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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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자 눈까지 내렸어. 그리고 꽤 오랫동안 포성이 멎었지. 우리는 참호 바깥에 누워 있는 부상자 수천 명의 비명을 듣고 있었는데,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네. 어쨌거나 그건 고통에 겨워 내는 소리였지.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람을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그 소리는 커다랗게 용솟음치는 밀물처럼 우리 몸 위로 사정없이 밀려왔어. 그 와중에 눈꽃이 떨어졌지만, 하늘이 너무 어두워 눈으로 볼수는 없었지. 그저 몸이 얼었다 축축해졌다 하고, 또 손 위에 보드라운 솜조각 같은 게 앉았다가 천천히 녹아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꺼운 눈꽃 층이 쌓이는 걸 느낄 뿐이었다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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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쁨과 즐거움 같은 여가의 산물은 근대 대도시의 사회를 세련되게 다듬는 데 보탬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17세기 말엽부터 영국의 도시 문화는 점점 ‘공손함‘과 ‘예의‘ 라는 요소가 지배하게되었다. 공적 ·사적 공간에서의 처신법에 관한 조언이 담긴 수백 종의 품행 지침서들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올바른 예절과 정중한 행실에관한 전통적 관념은 왕실과 귀족의 대저택에서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커피점이 유행할 무렵, 예의는 전혀 다른 모종의 요소와 연관되기에 이르렀다. 도시 생활을 통해 생겨난 예절이 케케묵고 융통성 없는,
옛 시절의 궁정 문화를 밀어내고 있었다. 학술적 논의와 정치 토론과사업이 대학과 의회, 동업조합이라는 폐쇄적 세계에서 벗어나 커피점같은 열린 무대로 나왔듯이, 문화와 예술 활동도 차츰 상품화 과정을 밟고 공공 영역에 등장하고 있었다. 공손함과 예의는 근대 특유의 도시적인 요소였다. 런던에는 사람들이 세련미를 더 많이 갖출 수 있는 사교의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도시 생활은 예의를 통해 더 원활해졌다. 예의가 혼잡한 도시 환경에둘러싸인 낯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돕는 윤활유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 P335

 궁정에서 대도시로 무게추가 이동하는 현상은 17세기 후반기의 커피점을 통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커피점은 18세기 도시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교적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18세기 도시들은 소비자인 시민들이 문화와 유행을 만드는 곳, 여가와 쇼핑이 도시 체험의 핵심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극장과 오페라 극장, 카페와 식당, 박물관과 미술관 등은 모두 근대적 도시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P352

 19세기에 런던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기차, 말이 끄는합승차, 노면 전차, 지하철 덕택에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멀리 떨어진곳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런던이 교외로 확장되자 인구가 채 100만명이 되지 않고 걸어 다닐 만했던 18세기의 매력적이고 흥겨웠던 도시는 사라지고 말았다.
커피점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자 친목적인 분위기가 퇴색하고 사교·문학·과학·사업 분야에서 배타성이 짙어졌다. 공공장소에서 사교가 차지했던 자리에 분할화와 제도화, 교외화가 밀치고 들어왔다.
커피점이 사라졌을 때 런던은 세계 최강의 도시이자 상업 대도시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헨리 제임스가 19세기 말엽에썼듯이 런던은 강렬한 상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파리의 카페에서 감도는 경박함과 흥겨움은 영리에 민감하고 계급을 의식하는 제국의 대도시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세상이 변해 있었다.
- P354

 영국 농촌 지역의 경우 전체유아의 32퍼센트가 생후 5년에 이르기 전에 사망했고, 기대수명이 약40세였다. 한편 맨체스터와 시카고의 경우에는 생후 5년 전의 유아사망률이 60퍼센트였고, 기대수명이 26세에 불과했다. 런던과 버밍엄Birmingham 의 기대수명은 37세였다. 19세기 중반의 산업도시들보다.
사망률이 높은 곳은 없었다. 183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한 아시아 콜레라가 시카고의 빈민가를 덮쳤다. 1854년, 연거푸 6년 동안그 전염병이 창궐한 끝에 시카고 인구의 6퍼센트가 사망했다.
이런 상황이 산업시대의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도시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맨체스터의 어느 신문 기사에 나왔듯이, 도시의상업 중심지가 모든 교양 있는 주민들을 위협하는, 추잡함과 불결함의 거대한 돌림띠에 에워싸여 있는 바람에 빈민가에 포위된 작은 섬으로 전락했다. 최하층민들이 유발하는 오염으로 인한 공포 때문에 중산층 가정들은 교외로 이주했다. 노동계급 인구가 폭증하자 빈민가가 교외로 침범했고, 중산층 가정은 또다시 더 멀리 떨어진 시골 비슷한 곳으로 탈출했다.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교외‘는 대체로 도시에서 가장 열악한 구역을 연상시키는 단어였었다. 즉, 교외는 폐기물과 쓰레기 그리고 유독성 물질을 모아둔 하치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교외는 피난처였다. - P368

맨체스터 같은 도시가 상업 중심지,컴컴한 빈민가, 중산층이 모여 사는 교외 등으로 나뉘는 공간적 분리현상은,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간의 좁힐 수 없는 심연뿐 아니라 향후계급 간 폭력 투쟁을 품게 될 도시 풍경에 뚜렷이 새겨진 물리적 증거였다. 엥겔스가 썼듯이, 시카고와 맨체스터 같은 거대한 검댕투성이에서 발달한 근대적 도시 생활은 "무산계급을 나름의 생활 방식과 생각,
특유의 사회적 전망을 지닌 탄탄한 집단으로 결속시키는 데" 보탬이되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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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태평양太平洋 거대한 평온이라이름 붙은 대양. 고래들이 싸돌아다니려면이 정도 스케일의 바다는 필요한 것.
억 년이 가도록고래들은 이 바다 이름의 평平 자를 누려 나가리니.
- P10

