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재미난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 및 토막

젊은 시절 나는 신문기자였다. 그래서 기삿거리를 찾아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애를 만났다. 그 애를 알고나서부터 ‘내가 만약 멕시코의 황제가 된다면?‘, ‘내가 만약 사라진다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공상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러고 나서 마감 때가 되면 얼렁뚱땅 꾸며낸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지어낸 이야기가 사람들이 좋아해 인기가 무척 높아졌다. 진짜 기사보다 훨씬 그럴 듯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 P7

"언제 불에 탔는데??
"여섯 달 전, 어느 날 밤 헛간에서 불이 나 집과 함께 과수원의 나무들까지 모두 타버렸어. 두 시간 후에는 벽만 남았어. 저기 보이지?"
나는 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벽이 붉게노을 진 하늘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럼 너는?"
내가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다른 것들처럼 다 타버렸어. 재만 남은 거야."
나는 전봇대에 기대어 서 있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며 물었다.
"내가 널 괴롭힌 건 아니니?"
"아니야... 괴롭히지 않았어."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어떠니?"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 너를 기다렸어.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여태껏 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제 가도 될까?" - P29

이해하시겠는가?
여자 얘기라면, 술집 여기저기에서 카드를 치거나 노래를 부를 때 나도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소녀가 있었다.
파브리콘으로 가는 길을 따라 서 있는 세 번째 전봇대에서매일 저녁 나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소녀가∙∙∙.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글쎄,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시퍼런 강물 위로 심장을두근거리게 하는 붉고 커다란 해가 저무는 뽀 강 유역 마을에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짧은 연애 이야기에 한번 결정하면 결코 뒤로 물러설줄 모르는 고집 센 뽀 강 사람들의 인생이 담겨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딱히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뽀 강 위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을 잠시라도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뽀 강 유역에는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두루두루 좋은 특별한 바람이 분다. 그곳에서는 개까지도 영혼을 가지고있다. - P30

돈 까밀로는 한숨을 지었다. 그는 머리 숙여 절하고 제단에서 물러났다. 성호경을 그으려고 제단 쪽으로 다시 돌아서니 빼뽀네의 등짝이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한창 기도에 몰두해 있었다.
"정 그러시다면…."
돈 까밀로는 두 손을 모은 채 예수님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손은 축복하라고 있는 것이지만 발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구나."
제단 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돈 까밀로, 부탁이다. 딱 한 번만 차라."
예수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돈 까밀로는 번개처럼 날아가 빼뽀네의 등짝을 걷어찼다. 빼뽀네는 제단 앞으로 발랑 나자빠졌다. 그런데 그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몸을 일으키며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10분째 이걸 기다리고 있었소. 나도 이제야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소이다."
빼뽀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그렇다."
돈 까밀로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마음도 맑게 갠 하늘처럼 후련하고 시원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도 속으로는 흡족해 하셨을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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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1~3월에 후금이 요동遼東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명과 조선의 육상교통로가 끊어졌다. 이에 따라 명과 후금 사이에서 한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조선을 옥죄었다. 눈치를 보거나 절충안으로 상황을 타개할 여지가 거의 사라지면서 논쟁은 극단적 대립을 거쳐 파경으로 치달았다. 이를테면, 광해군은 명 황제의 추가 징병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절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신료들은 그런 광해군의 왕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수시로 파업을일삼았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행보를 놓고 벌어진 이때의 논쟁 양상과 그 성격은 약 5년 후 정묘호란 이후로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처신을 두고 격렬하게 벌어진 척화斥和 대 주화主和로 논쟁의 예고편이자 판박이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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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1627) 때 조선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후금(1616~1636)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여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일이었다. 그러나 홍타이지 Hong Taiji(皇太極, 1592~1643)가 대청大淸을 천명한 뒤 새롭게 요구한 군신 관계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패륜 그 자체였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명)를 돕기 위해 자식(조선)이 바로 달려가기는커녕 아버지를 죽이려는 원수(청)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 것이 삼전도 항복 (1637)의 핵심 본질이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의 엘리트들은 삼전도 항복을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치부할 수 없었다. 국가의 수치 차원을 넘어,
소중화小中華라는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raison d‘étre (존재 이유)를 스스로 파기한 데 따른 이념적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조선왕조의 존망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적잖이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바로 중세적 ‘보편 문명‘, 곧 중화였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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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군신 관계(충)와 부자 관계(효)에는 근본적 차이가있었다. 군신 관계는 군주의 태도 여하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군주가 왕도를 떠나 악을 행하고 간쟁을 듣지 않으면 신하 스스로 군신관계를 끊고 떠날 수 있었다. 심지어 반정이나 역성혁명易姓革命도 가능했다. 곧 충은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였다. 이에 비해 부자 관계는 부모가 아무리 패악하더라도 자식으로서는 관계를 스스로 끊을 길이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는 없었다. 이렇게 효는 상상을 초월하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였다. 바로 이 점이 조선이 고려 때와 달리 황제(천자)를 바꾸는 데에 심각한 이념적 부담을 가진 이유였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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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중화의 요건으로 공간(중원). 종족(한인漢人)·문화(유교) 세 가지를 거론하는데, 고려 선배들은 종족 요인을 별로 개의치않았다. 중원의 패자가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굳이 종족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면, 종족과 무관하게 (한인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천명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인이 보기에 명은 단순히 강대국 차원을 넘어, 하-은-주-한-당-송-명으로 이어지는 유교적 중화문명의 주인공, 곧 중화문명국이자 천자국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종족 변수를 중시한 주자학적 화이관華夷觀이 매우 강고하였다. 그 결과 16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명·조선 관계의 본질을 이전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를 추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충忠과 효孝에 동시에 기초한 이른바 군부君父 신자臣子관계로 이념화한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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