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병원체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세포에 대해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며 대략 형태는 있으나 미묘하게 제각각인, 연약한 원형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M. C. 에셔(Maurits Cornelius Escher, 1898~1972,
네덜란드의 판화가 ― 옮긴이)의 작품처럼 훌륭한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어떤 것은 정이십면체 같은 다각형이기도했고, 어떤 것은 누에고치처럼 개체가 나선 모양으로 켜켜이쌓인 구조체, 또 어떤 것은 무인 화성 탐사선 같은 기계 모양이었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바이러스는 반드시 똑같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크기나 개성 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이러스가 생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질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 P33

물론 에이버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실험데이터가 나타내고 있는 사실은 유전자가 단백질이라는 예측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이버리도 S형 균에서 여러 가지 물질을 추출하여 어느 것이 R형 균을 S형 균으로 변화시키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남은 후보는 S형 균체에 포함되어있던 산성 물질, 즉 DNA 였다.
핵산은 고분자이기는 하지만 단 네 개의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한 물질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복잡한 정보가 담겨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0과 1이라는 두 숫자만으로도 복잡한 정보를 기술할 수 있고 오히려 그 편이 컴퓨터를 고속으로 움직이기에 좋은 조건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생물학자 중에 정보의 코드(암호)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한 이는 없었다. 에이버리도 자신의 실험 결과에 반신반의했다. 몇번이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재검토했지만 결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유전자의 본체는 DNA다.
- P43

지금까지는 잘 듣던 항생물질이 약효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 항생물질이 무력화되었다는 얘기다. 내성균은 항생물질을 분해하거나 다른 무해한 물질로 변화시켜 버린다. 즉 새로운 능력(=형질)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은 다른 세균 사이에서도 급속히 확대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세균들끼리 DNA를 주고받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성균에서 비내성균으로 DNA가 전달되면, 즉 유전자가 수평으로 이동하면 비내성균은 내성균이 된다. 이는 에이버리의 실험, 즉 병원형인 S형 세균의 DNA가 비병원형인 R형세균에 주입되면 R형이 S형의 형질을 획득하여 병원형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에이버리의 실험은 자연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 P55

그러나 지급 중요한 것은 나선 구조 그 자체보다 DNA가 쌍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답은 다름아닌 "정보의 안정화를 담보한다." 이다.
DNA가 상보적으로 대칭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 한쪽 문자열이 정해지면서 다른 쪽도 의무적으로 정해지게 된다. 혹은두 가닥의 DNA 사슬 가운데 어느 한쪽을 잃어버려도 다른한쪽을 모체 삼아 쉽게 복구가 가능하다.
DNA는 자외선이나 산화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열이 깨지는 경우가 있다. ATAA라는 부분 배열이 없어졌다 해도 상보적인 다른 한쪽의 사슬에 TATT라는 구조가 보존되어 있다면 자동적으로 구멍을 메울 수 있다. 사실 DNA는 일상적으로 손상되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복구되고 있다. 이렇게 정보를 보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생명은 일부러 DNA를 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가닥은 예를 들면 this is a pen 이라는 정보가 그대로 배열된 사슬, 즉 센스(의미)사슬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닥은 이 센스 사슬의 보디가드(혹은 반사경)사슬, 즉 안티센스사슬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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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다마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종종 냇가로 산책을 나가는데, 하천 수면을 훑으며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햇빛을 등지고 물속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참으로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수면 위로 작고 세모난 돌 같은 것이 나와있어 살펴보면 거북이의 코일 때도 있고, 물살을 따라 하늘거리는 실처럼 보였던 것이 치어 떼인경우도 있으며, 물풀에 엉켜있던 먼지 덩어리가 자세히 보면 잠자리의 유충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문득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생물학 시간에 교수님이 던졌던 질문, 사람들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 짓곤 하는데, 생물의 어떤 측면을 보고 그런 구분을 하는 것인가? 애초에 생물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 P4

나도 처음에는 실망했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절반은 그런상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실은 바로 이 부분에 생명의 본질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전자 녹아웃 기술로 부품 한 종류, 한 조각을 완전히 제거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결함이 채워져 보완 작용이 일어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면 기능 부전 현상은 일어나지않는다. 생명에는 부품을 끼위 맞춰 만드는 조립식 장난감 같은 아날로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뭔가 다른 다이너미즘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이 다이너미즘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동(動)적인 것‘ 은 도대체 무엇일까?
- P8

