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지만 죽은 상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왜 초조한지 퍼뜩 깨닫는다. 저들의 부서진 부분들이 꼭 나를 닮아서다. 나도 오래도록 내 안의 나침반을 잃은 채 살아왔다. 건강하고 좋은 것을 알아보는 스위치가 꺼져버렸다. 누군가가 아무리 크고 시끄러운몸짓으로 다가와도 나를 깨우지 못했다. 나도 이 남자들처럼 하루하루를 멍하니 보냈다. 땅만 내려다보면서, 신발을 질질 끌면서 나자신과 주변 모두로부터 숨어들면서.
-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말은 주인을 닮는다고들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주가 되어가는 것이다. 말들은 주인의 내면에 자신을 녹아들게 한다. 감정의 위장이다. 목장에 있는 말들은 오랫동안 망가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얼굴에, 몸의 자세에, 각자의 독특한 움직임에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다닌다. 이 신체적 표현은 말들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두려움과 그 사촌들 분노와 짜증과 고통은 재소자들의 걸음걸이에, 그들의 어깨와 목에, 굽은 등에 실리고 눈썹 밑 그림자에 숨어 그들로 하여금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 P22

어떤 재소자들은 작위적인 자신감으로 위장한 채 움직인다. 팔을 크게 휘두르며 팀원들에게 버럭버럭 지시를 내리는 식이다. 반대로 몸에 생기라고는 한 방울도 안 남은 것 같은 이들도 있다. 암초에딱 붙어사는 조그만 해양생물처럼, 물컹물컹한 무정형의 몸이다. 움직임 또는 움직임의 부재는 그 자체로 감정이 담긴 이야기다. 모든걸 숨김없이 드러낸다. 상처받은 인간들과 한때 야생이었던 말들 간의 이 밀폐된 관계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오면서 재앙을 만들어냈다. 가난에, 가족사에, 그리고 교정 시스템에 얻어맞은 거친 남자와 여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매일같이 그 고통을 말들에게 전하며 목장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풀을 뜯을 때조차 이 말들은 눈과 귀로 모든것을 보고 감지한다. 말은 위험을 인정하고 우두머리를 따르면서 살아남는다. 맞서 싸우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말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해가 될 만한 곳으로부터 무리를 떼어놓고, 심각한 위험이 감지되면 스피드라는 타고난 능력을 사용해 안전을도모함으로써 우두머리는 우두머리가 된다. 피하거나 싸우기. 그런데 외부와 차단된 이 목장의 높다란 흙벽돌담 안에서, 수천 년에 걸쳐 유전된 그 본능이 뒤집히고 말았다. 달아날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움직일 때마다 분노를 발산하는 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 말들은 싸우기를 택한 것이다.
- P23

플로르와 새라는 감정이 북받쳐 먹먹해한다. 아래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이 목장에서 두 암말에게 손끝 한번 대지 못한 채 지내온 시간이 얼마인가. 그리 크지도 않은 목장인데 말이다.
여기서는 모든 인간, 모든 동물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루나와 에스트렐라는 고립되고 외상을 입은 채 너무 오랫동안 방치돼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어떤 건지, 플로르와 새라는 잘 안다.
- P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프롤로그

