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왜 주드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않았는지, 왜 주드에게 그럴때 어떤 기분인지 말해보라고 하지 않았는지, 왜 본능이 시키는대로 감히 행동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냥 옆에 앉아 다리를 문질러주고, 멋대로 어긋나는 신경말단을 주물러 가라앉히려 해보지 않았을까. 대신 그는 여기 욕실에 숨어 바쁜 체하고 있다. 가장 소중한 친구 하나가 바로 저기 지저분한 소파에 철저히 홀로 앉아 산 자들의 땅으로 돌아오기위한, 의식을 되찾기 위한 느리고 슬프고 고독한 여행을 하고있는데 말이다.
- P37

이런 평일 저녁의 지하철 여행에서 그가 또 좋아하는 것은 빛이었다. 지하철이 덜커덩거리며 다리를 건너가고 있으면, 빛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차량을 가득 채우고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피로를 씻어내고 그들이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의 얼굴,
미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젊은 시절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그런 빛이 시럽처럼 차량 안으로 퍼져나가면서 깊게 팬 이마의 주름을 지우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번쩍거리는 싸구려 옷감의 광택을 매끄럽고 은은하게어루만지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열차가 무심하게 덜커덩거리며 멀어져가면, 세상은 다시 평소의 슬픈 모양과 색깔로, 사람들은 평소의 슬픈 얼굴로 돌아왔다. 마치 마법사가 지팡이로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잔인하고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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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로 본 아파트는 벽장은 하나뿐이었지만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조그만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니 10월인데도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바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가 길 건너편에 보였다. 윌럼이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남자는 인사하지 않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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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필드는 언제나 이러한 관점에서 의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신발작은 의식의 흐름(혹은 의식된 현실) 가운데 일부분을 포착해서 경련을 통해 그것을 재생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C부인의 사례에서 특히 감동적인 것은, 간질을 통해 일어난 <회상>이 그녀의 의식에도 없었던 것을 꺼내어 경련을 통해 완전한 기억으로 되살렸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그녀는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거나 아니면 어떤 억압으로 인해 의식에 새겨질 수도 없었던 지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을 되살릴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생리학적으로는 문이 닫혔을지라도, 환자의 경험 그 자체는 잊혀진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인상으로 남아 치유 효과를 지닌 의미 있는 경험으로 느껴진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한다. 뇌졸중에서 회복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발작이 일어나서 행복했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자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떠올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있었다는 것만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만족스럽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답니다."
- P245

"바가완디 양,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죽어가고 있어요. 전 고향으로 가고 있어요. 제가 왔던 곳으로돌아가는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게 귀향일지도 모르죠."
한 주가 지나자 바가완디는 이제 더이상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눈을감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연하게 띠고 있었다. 한직원이 말했다.
"바가완디 양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곧 거기에 도착할거예요."
사흘 후, 그녀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인도로 가는 여행을 이제 막 끝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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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바빌로니아를 떠날 것이다. 비엔나 여행에서처럼 그곳에도 미미나 유디트같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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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돌의 효과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법이다.처음에만 해도 그것은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병리학적으로 볼 때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투렛 증후군을 치료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고경제적으로도 불가능했다. 4세 때부터 투렛 증세로 고생한 레이는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한 생활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특이한 병에 심하게 의존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 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해온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병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철저한 분석과 고찰을 시도한 3개월간의 집중적인 준비 기간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 병과 결별할 각오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74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큐피드와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다.
- P187

그는 어떤 일이든지 몇 초만 지나면 잊어버렸다. 그의 착각에는 끝이 없었다. 그의 발밑에서는 기억상실이라는 심연이 언제나 입을 벌린 채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온갖 거짓 혹은 가짜 이야기를능숙하게 지어내면서 그 심연에 다리를 놓아 한시바삐 건너가려 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순간적으로 목격한 세계 혹은 그렇게 느껴진 세계였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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