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없을까.
한 점. 딱 한 점만 보고 걷는 것이다. 나도 이쪽에서 딱 한 점만 보며 걸을 것이다. 그쪽의 당신도 그렇게 와주었으면 한다. - P168

문장이 가지고 있는 주술적 힘. 아플 것이라고 쓰면 정말로 아프게 되고, 일어날 것이라고 쓰면 정말 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또 한번 배운다. 앞으로 올 시간과 지금 이 시간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것도. 그러니 이런 발상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와 현재의 결과로서 미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성실하게 나아가고 발전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지만, 미래는 이미 완성형으로 존재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완성된 미래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처럼, 폭죽처럼 펑! 우리 앞에 끼어드는 것일지도. - P194

그런 의미에서 ‘밀코메다(Milkomeda)‘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상상적 현실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현재 우리 은하의 이름은 ‘밀키웨이(Milky Way)‘인데, 약 40억 년 뒤엔 안드로메다와 충돌해 새로운 은하가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새 은하의 이름이 (밀키웨이와 안드로메다의 합성어인) 밀코메다라고. 40억 년이라니, 겨우 열 개뿐인 인간의 손가락으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먼 시간에게도 이름이 있다. 내일, 한 달뒤, 1년 뒤, 10년 뒤에게도 없는 이름이.
없음의 있음을 기약하며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시의 임무가 아닐까. 미래의 내가 어떤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복숭아나 마 아닌 무엇이 언제 또 나의 손을 부풀게 할지 알 길 없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왔기 때문에 마를 만질 땐 꼭 장갑을 끼는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오늘 쓸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 P196

 경상북도 봉화에 위치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지구상에 단 둘뿐인 시드볼트 중 한 곳이다. ‘새로운 노아의 방주‘ ‘미래 인류의 씨앗 저장고‘ 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시드볼트는말 그대로 시드(seed, 씨앗)를 저장해두는 볼트(vault, 금고)다. 기후변화나 핵전쟁 등 지구 차원의 대재난에대비해 식물의 멸종을 막고자 마련된 공간이다. 시드볼트와 유사한 기관으로는 시드뱅크(seed bank)가있는데, 시드뱅크는 그때그때 필요한 씨앗을 꺼내쓸 용도로 마련된 공간이며 그 수도 현저히 많다고한다(전 세계에 1500곳 정도). 반면 시드볼트는 절대로열려서는 안 되는 장소다. 시드볼트가 열렸다는 것은 곧 그 종의 멸종을 의미한다. 즉, 시드볼트는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예비된 장소다. 종말의순간에야 비로소 열리는 문. 완전히 파괴된,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삶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유일무이의 수단.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문학이라는 두 글자가 겹쳐졌다. - P232

글쓰기는 나무 패는 일을 닮았다. 뭔가를 쓰고자 마음먹을 때를 떠올려보라. 처음 생각은 통나무에 가까울 것이다. 그 통나무는 분명 생각의 모태지만 땔감으로 바로 쓸 수는 없다. 땔감이 되려면 우선 통나무를 톱으로 잘라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여러 번의 도끼질로 쪼개 장작으로만들어야 한다. 아궁이에 들어갈 만한, 불이 잘 붙을만한 형식을 갖춰야 한다. 도끼질이 서툴고 능숙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가진 힘과 믿음의 세기로 내려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언제나 ‘모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탕은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놓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모탕이 있기에 우리의 글쓰기는토대를 얻는다. 안정감과 탄력을 얻는다. 결국 모탕은 ‘좋은 질문‘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처음 질문을떠올려보자.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 이 문장은 너무나 좋은 모탕이다. 잠들어있던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진동케 하는 모탕이다.
자, 이제부터는 당신 차례다. 당신은 이 모탕 위에서 어떤 문장(땔감)을 획득할 것인가. - P239

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불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끝!‘이라 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은 이제 없다. 살아 있는 한 끝은 영원히 유예된다.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 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고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 P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맡은 바 임무에 능력의 최대치를 쏟아부어 잘해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남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_RBG, 2015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법 제34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제5항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여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고 있어, 결국 우리 헌법은 자유 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하면서 사회국가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다(헌법재판소2001.2.22.99헌마365 결정, 1998.5.28. 96헌가 결정)."