포경산업은 19세기 미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산업혁명을 맞아 각종 기계와 소명에 필요한 기름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석유산업은 아직 그 포텐이 터지기 전이었습니다. 가축과 작물을 삶아 짜서 만드는 기름으로는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죠. 그 상황에서 거대한 몸뚱이를 지방으로 풍만하게 채운 고래는 그야말로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노다지였습니다. 19세기 전반, 미국 경제는 그 기름을 유유 삼아 매끄럽게 성장해온 것입니다. 기름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부와 더불어, 포경선 건조를 위한 조선산업이 크게 향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만드는 데 온갖 자재와 부품, 인력이 동원되는 거대한 배는 관련 제조업 전반에 즐거운 파급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이는 미국 동북부의 공업 성장에도 큰 역할을 하죠.
북부 주들이 이처럼 고래기름으로 기름진 배를 두드릴 때, 남부 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과 함께 기름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열심히 수확한 면화의 씨앗에서 짜낸 면실유가 식용유 시장을 석권해나간 것입니다. 흑인들의 고단한 삶에 작은 낙이 되어준 프라이드치킨은 고래기름이 아닌 면실유로 튀겨낸 치킨이죠. 영국의 피시&칩스 같은 튀김 요리도 이 시기에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던기름 대량생산은 고칼로리를 저령하게 제공함으로써 산업혁명시대에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19세기의 산업혁명 포텐 폭발은 석탄과 철의 대량생산뿐 아니라, 이와 같은 기름의 대량생산도 그 기둥의하나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고래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 중에 산업혁명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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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노치티틀란의 직교형 지면 구획과 주요 거리, 건물의 방향은 항성과 행성의 운동이 반영된 우주론적 지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호수 안의 그 섬 도시는우주의 축소판이었다. "모든 우주적 질서의 근원이자 중심, 핵심이었다." 완벽한 도시로 설계된, 테노치티틀란은 광대한 제국의 영적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권력은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져나갔다.
도시계획가들은 최소한 테노치티틀란 도심 구역의 거룩한 대칭성을 유지해야 했다. 테노치티틀란은 마치 정교한 농업에 힘입어 식량을 확보하고 기다란 송수로를 통해 산악지대로부터 깨끗한 물이 공급되는 기계와 같았다. 4개의 웅장한 대로는 수많은 일꾼들이 깨끗이 관리했다.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분뇨가 처리되는 공중변소를 이용할수 있었고, 분뇨는 가죽을 무두질할 때 섞는 재료나 수경재배장인 치남파에 뿌리는 거름으로 쓰였다. 악취를 풍기는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테노치티틀란은 기술체계와 위생이 매우 앞서 있었다.
- P306

중앙아메리카의 세련된 도시 체계는 유럽인들이 나타나면서 치명상을 입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고 나서 천연두가 퍼지자 테노치티틀란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1521년, 코르테스가 군대와 최신 공성용 무기, 조선공들과 함께 돌아왔다. 테노치티틀란은 75일 동안 버텼다. 10여 년 전의 믈라카처럼 테노치티틀란에서도 잔인무도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코르테스는 주택과 건물을 하나씩 부수는 방식으로 전진한 끝에 결국 테노치티틀란을 장악했다. 그는 도시계획가인 알론소 가르시아 브라보 Alonso Garcia Bravo를 시켜 중앙아메리카 최후의 대도시의 폐허 위에 유럽식 도시를 건설했고, 훗날 그 도시는 멕시코시티가 되었다.
- P304

 다른 나라들과 명백한대조를 이룬 네덜란드는 각기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특정 종교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나라였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이주자들에게 개방적이었다. 그 도시들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비율이 유달리 높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서점이있었고, 암스테르담은 북유럽 출판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시민권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상거래의 자유에 힘입어 네덜란드..
그리고 특히 암스테르담은 자유사상가와 반체제인사, 기업가들에게무척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온갖 급진적 사상의 용광로였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들은 잉글랜드에서 출판이 금지된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저서와 갈릴레오, 스피노자, 데카르트 등의 저서같은 당대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들을 연거푸 내놓았다.
••••••
혁신적 사고는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전쟁과 박해를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온 사람들에게는 나름의빼어난 기능과 국제적 인맥이 있었다. 
- P308

그때까지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도시 건설을 촉진하는 세계 최강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아시아의 자원과 물산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반, 암스테르담이 상품의 흐름을 통해 거대한 괴물로 변모했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망명자들은 많은 양의 자본뿐 아니라 안트베르펜에서 최초로 고안된 정교한 금융기법도 가지고 있었다.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 외환은행 Amsterdamsche Wisselbank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수표 체계, 자동이체, 계좌 간 이제 같은 여러 가지 은행업 방식을 고안했다. 암스테르담 시청에 입주해 영업한 암스테르담외환은행은 공공기관이었고,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의 번영과 안정성, 재력 덕분에 신용을 쌓을 수 있었다.
기업과 은행은 현대 경제의 두 기둥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세 번째 기둥은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였다. 세계 최초의 주요 공개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이 발행되자 최초의 증권 시장이 생겼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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