된 상태로 발견된 문헌들을 ‘다시 긁어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부른다. 고대의 몇몇 주요 작품들은팔림프세스트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알려지지 못했을 것도 있다. 그러나 중세의 그 누구도 수도사에게 필사한 글의 행간에 있는 글을 읽으라고권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58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포조가 한 다른 발견에의해서 앞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중요성은 곧 퇴색하고 말 것이다. 위에 언급한 책들보다 더 오래된 작품으로 기원전 50년경에 저술되었으며,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카루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철학자가 쓴 이 장관시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유명한 백과사전 「사물의 본성들에 관하여(De rerum naturis)』와 너무나 유사한 제목이다. 그러나 이 중세 수도사의 작품이 따분하고 관습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위험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포조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가 동료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열심히 읽었던 오비디우스키케로 등 여러 다른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언급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조나 그의 동료들 중 누구도 실제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인용된 한두 줄의 토막글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조는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문장이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곧장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은 포조가 그 책을 풀어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스스로 알고있었는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 - P66

로마 귀족은 헬레니즘 문화에 무절제하게 열광하는 것을 결코 존경받을 만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그리스어에 능통하거나 그리스 예술을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일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견지하곤 했다. 그러나 신전을 비롯한 로마의 공공장소를 근사하게 장식했던 것은 실상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점령지로부터 약탈해온 우아한 그리스 조각상들이었다. 전장을 누비는 로마 장군들의 빌라 역시 귀한 그리스 꽃병이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런 석조나 토기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로마에 침투해 있던 그리스 문명의 이기(利器)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바로 책이었다. 군사국가답게 로마가 수집한 첫 대량 도서 역시 승전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이었다.  - P78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유적의 발굴조사에서는 기부자를 기념하는 명관들과 함께 조각상, 필기용 책상, 파피루스 두루마리 보관용 선반, 번호가 매겨진 책장이 발견되었다. 이런 책장들은 양피지를 묶어 만든 책이나 점차 두루마리의 대체제로 떠오르던 코덱스 형태의 책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또한 도서관 벽 위에 휘갈겨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도서관이 오늘날의 공공도서관과 여러모로 비슷한 모습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서관은 공공자산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물론, 도서관은 어떤 모습이어야한다는 우리의 관념도 수천 년 전 로마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 P81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은 복잡한 문제를 혼자 고민하는 ‘고독한천재‘를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적 삶‘ 하면 떠오르는 지배적인 이미지는 자신만의 비밀 은거지에 머물면서 모든 것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데카르트나 조용히 렌즈를 갈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던 파문당한 스피노자의 모습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지식인의 이상형의 변화는 문화적 특권에 일어난 의미심장한 변화에기초하고 있다. 변화는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초기 기독교인은 은둔생활을 하며 의도적으로 이교도가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이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사막에서 생활한 성 안토니우스(250-356) 나 좁은 기둥에 올라앉아 수도했다는 성 시메온(390-459)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현대의 연구가 밝혔듯이, 이들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이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종종 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이미지 혹은 그들 주변에 유행하게 된 이미지는 사회성이 배제된 극단적인 고립의 이미지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는 이것은 낯선 것이었다. 물론 생각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조용한 환경과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므로, 그리스, 로마의 시인과 철학자도 주기적으로 시끄러운 세상사로부터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지향했던 이미지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을 다른 양치기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또다른 양치기로 묘사했다. 철학자는 스스로를 종종 며칠에 걸쳐 이어지기도 하는 긴 대화를 주고받는 자로 묘사했다. 일상의 산란함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완전히 고립된 자기만의 작은 공간으로 물러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친구들과 정원에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은 곧 단체생활에의 참여를 의미했다. 교양 있는 로마인이 선택한 활동은 앞선 시대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대화였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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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모든 것이 바뀌었을 뿐이다. 한때 독실한 신자들을(그리고 믿음이 부족한 자들도 떨게 했던 교황은 1417년 겨울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이델베르크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교황은 이제 지위, 이름, 권력, 그리고 품-지가문 번석금지까지 잃은 채 공식석상에서 굴욕을 당했으며, 자신의 교회에 속한 군
"주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신성하며 무오류(無誤謬)의 콘스탄츠 공의회(公會)는 교황이 자신의 ‘혐오스럽고 부적절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와 기독교 전체에 스캔들을 일으켰으므로 더 이상 그는 교황이라는고귀한 자리에 맞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서 공의회는 교황에 대한 모든 충성과 복종의 의무에서 신자들을 해방시켰다. 실제로 이제는 그를 교황이라고 부르거나 그의 명에 따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교회의 기나긴 역사 속에는 이미 상당한 추문이 있었지만, 이런 일은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폐위된 교황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폐위 시까지 교황의 비서였던 포조는 리가의 대주교가 금세공인에게 교황의 인장을 넘겨주며 교황의 문장과 함께 그것을 파괴하도록 엄숙히 지시하는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교황청에서 일하던 교황의 수하들은 공식적으로 모두 해고되었고 포가 그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교황의 연락 업무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요한네스 23세라고 불린 교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때 그 칭호를 사용했던 남자는 다시 자신의 세례명, 발다사레 코사로돌아갔다. 포조는 이제 섬기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다. - P30

