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여사와 김 작가

여름 한 달 동안 프랑스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모든준비를 다 마쳤지만 딱 하나 정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나는 손 여사에게 언제나처럼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손 여사도 언제나처럼 ‘알았어‘
란 답을 보내왔다. - P7

나를 안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 여사의 얼굴이떠오른다. 물론 내 기억은 아니다.
손 여사가 어린 나를 안고 좋아하고 예뻐했다고 증언해준 사촌 오빠들의 말 때문에 갖게 된 이미지다. 나는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아기 때의 나를 떠올릴 때면 행복이 충만한 얼굴을 한 손 여사와 방긋 웃는 민머리 아기인내가 그려진다.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내가 가공한 이미지를, 내 상상을, 기억처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상상이 기억을 이기기 마련이니까. - P15

나는 지금도 비척비척 싸움에 밀리던 아버지의 뒷걸음질을 배를 문지르며 악을 쓰던 손 여사의 발그레한얼굴을 기억한다.
몇 번을 떠올려도 너무 슬픈 기억이다.
싸움의 기억이라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남자를 알게 되고,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많은 책임과 가책을 함께하는 것인지, 도저히 말로는 옮겨지지 못할 많은 감정들이 쏟아지고 쏟아져, 깨지고 상하고, 문드러지고 휘발되어버리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사랑을 나누는 것이 두렵기도하다. 사랑을 믿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P38

 내가 언젠가는 눈꼬리 값을 꼭 할 거라고. 그 말은 ‘너를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손 여사는 언니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했다. 두 언니들을 키우면서 조금씩 관대해진 것도 있었지만, 특히 나에게 관대했다.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들을 존중해줬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고 하기 싫은 것을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자라는 동안 내내 손 여사 부부는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는 것은 손여사 부부가 내게 보내주는 믿음,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믿음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매번 원하는 만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신경 쓰려고 한다. 믿어주고 기억해주면 학생들은 마음을 열었다. 언제나 믿음에 화답을 해줬다.
한 명의 어른만 있어도 아이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 P56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숨 쉬고 싶었다.
그래서 내 속의 우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잦아들 때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시작했다. 글이라는 건,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멋진 도구였다. 나는 점점 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고, 그 문제 안에 있던 보수적인 손 여사와 나의 관계도 직시하게 되었다.
쉽게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면의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첫 문장은 ‘미안해‘였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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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주택 주소는 ‘거북로 12길 19(거북동)‘이다. 거북역3번 출구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다. 대지 면적은 72.5평 필로티 구조의 4층 건물이다.
201호, 301호, 401호는 14평이다. 202호, 302호, 402호는25평이고, 1층엔 12평짜리 상가가 하나 있다. 나머지 1층 공간은 주차장이다. 옥상엔 전망이 좋은 옥탑방이 있다. 통창으로 옥상 정원을 볼 수 있는데, 정원은 꽤 훌륭하다. 옥탑방엔 입주자가 없다. 입주민 공용 공간이다. - P9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아?"
"아니, 나쁜 의미로 땅에 떨어진 게 아니라…."
나는 순례 씨가 오해하지 않도록 ‘땅에 닿은 느낌‘을 설명했다. 절망보다는 편안함에 가까운 그것에 대해. 어렸을 땐순례 주택에만 오면 편안했다. 몸과 마음에 모든 긴장을 풀고 지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어렴풋이, 내가 아파트에서 누리는 것들-산이 보이는 넓고 환한 집, 내방, 좋은 음식, 학원 등등에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이녹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할머니와 고모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며 사는 것도 할아버지 지친 모습을 보는 게문득문득 불편해졌다. 내 방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거북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다. 15층만큼이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 P52

 추락하는 중에 치명상을 입지만 않는다면 곧 땅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땅바닥에 닿은 느낌이구나. 나쁘지 않아."
순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글쎄."
막연했다. 순례 씨, 길동 씨 부부, 박사님, 원장님, 2학년담임쌤......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은 금세 꼽을 수 있지만.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 씨 생각 동의"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 P53

"걱정 마. 내줄 공간이 있어서 다행이야. 감사해."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 한다. 1군들에게선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 P99

"야, 오민택, 한 번만 더 양말 아무 데나 벗어 놓으면, 나이제 빨래 안 해!"
"어, 너 지금 반말하니?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잊었어?"
오미림이 삐죽삐죽 울었다. 그렇게 싸우면 자기 정서가 불안해져서 공부가 안 된다고. 그래도 싸움은 잦아들지 않았다. 신선했다. 타인이 아닌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우리 집의 낯선 불화가, 십육 년을 헤매다 찾은 줄자끄트머리처럼, 나는 눈물 나게 반가웠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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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종대는 자신의 생명은 마지막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더이상 피할 길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안다.
종대가 피비린내나는 방 안에서 홀로 앉아 있음을 절대로 울고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절대로 울어본 적이 없었다. 눈물을 흘려야 할 경우에도 그는 차라리 차갑게 웃곤 했다.
종대는 피비린내나는 방 안에서 혼자 성우처럼 가족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경찰이 짐작했던 대로 종대는 자기의가족이 마지막 방패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수로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의 총구가 자기를 향해 터지지 않는 것은 자기의 가족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제 가족들의 흉내를 냄으로써 생명을 벌려고, 혹은 이 최후의 경우에도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죽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 순간을 잡으려 하고 있을것이다. 그는 긴박하게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가진 것,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소유한 자신만의 것.
그것은 그가 낳은 핏덩어리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가진 것과의 이별을 스스로의 힘으로 차례차례 정리하고 싶은 욕망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가 누구보다 흉내의 천재임을 알고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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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매년 독감 백신 접종 운동을 벌이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계절성 사망은 피할 수 없고, 세계적 팬데믹이 있을 때마다 고연령층의 생존은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자초한 위험, 즉 더 길어진 기대 수명을 향유하게 된 성공의 이면이다. 결국 가장 취약한 계층을 격리하고, 더 나은 백신을개발함으로써 죽음을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근절하는것은 불가능하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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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꿈이었을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악몽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늘 깨고 보면 잊어버리는 일상의 꿈일 뿐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이것이 분명 꿈이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건 어차피 꿈이니 마음 편하게 먹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심장이 뛰고 필사적으로 짓누르는 꿈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몸을 비틀었다.
깨야지. 깨어야지.
그는 또 알고 있었다.
이러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며 드디어는 옆에서 잠든 아내가 그를 깨우리라는 것을.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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