이처럼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평등‘
을 ‘실질적 평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질적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즉 차이에 대한 존중이 평등의 본질임을 밝힌다. 차이에 대한 존중이란 인간다운 생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국민의 삶을 일정 수준 이상이 될 수있도록 보장하고, 신체적 능력 등 기타의 사유로 상대적 기회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 P146

한국 사회는 다른 국가와 달리 유독 타인의 욕망이 개인의 삶을 지배한다. 타인의 욕망이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혹은 "남보다 뒤처지지않은 삶을 살아야 돼"라는 말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을 곱씹어보면, 기본적으로 내 삶의주체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떻게 저렇게 되지? 나는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와 같이 타인의 기준과 욕망에 삶의 조건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P174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국민에게 규율과 원칙이 힘 있는자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는 빠른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그것을 이룬 방식 자체가 원리원칙보다는 국가나 기업,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는 정치인과 같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행해져온 것이다. 그렇기에경제 성장과는 별도로, 국민은 높아진 삶의 질을 누리기보다 결국 ‘힘 있는 자가 되어 성공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고 이는 언제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삶에 자신을 위치시키도록 만들었다. - P181

왜 우리는 이렇게 혐오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배제하고 미워하는 것일까. 나는 그이유가 ‘불안‘에 있다고 본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가면서 사실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불안한 마음은 비교적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마음으로뒤바뀐다.
앞서 한국 사회는 원칙과 책임을 중시하기보다 성장과발전, 결과와 물질이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가진 자에 대한 지나친 사회적 인정과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강한 멸시가 동시에 존재한다. 또 가진 자를 질투하고 선망하는 태도가 만연하다. 실패에 허덕이는 사람 앞에서 위로하거나 격려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키워갈 수밖에 없다.
살면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한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실패를 어떻게 잘 극복하고 겪어내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실패에 대해서 관용적이지 않다. 무언가 실패하면 그 사람에게 다른 기회가 주어지기 어렵다. 입시에 실패했다고 해서 혹은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P198

어째서 한국 사회는 이토록 질투와 혐오의 문화가 만연한 것일까. 질투와 혐오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집단 간의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무엇이 옳고 우월하다는 관점이 너무나 분명하고 고정적으로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 경제적측면에서 더 많은 부가 더 많은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더 높은 지위가 더 큰 성공이라고 바라보지 않는가. 더 좋은 성적이 훌륭한 학생임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P203

한국 사회에는 좀 더 다양한 삶의 가치가 등장해야 하고, 그에 대한 관용의 문화가 필요하다. 실패의 경험, 다른방식의 삶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제도적으로는 생애 단계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을 지지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낙인을 찍는 문화는 결국 분노를 형성하게 되고 이는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진다. 다른 기회, 실패를 통한 성장 등 우리 사회에 삶에 대한 믿음이 전반적으로 생긴다면 자신의 분노감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폭력적인 태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게 가시손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존재론적슬픔을 함의한 광막한 단어다. 문득 가시손의 반대말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들의 총합이듯이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들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한평생 파괴지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것이고 호기심 가득한 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 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엔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 P121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피곤해서도 지고 귀찮아서도 지고 허무해서도 지고 우울해서도 진다.
그날따라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지고,
하필 우산을 두고 온 날 소나기가 내려서도 지고,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나 하는 우산을 샀는데 비가 홀랑 그쳐 씩씩거리며 또 진다. 텀블러 뚜껑이 제대로안 닫혀 가방 안이 홍수가 되어서도 지고, 눈앞에서 버스를 놓쳐서도 지고, 주차장 구석에서 들려오는고양이 울음소리가 구슬퍼서도 진다. 변해서 슬픈이유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 P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력벽은 건물의 하중을 부담하는 구조체를 말한다.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에도 내력벽은 함부로 구조 변경을 하거나 허물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철거할 수 없는 벽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집이라면 그 집을 짓기 위해 설계된 내력벽이 있을것이다. 우리가 공평히 나누어 가진 부재의 기억 같은. 신의 입장에선 당연한 설계일지 몰라도 인간의관점에선 피하고 싶은 불운이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내력벽이라는 건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인 셈이니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겠다.
팔을 들어 슬픔을 받치고 선 모양. 나란한 두 개의 기둥.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다. 그러니 팔이 아프면 조금 꾀를 부려도 좋아. 오늘은 나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당분간은 내가 받치고 있을게. 손으로 안 되면 발로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그러니까 다녀와.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숲길도 걷다 와, 기다릴게.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