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 주소는 ‘거북로 12길 19(거북동)‘이다. 거북역3번 출구에서 도보로 오분 거리다. 대지 면적은 72.5평 필로티 구조의 4층 건물이다. 201호, 301호, 401호는 14평이다. 202호, 302호, 402호는25평이고, 1층엔 12평짜리 상가가 하나 있다. 나머지 1층 공간은 주차장이다. 옥상엔 전망이 좋은 옥탑방이 있다. 통창으로 옥상 정원을 볼 수 있는데, 정원은 꽤 훌륭하다. 옥탑방엔 입주자가 없다. 입주민 공용 공간이다. - P9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아?" "아니, 나쁜 의미로 땅에 떨어진 게 아니라…." 나는 순례 씨가 오해하지 않도록 ‘땅에 닿은 느낌‘을 설명했다. 절망보다는 편안함에 가까운 그것에 대해. 어렸을 땐순례 주택에만 오면 편안했다. 몸과 마음에 모든 긴장을 풀고 지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어렴풋이, 내가 아파트에서 누리는 것들-산이 보이는 넓고 환한 집, 내방, 좋은 음식, 학원 등등에 할아버지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이녹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친할머니와 고모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며 사는 것도 할아버지 지친 모습을 보는 게문득문득 불편해졌다. 내 방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거북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었다. 15층만큼이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 P52
추락하는 중에 치명상을 입지만 않는다면 곧 땅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땅바닥에 닿은 느낌이구나. 나쁘지 않아." 순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글쎄." 막연했다. 순례 씨, 길동 씨 부부, 박사님, 원장님, 2학년담임쌤......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은 금세 꼽을 수 있지만.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 씨 생각 동의"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들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 P53
"걱정 마. 내줄 공간이 있어서 다행이야. 감사해."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 한다. 1군들에게선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 P99
"야, 오민택, 한 번만 더 양말 아무 데나 벗어 놓으면, 나이제 빨래 안 해!" "어, 너 지금 반말하니?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잊었어?" 오미림이 삐죽삐죽 울었다. 그렇게 싸우면 자기 정서가 불안해져서 공부가 안 된다고. 그래도 싸움은 잦아들지 않았다. 신선했다. 타인이 아닌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우리 집의 낯선 불화가, 십육 년을 헤매다 찾은 줄자끄트머리처럼, 나는 눈물 나게 반가웠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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