처음엔 내게 도움을 청하는 여느 목장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말을 훈련하고 마주를 교육하는 건 지난 이십 년간 내 업이었다. 문제 있는 말에 얽힌 일화는 지겹도록 들었다. 잘 들어보면 이야기에 쏙 빼놓은 부분들이 있고, 말하는 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 부분도 십중팔구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 한쪽 귀를 쫑긋거린다든가 숨이 가빠진다든가 하는- 도 말이 소통하는 신호임을 안다.
마주들이 이런 미묘한 언어를 일찍이 알아챘더라면 안 좋은 경험들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 요청은 달랐다. 말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얘기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말, 약탈하는 말, 피에 굶주린 말이라니. 진짜일 리 없다고 생각했고, 진짜라면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타인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일상 그 자체가 사실상 ‘공연‘의 성격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nan은 공연을 "개인이 특정 관찰자 집단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활동, 그리고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공연에 장애인이 참여하는 경우를 모두 문제라고 말하기는어렵다. 사회적 행위자인 장애인도 당연히 공연에 참여해 연기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공연에서는 자신이 그 공연에 동원되었다는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아무런 역할도 없이, 개성이나 존재감도 없이 특정 집단(장애인, 노인, 환자, 빈자, 노숙인 등)이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도구처럼 활용된다. 이런 종류의 공연에서 이 집단은 철저하게 추상화, 익명화, 기호화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함‘을 전달하는 요소들, 즉 빈곤함의 정도, 장애의 심각성,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연으로만 존재가 설명된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사람의 존재는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특정한 목표에 맞춰 알려진다. 나와 어머니가 참석했던 후원회는 국회의원 본인과 ‘천사 같은‘ 장애인들을 만나고 왔다는 모임 주최자의 존재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무대였다. 나는 월 10만 원을 받는 대가로 공연에 동원되었을 뿐이다(물론 후원을 받는 사람은 그 정도의 역할은 해줘야 하기 마련이다.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 정치인들에게 목욕 봉사나 경제적 후원을 받는 장애인은 무력하게 누워 있는 익명의 존재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 그와 같은 공연을 펼쳤는지는 그에 대한 평가와 관계없이 강렬하게 기억한다. - P42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희망,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기호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당신과 내가 장애, 질병, 빈곤, 인종, 나이 등을 이유로 누군가의 동정이나 혐오를 받기쉬운 처지에 있고, 그러한 처지 이외에는 존재의 고유성을 철저히상실한 상태로 타인의 공연에 동원되었다면, 우리의 삶도 쓰구이야마유리엔의 비극과 (멀리서나마)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더큰 문제는 나와 당신이 그 ‘피해자의 삶에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가해자와도 연결되어 있다.
- P44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 (성찰적) 시선을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이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한다. 오로지 하나의 감정, 한 명의 존재, 유일한 현실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압도한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는 ‘그래, 이 정도면카메라 기자들이 촬영할 테니 여론을 움직여 결국 우리의 뜻을 관철할 수 있겠지. 지금 내 자세는 충분히 불쌍해 보일까?‘와 같은 자기 성찰적 기획의 결과일 수 없다. 자식을 벌레같이 보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지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녀만을 향했을 것이고, 자녀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목표에만 정향되었을 것이다.
- P47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관찰하고,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굽어진 내 다리가 추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의식하며, 아름다운 뮤지컬을 보면서는 의자에 푹 파묻힌 내 어깨가 굽어 보일까 염려한다. 식당에서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들을 때도 내가 ‘적절하게‘, ‘품격 있게‘, ‘지적으로‘ 반론을 펼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한다. 격렬한 집회와 시위의 한가운데서도 내가 혹여 ‘비합리적인 요구를 품위 없이‘ 주장하지는 않는지 성찰한다.
- P49

어떤 종류의 선의의 거짓말은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고도 그를 배려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카르마 우라.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철저히 관계 속에 존재해요."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이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쓴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마가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 말을을 안다. 우리의 행복은 전적으로,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있다. 가족, 친구, 이웃, 게다가 우리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무실 청소부까지도 모두, 행복은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접속사다.
그럼 행복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먼 걸까? 나는 행복을 찾아낸 걸까? 난 지금도 터무니없이 많은 수의 가방을 갖고 있으며, 갑자기 중병에 걸린 것 같다는 걱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그래도 가끔 행복한 순간이 있기는 하다. W. H. 오든의 충고처럼, 나는 "출 수있을 때 춤추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든은 춤을 잘 춰야 한다고는말하지 않았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내가 100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다. 아마 50 대 50에 가깝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모든 걸 고려했을 때, 그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래, 결코 나쁘지 않다.
- P5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