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진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아내와 함께 사찰에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가족의 증인에 따르면 그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1977년 여름에는 양산에 있는 통도사에 갔죠. 그때 삼소굴에서 칩거하며 참선 중인 경봉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님 "뭐하는 사람인고?"
욱진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스님 "노래하는 새하고 웃는 꽃을 그리는가? 그거 못 그리면 붓대 꺾어."
욱진 "저는 까치를 그립니다."
스님 (욱진의 그림을 본 후) "애 봐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우주가 있네. 절에 들어왔으면 딱 좋았을 텐데."
욱진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

욱진의 수행법, 그것은 ‘그림 그리기‘ 였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그림을 그리며 도를 닦은 것이죠.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도 닦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아의 발견과 발현‘입니다. 즉, 자기 본연의 모습을 발견‘(자아의 발견)해 그에 따라 온전히 살며, 그림에 온전히 반영 (자아의 발현)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욱진이 정의하는 도 닦기입니다.
- P199

좋은 반찬은 바로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의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이는 촌사람의 제일가는 즐거움 중의 즐거움 비록 허리에 말(斗)만큼 큰 황금 도장을 차고,
음식을 사방 열자 되는 상에 차려놓고수백 명 여인이 시중을 들어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고농을 위해 쓰다.
나이 일흔하나에.
- 김정희, 대팽고회大烹高會) - P218

스스로 노력해 경제적 풍요를 획득한 민중은 과거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한글을 깨친 민중들이 <홍길동전>, <춘향전> 등 소설을읽으며 사회의 폐단을 비판합니다. 시장에 들러 장을 본 뒤에는 판소리와 탈춤공연을 보며 깔깔댔고, 귀갓길에 그림 한 장을 사 들고 와 집 벽에 붙였죠. 그 그림이 바로 민화입니다. 보통 정규 미술 훈련을 받지 않은 무명 화가들이 슥슥 그려 팔았고, 소비자인 민중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화풍을 택했죠. 호랑이, 까치, 꽃, 문자, 책거리 등을 그리며 액운을 쫓고, 출세를 하고, 재물을 얻고, 천수를 누리는 등 주술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기술과 규범을 중시했던 양반사회의 서화와 달리 민화에서는 어떤 규칙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조선 민중의 내면에 있는자유분방함, 천진난만함, 익살과 해학, 진한 원색의 선호 등 고유의 정서가 민화에 고스란히 담기게 되죠.
이런 민화 특유의 미학에 욱진은 매료되었습니다. 욱진의 그림에서는 양반의산수화와 서민의 민화가 오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조선의 미학은 이렇게 욱진의 그림에 한데 섞이며 하나가 된 것입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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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격동의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나요? 어떤 이는 전통 동양화를 고수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서양화로 전향할 것입니다. 대부분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죠. 그러나 응노는 그 두 가지 길을 모두 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모두들 서양화만을 그린다면 동양화는 대체 어떻게될 것인가 하는."

그는 동양화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전통 동양화가 아닙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미지의 길을 선택합니다. (사실상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길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죠.
동양화로는 이미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응노, 그렇기에 이제 그가할 일은 서양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른두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 P114

‘새로운 가치 창조‘, 그가 믿은 예술가의 사명은 이렇게 ‘문자추상‘
으로 귀결됩니다. 그가 동양의 산물인 서예를 서양의 20세기 산물인 추상화에 짬뽕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생각 때문입니다.
"서양의 추상화의 시조는 바로 동양의 서예정신, 곧 글씨 예술이지요. ‘그런데 동양 사람들은 서양 것만 좋아하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온 것은 너무 무시하고 있어요." 
정말 기막힌 통찰입니다. 동양에서 기원전부터 나타난 한자와 그것을 쓰는 서예, 여기에는 서양에서 20세기에 와서야 나타난 추상화의속성이 이미 담겨 있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것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자는 ‘자연물의 모양을 따서 만든 상형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서 표현한 표음문자, 표의문자‘로 이루어져 있죠. 이것은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등 20세기 추상미술 선구자들이 추상화를 창안했던 원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그는 서양의 20세기 추상미술의 흐름 위에 ‘원조 추상화‘인 서예를 올려 동서양의 비빔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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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평등은 수학적 혹은 기하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학과 관련된 개념이며,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입니다. 양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질적으로는 불평등한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리하되 평등하게‘ 라는 원직은 명백한 모순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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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 43년, 조선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던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군함을 얻어 타고난정에 들릅니다.
그 그곳에서 둘러본 바를 기록에 남겼으니.
금릉(난징) 대보은사탑!
높이 78.2미터(대략 아파트 23층 높이).
창과 기와, 모두 색유리로 제작.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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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나는 협상에 임하면서 우리가 요청하기만 하면 기득권자들은 특권을 포기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나는 1차 협상을 계기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누구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흑백분리제도의 숨겨진 목적은 단순히 흑인과 백인의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흑백분리제도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평등조치를 요구했는데도 ‘기득권자‘들은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흑백분리제도의 근본목적은 차별과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것이므로 흑백분리가 존속되는 한 정의와 평등의 쟁취는 불기능한 것이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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