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킹맨션의 보스‘인 카라마는 지금까지 낯선 젊은이들을포함해 수많은 사람을 돌봐줬다.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야 내가 청킹맨션의 보스이니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매사 귀찮아하는 성격의 카라마가 많은 젊은이를 돌봐줄 수 있었던 비결을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적당히‘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의 일상적인 상호 부조의 대부분은 ‘겸사겸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2017년 1월경 카라마와 동료들은불법 체류가 적발돼 3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되었다가 나온마바야를 돌봐줬다. 카라마는 마바야가 무일푼이 되었다는 걸 알아서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우연히 마주치면밥을 사줬다. 하지만 딱히 더 신경을 써서 밥 먹자고 부르지는 않았고, 마주치지 않으면 한턱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날 장사가 잘된 누군가가 우연히 그와 마주치곤 했기에 -그들이 식사를 하러 가는 레스토랑은 항상 똑같다- 마바야는 늘 식사를 했다. 상대가 안내해줬으면 하는 곳이 목적지로 가는 길 도중에 있다면 데려가고, 침대가 비어 있으면 머물게 해준다. 아는 일이라면 친절히 가르쳐주고, 겸사겸사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상담은 선선히 거절하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약속을 연락도 없이 어기며,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어이, 재패니즈!"하고 웃으면서 찾아온다. - P94

그들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해 앞선 이가 준종잇조각 하나를 ‘길 안내‘ 삼아 중국과 홍콩에서 장사를시작한 그들에게 ‘궁지에 빠진 경험‘을 물으면 다들 수없이 겪어본 인생의 위기를 들려준다. 그 위기들을 극복할수 있었던 것은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말했듯이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신념은 ‘동포에게 친절히 대해야한다‘는 기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 give and take의 기회를 발견해내는 각자의 ‘지혜‘에서 비롯한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카라마의 휴대폰에는 정부 고관이나 대기업 사장, 사기꾼, 도둑, 전과자까지 온갖 사람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과의네트워크는 ‘겸사겸사‘에 의해 구축되어왔다. 상대를 불문하고 돕는 까닭은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P95

이처럼 타자의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이나 의무와 책임도 불문한 채, 무수히확대 증식하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이 각자 ‘겸사겸사 할수 있는 일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은 부담 없는 ‘서로 돕기‘를 촉진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한 안전망 safety net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 ‘열린 호수성‘은 구성원 간의 신뢰와 호수성을 키움으로써 ‘선한 사회‘를 목적 지향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시민 사회 조직‘의 논리보다 ICT나 사물인터넷 IoT, AI등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의해 주목받게 된 공유경제나 공짜경제Freeconomics 사상과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의 조합을 승차공유서비스 우버나 숙소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 또는 불특정 다수 유저의 게시물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무료로 이용하는 여러 사이트 같은 ‘플랫폼‘
이라고 생각하면 논리가 통한다. 조합 활동은 이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구축한 SNS상의 경매 시스템이나 전자화폐가 오가는 크라우드 펀딩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 P96

"매일 이스마일을 만나러 가면 그는 나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이스마일이 화를 낸다고 그의 말에 따르는 태도를 보이면 나를 자기 직원처럼 취급하겠지. 나는 파키스탄인과 수년 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이건 예측이 아니라 사실이야. 만약 이스마일에게 고용되면 이스마일만 돈을 벌고 나는 그의 돈벌이를 위해일을 하게 돼. 우리 아프리카인이 홍콩의 업자들과 대등하게 비즈니스를 하려면 그들이 나를 그리워할 무렵에 가는게 딱 좋아."
카라마는 그들이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도록 때때로 달래줄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도 무릇 자신들을 대등하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루기 쉬운 인간‘이 되지 않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각이나 약속을 깨는 행동전부가 계산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은.
아프리카인 또는 불안정한 이민자/난민인 그들이 실질적으로는 힘에 차이가 있는 홍콩의 업자들과 대등한 관계를구축하기 위한 흥정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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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들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평가하는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부조의 기준 • 규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합 운영과 조합내 상호 부조 면에서, 엄밀한 기준과 약속에 의해 ‘서로 무리하거나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기를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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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늘 "아무도 믿지 않아"라고 단언한다.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
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카라마와 동료들은 "저사람은 지금 잘나가니까 돈을 빌려줘도 괜찮아", "저 사람은 지금 수입한 천연석 품질이 나빠서 크게 손해를 보고있으니까 조금 주의하는 게 좋아", "저 사람의 연인도 함께한다면 그는 좋은 녀석이니까 놀러가"라고 ‘지금‘의 상황에 한정하는 형태로만 타자를 평가한다. 언뜻 냉정하게도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관용과도 표리일체다.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自己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세 번째 배경은 난민으로 거주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유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오가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을 고려/계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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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홍콩조합 집회에서 한 여성이 발언했듯이 기본적으로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들의 생활사나 비즈니스에 대해 묻거나 들으면서 조사를 해왔는데, 대상자가 어떤 일을 태연히 설명해주더라도 주위사람들이 내게 "그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 놔둬"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라는 조언도 받곤했다. 타자의 복잡한 사정은 알 수 없는/알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타자의 ‘자기 책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두 번째 배경으로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간관 · 주체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기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불운‘의 영역인지를 묻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 이들은 애초에 개별적인 실천 · 행위의 귀결을 타인에 대한 인물 평가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이 안이하다‘,
‘별로 착하지 않다‘ 등 - 와 연결 지어 말하는 것 자체를거의 하지 않는다. 물론 사정을 아는 개개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사태가 되어 안타깝다고 말하긴 하지만, 완전히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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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조합원들의 조합 활동 공헌도에도 차이가 있다. 탄자니아 홍콩조합의 조합원들은 ‘법‘을 다소간 위반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마약을 판매하거나 절도와 성매매를 병행하는 사람인지 중개업을 하거나 의류, 전자제품등의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인지에 따라 ‘교도소와의 거리‘, 또는 일어나는 문제의 성격이나 빈도에 차이가 있다.
한편 종교적인 신앙 때문인지, 개인의 신조인지, 아니면냉정하게 위험 부담을 계산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밀수는 하지만 마약에는 손대지 않는다‘, ‘성매매를 하지만절도는 하지 않는다‘라고 굳게 결심한 사람도 많다. 이들은 ‘범죄‘에 손을 댄 동포를 부정/거부하지는 않는다. 범죄로 벌어들인 큰돈을 펑펑 쓰는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으면 역시 좋아하면서 참가한다. 하지만 내가 짊어지지않기로 한, 타자의 리스크를 지게 된다.
호수성을 기반으로 조합이 운영된다고 가정했을 때,
조합 활동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도 지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험도가 높은 범죄 행위에 손댄 동료가 어려움에빠졌다고 도울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자업자득 아닌가?
카라마를 비롯한 조합원들과 생활하다 보면 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공헌도, 특정한 어려움, 궁지에 빠지게 된 ‘원인‘을 거의 불문하고, 마침 홍콩에 있는 그 타자가 처한 상황(결과)에만 응답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해주는 태도가 폭넓게 관찰된다. 이는 죽음이라는 특별한 사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조합 활동과 타자에 대한 세세한 규칙이나 규범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애매한 채로 둔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얘기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집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최종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 무임승차자 문제도, 기부금을 상황에 따라 달리 받자는 제안도 다시 문제삼지 않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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