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보면, 전운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조정신료들의 선택은 전략적 판단에 따른 방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당시의 척화론은 정책policy으로 보기 어렵다. 상황에 따라수시로 절충이 가능한 정책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바꿀 수 없는 국시 곧 국가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라가 설사 망할지라도 대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가 조정을 뒤덮었고, 그런 논의를 제어할 권위를 가진 자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 국가정체성을수호하자는 주장이었기에, 척화론은 국왕의 권위보다 한참 더 위에 있었다. - P114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의 건국은 조선에 매우 특별한 의미였다. 당 몰락 후 중원은 북방 정복왕조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명은400여 년 만에 한인이 중원을 확실하게 ‘정화‘한 매우 특별한 ‘중화제국[中朝]‘이었다. 단순한 강대국 차원이 아니라 주-한-당-송으로 이어진 유교적 중화문명의 담지자, 곧 한인의 중화제국이자 천자국이었다. 특히 주자학을 국시로 천명하고 출범한 조선왕조에서는 주자학적 화이관이 매우 강고하였다. 그 결과 16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명·조선 관계의 본질을 이전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를 추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충과 효에 동시에 기초한 군부·신자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명과 조선은 군신 관계를 넘어 부자 관계로까지 이념화된 상황이었다. 
군신관계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관계가 아닌 상대적 가치였다. 이에 비해 부자 관계는 부모가 아무리 패악하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부자 관계를 스스로 끊을 길이 없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였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라는 말이 조선 사회에서 널리 회자한 이유였다. 또한 바로 이 점이 명·청 교체를 맞아 조선인이 이전 고려 때와는 달리 천자(군부)를 바꾸는 데심각한 윤리적 부담을 느낀 이유였다. 이륜彛倫 문제가 복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확인했듯이, 척화론에는 명과 조선이 부자 관계로 묶여 있음을 강조한 논변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는 척화론의 기본 논리가 명과 조선은 충과 효에 동시에 기초한 군부·신자관계라는 절대 가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상황을 초월하는 가치, 다른 말로 조선왕조의 국시이자 존재 이유, 곧 국가정체성이었다는 것이다. - P122

요컨대, 누란지세累卵之勢의 국가 위기에서도 척화론이 여론을 주도한 연유를 사대 의리나 재조지은, 예교질서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더 본질적인 변수가 있었다. 군위신강(충)과 부위자강(효)에 기반한 군부·신자 관계라는 정체성이 가장 핵심이자 본질이었다. 또한 이런 명분론적 척화론의 기저에는 바로 양반지배층의기득권(지배 구조)을 고수하기 위한 현실적 이해관계도 강하게 복류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척화론이 조선왕조의국시이자 정체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조야를 뒤덮었을 뿐만아니라 조선 후기 내내 정치·지성사의 흐름을 주도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무시한 채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이자 의리론으로만 파악한다면, 당시 조선은 정말이지 매우 ‘이상한‘ 나라로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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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뭔가에 대해 확실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질적인 부나정신적인 부나 마찬가지다. 내가 종종 겪었던 것처럼, 확실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뭔가를 잃은 사람은 결국 깨닫게 된다. 진실로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구태여 걱정할 필요가 뭐 있는가. 오늘이내 존재의 첫날이거나 마지막 날인 양 사는 것이 오히려 낫지않은가. - P45

그런데 달아나야 할까? 나는 이제 막 도착했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매일 밤 춤을 추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전에는 좋아서 줬지만, 지금은 돈과 명성을 위해 춘다. 다리가 아픈 건 견딜 만하다. 가장 힘든 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제물일 수도 있고, 자신의 보물을 찾아 떠난 모험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볼 것인지에 달려 있다. - P60