어쨌거나 수도사는 회칙에 따라 실제로 독서를 했으며 강제된 독서는 결과적으로 이례적인 연쇄작용의 시발점이 되었다. 독서는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가치 있게 여겨지거나 권장된 것도아니었다. 수도원 사회에서 독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엄숙한 의무였을 뿐이다. 그래도 독서를 하려면 일단 책이 필요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책은 펼칠 때마다 조금씩 낡게 되었고 결국에는 너덜너덜해졌다. 수도사들은 어쩔 수 없이 책을 새로 사거나 얻거나 해서 계속 책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6세기 중엽에 일어난 격렬한 고트 전쟁(Gothic Wars)과 그보다 더 비참했던 전쟁의 후폭풍을 거치면서 책 생산을 담당했던 최후의 공방들도 장사를 접었다. 책 시장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수도원은 거의 어쩔 수 없이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을 더욱 주의 깊게 보관하고 책의 소실에 대비하여 수도사들에게 책을 필사하도록 지시하는 회칙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업적인 책 시장로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제조업자들과의 무역은 정치적 혼란 속에 이미 오래 전에 중단되었고 양피지제조업도 고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국 다시 한번 어쩔 수 없이 수도원은 새 회칙을 정해 수도사들에게 양피지를 만드는 힘든 기술을 익히게했고 상태가 좋은 양피지는 복원하여 재사용하도록 가르쳤다. 책의 구비나 저술을 사회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이교도 엘리트들을 모범으로 삼아 따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수사학이나 문법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배움이나 토론을 높이 사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사들은 독자이자 사서, 책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방의 책 생산자가 되었다. - P40