어떤 미생물이 ‘원인‘ 이 되어 특정 질병이 발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관련성을 증명하기 위해 또 어떤 요건이 필요할까? 관찰은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아무리 환자를 관찰해도 연구에 진전이 없는경우가 있다. 관찰함으로써 상관 관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다.
인과관계는 ‘개입(介人)‘ 실험을 통해 비로소 밝혀진다. 개입 실험이란 말 그대로 원인으로 생각되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예상되는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현미경 아래서 꿈틀대던 미생물을 가느다란 피펫으로 빨아올려 건강한 실험동물에게 접종하고 질병이 발생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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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만월이었어요. 저는 오랫동안 달을 바라보았지요. 구름이 한 점도 없어서 달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서 내얼굴을 비추어주는 것 같았어요. 다음 날 아침 크리스토핀이 난리를 부렸어요. 만월 때 달빛을 받으며 잠드는 것은 아주 나쁜 거라고요."
"크리스토핀에게 쥐 얘기는 안 했소?"
"아니요. 이 얘기는 당신한테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이면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강가의 꽃이 뿜어내는 향기가 너무 짙어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였다.
"당신도 내가 달빛 아래서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입은 억지로 웃고 있었고 눈빛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의 것이었다. - P122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다. 야생적이고, 문명의 손길이 닿지않은 곳. 무엇보다도 문명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다. 아주 이국적인 곳. 또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은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 뒤에 숨겨진것을 알고 싶다. 뒤에 감춘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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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도 타고나는 폭력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인기를 얻자 우생학 운동은 폭력적 범죄 성향에서 나아가 다양한 유형의 정신질환자로 범위를 넓혀갔다. 뇌전증, 조현병, 치매를않는 사람들, 혹은 지능지수 70 이하의 사람들 모두가 ‘나쁜 유전자‘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미래 세대의 완전무결한 보전을 위협하는, 우생학 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우생학 운동 전선의 최대 표적은 다른 종류의 정신질환에 직면한 사람들, 즉 정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들의 정신적 결함이 다음 세대로 유전될 경우 인류 전체의 지적 능력을하락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면 모두 이 범주에 넣고는 이현령비현령 의지박약‘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적으로 분방한 여자, 빈곤층, 흑인, 법적 부부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비혼모등이 이 범주에 포함되었는데, 그 목록이 얼마나 긴지 과연 이 표적을 피해간 그룹이 있었을지 의아할 정도다.
미국에서는 총 6만여 명이 강제 불임수술을 받았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일부는 마지막 강제 불임시술 기간에 살아 있었을 것이다. 1983년이었으니까. 비록 미국에서 강제 불임수술을 받은 인원수가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 불임화된 인원수의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미국의 강제 불임시술 기간이 6배 더 길었다.
- P229

우생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 윤리에 위배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공격성을 배제하는 선택이 너무나 쉬워 보였던 여우 실험도, 실은 매우 극단적인 선택 번식이었다. 이 실험에서는 사람에게 친화적인 개체라는 조건하에 많은 세대의 수많은 여우 가운데 단 1퍼센트에게만 번식을 허용했다. 우리종의 친화력 선택 진화가 진행되던 후기 구석기시대, 우리의 인구 규모는 100만 명 이하로 그리 크지 않았고, 그 선택의 결과는 수만 년에 걸쳐서 나타났다.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 넘는 오늘날, 벨랴예프의 실험 속여우들이 겪은 정도의 선택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69억 명이상에게 번식을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설령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여우 실험처럼 간단하게 사람의 친화력을 측정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선택압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강화하려는 유형의 친화력 관련 유전자를 지닌 개인들을 찾아내야 한다. 말하자면 환경적 요인으로 친화력을 갖게 된 개인을 선택했다면, 몇 세대가 지나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P230

과학기술을 선한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최고의 미덕과 최악의 본성을 함께 예측하고 개발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더 다정하고 친화적인 미래를 위한 해결책에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어두운 본성을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문제에는 사회적 해법이 필요할 것이다.
- P234

사람 자기 가축화 가설은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며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서 두루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또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에서는 가장자리 극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경쟁자를 비인간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측한다. - P251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자들은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접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등을 완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이 낮은 상황에서 여러 집단이 함께할 수있다면 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불안을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키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위협받는다는 느낌이 우리 뇌에서 마음이론 신경망의 활동을 꺼버린다면, 위협 없는 접촉은 이 스위치를 다시 켤 수 있을것으로 보였다.
대부분 정책은 태도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가정을 전제로 설계된다. 하지만 집단 간 갈등의 경우에는 접촉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동의 변화가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 P260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접촉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도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 P264

도시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과비슷한 환경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도시는 교류와 접촉을 증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도시계획가 마이 응우엔 Mal Nguyen 은 말한다.
응우엔은 효율적인 출퇴근이 가능하도록 도심이나 적어도 환승 지원 시설이 가까운 지역에 정부 보조 주택을 건설할 것을제안한다. "노출이 관용을 창조한다"고 응우덴은 강조한다.
••••••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수 있다.  - P183

오레오와 나눈 우정과 사랑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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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를 향해 뛰면서 나는 생각했다. ‘티아와 함께 살아야지. 그리고 나는 티아처럼 될 거야. 쿨리브리를 떠나지 않을래. 결코.‘ 티아에게 가까이 갔을 때나는 티아가 울퉁불퉁한 돌을 하나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티아가 그것을 내게 던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돌을 맞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뭔가 축축한 것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고 생각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티아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마주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서는 피가, 그리고 티아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채로. 티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내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내가 보듯이.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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