갇혔다는 기분이 들 것이고, 커브가 두려울 것이고, 거기서내려 토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롤러코스터의 궤도가 내 운명이라는 확신, 신이 그 롤러코스터를 운전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진다면, 악몽은 흥분으로 변할 것이다. 롤러코스터는 그냥 그것 자체, 종착지가 있는 안전하고 믿을 만한 놀이로 변할것이다. 어쨌든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은, 주변 경치를 바라보고 스릴을 즐기며 소리를 질러대야 하리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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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
나는 경배받는 여자이자 멸시받는 여자이니
나는 창녀이자 성녀이니
나는 아내이자 동정녀이니
나는 어머니이자 딸이니
나는 내 어머니의 팔이니
나는 불임이자 다산이니
나는 유부녀이자 독신녀이니
나는 빛 가운데 분만하는 여자이자 결코 출산해본 적이 없는 여자이니
나는 출산의 고통을 위로하는 여자이니
나는 아내이자 남편이니
그리고 나를 창조한 것이 내 남자라
나는 내 아버지의 어머니이니
나는 내 남편의 누이이니
그리고 그는 버려진 내 자식이니
언제나 날 존중하라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

<이시스 찬가>, 기원전 3~4세기경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 - P-1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잠깐 ‘옛날 옛적에‘ 는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줄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다. 어떻게 이러한 명백한 모순을 이제부터 들어갈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린 삶의 매 순간 한 발은 동화 속에, 또 한발은 나락 속에 담근 채 살아가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시작하도록하자! - P15

이튿날, 그녀는 정성을 다해 치장하고, 어머니가 개학날을 위해 특별히 맞춰준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학이 끝난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등교길에 나섰다. 하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애태우며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야 마리아는 소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아인 멀리 떠났어."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마리아는 어떤 것을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또한 ‘멀리‘라고 불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세상은넓고 그녀가 사는 도시는 깨알만큼 작다는 것. 마음에 드는 존재들은 결국에는 늘 떠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녀는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언젠가는 소년을 찾아 자기도 이곳을 떠나리라고.
그리고 아홉 주일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관습에 따라 금요일마다 영성체를 받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간구했다. 이 도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동안 그녀는 마음을 앓았고, 소년의 소식을 묻고 다녔다. 하지만 소년이 어디로 이사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깨달아갔다. 세상은 너무 넓고, 사랑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는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가 계시는 하늘나라는 너무나 멀어서 아이들의 소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라고.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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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빛을 손으로 막으며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금속 쐐기를 다시 내려가 리즈옆에 섰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검은 머리는 비를 막아주려는 듯 뺨을 덮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를,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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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고려의 선배들은 중원의 시세에 따라 수시로 황제국을 바꿨는데, 약 250년쯤 지난 17세기 전반 조선의 후배들은 왜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을까?
조선의 위정자들이 국력의 강약이나 존망보다 더 상위에 둔가치는 인륜에 기초한 의리였다. 주자학의 융성과 함께 조선에서 뿌리를 아주 깊게 내린 지존의 가치, 곧 명과 조선을 군부·신자 관계로 보는 인식이 17세기에 매우 확고하였다.
조선인의 중화 인식은 핵심이 사대事大ㅎ였다. 문자 그대로 큰나라를 섬긴다는 뜻인데, 여기서 ‘대大‘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적잖이 달랐다. 한국사에 국한해 보아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대는 대개 강대국을 의미하였다. 고려 때 황제국을 수시로 바꾸면서도 이념적 고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중심은 중원인데, 어떤 북방 종족이 중원을 점령했다면 그것은 하늘이 그들에게 천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해석이 얼마든지가능하였다.
그런데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 말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의미가 사뭇 달라졌다. 흔히 중화의 요건으로는 공간(중원)·종족(한인)·문화(유교) 세 가지를 보는데, 고려에서는 종족 기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복왕조conquest dynasty의 시대였기에 한인이라는 종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고려의 상황만 복잡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화이관으로 무장한 주자학이 아직 나오지않았거나, 등장했더라도 아직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사정이 달랐다. 조빈의 주장에도 나오듯이, 조선 태조가 천조(명)를 치러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새 왕조를 세운 일은 존왕尊王의 실천이었다. 또한 지금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 몰린 상태임에도 척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명을 단순히 강대국으로만 간주한게 아니라 유교적 중화 문명을 담지한 천자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곧 군사력의 강약을 초월하여 문명론 차원에서 중화를 인식한 결과였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의리라는 국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당시 양반 지배층이 골몰한 고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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