 일반적으로 외부인은 수도원 도서관에 출입할 수 없었다. 페트라르카는 성직자였으므로 최소한 교회라는 거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서관 출입을 호소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세속인이었으며 그들이 도서관 장서에 대해서 보이는 관심은 즉각적인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기를 꺾는 이런 장애물 목록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책 사냥꾼이 일단수도원에 도착하여 굳게 닫힌 문을 어렵게 통과하여 도서관에 들어가는데에 성공하고 실제로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해도 난관은 아직남아 있었다. 그가 발견한 책 자체에 대해서도 셈을 치러야 했다.
책은 희소하고 귀한 것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수도원의 명성을 높여주는 일이었으므로 수도사들은 이 귀중품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손버릇 나쁜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를 이미 겪어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때때로 수도원은 그들의 소중한 책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저주의 글을 책에 담기도 했다.
한 필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소유자로부터 이 책을 도둑질하거나 빌려서 반환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 고하노니, 그자의 수중에서 책이 독사로 변하여 그를 갈가리 찢게하라. 그의 몸을 마비시키고 그와 함께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파탄을 안겨라. 그가 자비를 크게 부르짖으며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게 하라. 그리고 그가 스스로 파멸을 노래할 때까지 그의 고통에 멈춤이 없게하라. 가책의 증거로서 책벌레가 그의 내장을 파먹게 하리니, 마침내 때가 되어 그가 최후의 형벌을 받을 때가 오면 지옥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집어산키게 하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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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설명 너머에 있는 시의 핵심에는 만물을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의 기본 원칙이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우주 공간을 무작위하게 움직이는 무수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원자들은 햇빛 아래에서 떠다니는 먼지처럼 충돌하고, 서로 들러붙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기도 하며 다시 부분으로 깨지기도 하면서 생성과 파괴의 부단한 과정을 끊임없이되풀이한다.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당신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낄 때, 당신은 신들의 작품을 보고 있거나 잠시 머무는 이 덧없는세계와는 동떨어진 다른 반짝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도 그 일부이며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원소들로 만들어진 물질계(material world)이다. 여기에는 종합적인 계획도, 신성한 조물주도, 지적인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종을 포함한 사물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경우에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우연히 살아남아번식하는 데에 성공한 종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좋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종(種)으로서의 우리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이 행성, 그 위로 매일 타오르는 태양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 P12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지구와 그 거주민이 우주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고 믿을 아무런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이유가 전혀없다. 인간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고 종교적 광신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금욕적인 자기 부인은 불필요하고, 전지전능한 힘이나 완벽한 구원에 대한 환상은 근거가 없다. 정복욕이나 자기 과시욕도 불합리하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 P13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유래한 철학적 전통은 신이나 국가에 대한 숭배와는 병립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고대 지중해 세계의 관용적인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 철학을 불미스러운 사상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이 전통의 신봉자들은 때때로 미치광이취급을 받았고, 불경하다거나 심지어 그저 아둔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이들 문헌은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고 희화화되었으며 끝내는 불살라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파괴적으로 작용했던것은 무시되는 것,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망각되는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라져가던 철학 사상을 명료하게 표현한 위대한 작품 하나가 끝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의 부활이 바로 이 책의주제이다. 약간의 자투리 글모음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간접적인 인용문을 제외하면, 풍성했던 한 철학 전통에서 살아남은 모든 것이 이한권의 저작에 담겨 있다. 이 저작이 우연한 화재와 약탈, 이단이라고 판단된 사상들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말살시키려는 결정 속에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면, 근대화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 P14

1
책 사냥꾼

1417년 겨울, 포조 브라촐리니는 독일 남부의 나무가 울창한 언덕과 계곡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오래된 필사본의 보고(寶庫)로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오두막 문 사이로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외지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른 체구에 말끔하게 면도를 한 그는 만듦새는 훌륭하지만 간소한 차림새로 단순한 튜닉과 망토만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가 흔한 촌뜨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시골에서도 때때로 볼 수 있는 여느 도시 사람이나 궁정 사람 같지도 않았고 쩔렁이는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게르만족 기사도 아니었다. 사실 어느 비쩍 마른 촌놈이라도 곤봉으로 힘껏 후려치면 그를 손쉽게 제압했을 것이다.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나 높은 지위를 드러내는 익숙한 징표도없었다. 그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향수를 뿌린 긴 가발을 쓴 궁정의 고관대작도 아니었고, 종종 매 따위를 데리고 시골로 사냥을 나오는 귀족도 아니었다. 그리고 옷이나 머리 모양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분명히 사제나 수도사도 아니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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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목적지 중 다수가 노동자들의 영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흔한 폐지론자의 이미지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특권층 지식인이나 퀘이커 교도가 아니었다. 이들은 농장노동자나 장인 등 나이가 젊고 손으로 일해 먹고사는 남녀였다.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회상했듯, 폐지론은 강단이나 대학교보다는 공장이나 신발 가게에서 더 강력했던 민중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요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급진주의는 신발 가죽 냄새와 함께 갔다". 운동의 핵심에는 흑인 운동가나 유색인 운동가들이 있었다. 세일럼의 레먼즈처럼 유명한 사람도 그중 하나였다. 크래프트 부부가 방문한 곳에서 흑인 아닌 "유색인"은 수도 적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덜 드러나지만, 이들 역시 쉬지 않고 여행하는 이 부부를 응원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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