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재미난 쇼를 보게 될 거야."
리모컨을 누르며 영제가 말했다. 현수는 등으로 내달리는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의 손목을 끊어놓은 몽치보다 더 기분 나쁜 말이었다. 글이라고는 자기소개서밖에 써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보다‘와 ‘하다‘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다‘라면, 영제의 상대는 자신이었다. ‘보다‘라면, 대상과 무대가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무대 밖의 관객이라는의미였다.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지금껏 읽었던 판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였던가.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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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다.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세계 불평등 이론의 골자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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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문이 슬몃 웃더니 공손히 향로를 옮겨왔다. 내가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행문에게 말했다.
"한 가지 화롯불인데, 방금 전 네가 향을 사를 때 연기는 향 연기가 되고, 이제 내가 담배를 피울 때 연기는 담배 연기가 되는구나. 앞의 연기와 뒤의 연기가 같은 연기는 아니니, 네가 말한담배 연기와 너의 향 연기가 서로 인연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행문이 합장하고 대답했다.
손님께서 앞 연기는 앞 연기고, 뒷 연기는 뒷 연기라 하셨으니, 뒷 연기와 앞 연기가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훌륭하도다. 앞 인연과 뒤 인연이 아무 인연이 없다면 저 뒷연기는 이 앞 연기의 생김새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고 서로 아는사람도 아닐 터인데, 어찌 반드시 앞의 연기가 뒷 연기의 처지를 위해줄 것인가? 앞 연기가 향 연기요. 뒷 연기가 담배 연기든, 앞연기가 담배 연기요 뒷 연기가 향 연기든, 향 연기와 담배 연기는 각각 제 연기를 피울 뿐이니 어찌 반드시 뒷 연기가 앞 연기의 복을 아껴주겠는가?"
행문이 합장하며 가만히 탄식해 마지않았다.
- 이옥 <연경 煙經> 중에서 - P250

그저 주는 눈길에 사물은 결코 제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것도 없다. 워낙 환한 조명 속에 살다 보니 이제 우리는 좀체로 제 그림자조차 보기가 어렵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삶이 빚어내는 그늘이다. 그림자가 없는 삶에는 그늘이 없다. 녹슬 줄 모르는 스테인리스처럼, 언제나 웃고 있는 마네킹처럼, 0과 1 사이를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디지털처럼 그늘이 없다. 덧없는 시간 속에 덧없는 인생들이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덧없이 스러져간다.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 P279

천하에서 옛 법도에 따라 차례를 지켜 조금도 어그러질 수 없는 것에 계절의 차례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2월에 있어야 할 절기가 정월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한 달 중에 단지 한 번의 절기만 있는 경우도 있고, 한 달 중에 세 차례나 절기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일 년 중에 입춘을 두 번 만날 때도 있고, 일 년 중에 입준이 없을 때도 있다. 또 일 년이 열세 달이 될 때도 있어, 해마다 달력이 같은 법이 없다. 내가 어릴 적에 군영에 순라하는 군사를 살펴보니, 4패로 나누어 각 패마다 장교 하나에 병졸이 넷이었다. 4패 뒤에 또 한 패가 있는데, 5패라고 부르지 않고, 별4패로 불렀다. 장교가 하나고, 병졸 또한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장의 법이다. -홍길주
...
글쓰기가 같은 원리 위에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했다. - P283

 그저 활자를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다. 글로 쓰는 것만 작문이 아니다. 글로 쓰여지지 않고, 문자로 고정되지 않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천하 사물은 명문 아닌 것이 없다.
- P298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옷자락이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니 겁이 나서 안심할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자!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나!"
- 정약용 <유세검정기 遊洗劍亭記>중에서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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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영제 치과입니다."
승환은 전화를 끊었다. 상황의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오영제와 팀장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위태로웠다. 오영제는 살해당한 아이의 아빠였다. 충돌지점을 향해 폭주하는 자동차였다. 팀장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고 침몰하는 난파선이었다. 두 극점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

많은 것을 말하는 눈이었다. 분노와 두려움, 현실에서 자신을 탈출시키고자 하는 자의 절박함, 어둠으로 치닫는 자의 절망.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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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기도 하구나! 이 인연이 하나로 모임은, 누가 그 기미를 알겠는가? 그대는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나 또한 그대보다뒤에 나지 않아 나란히 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대는 흉노처럼얼굴 껍질을 벗기지 않고 나도 남쪽 오랑캐같이 이마에 문신하지 않으며 함께 한 나라에 살고 있소. 그대는 남쪽에 살지 않고 나는 북쪽에 살지 않아 더불어 한 마을에 집이있고, 그대는 무(武)에 종사치 않고 나는 농사일을 배우지 않으며 같이 유학에 힘을 쏟으니, 이것이야말로 큰 인연이요 큰 기회라 하겠소. 비록 그러나 말이 진실로 같고 일이 진실로 합당하다면, 차라리 천고(千古)를 벗삼고 백세(百世)의 뒤를 의혹하지 않음이 나을 것 같구려.
- 박지원<여경보與敬甫>
- P219

꽃병에 11송이 꽃을 꽂아 팔아 동전 스무 닢을 얻었소, 형수님께 열 닢을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작은 딸에게 한 닢, 형님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내 방에도 두 닢, 담배 사느라 한 닢을 쓰고 나니, 공교롭게 한 닢이 남았소. 이에 올려보내니 웃고 받아주면 참 좋겠소.
- 박지원<여무관 與무官> 이덕무에게
...

내가 마침 구멍난 창을 바르려 했지만 종이만 있고 풀이 없었는데, 무릉씨(武陵氏)가 내게 돈 한 닢을 나누어주는 바람에 풀을 사서 바르는 일을 마쳤다. 올해 귀에 이명(耳鳴) 이 나지 않고손이 부르트지 않는 것은 모두 무릉씨의 덕분이다.
- 이덕무의 답장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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