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낭만적인 인간이 아닌지라 저런 조언을 그냥 ‘걱정에 압도되면 안 된다‘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삶이 망가지는 사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자세가 파국을 낳는 과정을 몇 번 봤다. 따지고 보면우리 뇌가 맡은 임무가 바로 걱정이다. 인간의 뇌는 자연이 만든 최고의 시뮬레이터다. 엄청난 산소를 소비하며 눈앞에 없는각종 상황을 쉬지 않고 시뮬레이션한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생존 도구다. 그 고급 도구를 사용하는대가로 우리는 끊임없이 앞날을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것들을 걱정한다.
불확실성이 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나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키팅 선생님 말씀보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에 더끌리는 편이다. 사실 내 생각은 좀더 암울한데, 세상 누구도 미래를 자기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창조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내 생각에는, 사람은 비전을 만들고 거기에 기대 불안을 다스릴 수 있다. 비전은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런 비전조차 힘을 발휘한다. - P205

사람이 도덕 판단의 기준을 몇 종류나 가졌는지에 따라 정치성향이 좌우된다는 도덕심리학 이론도 있다. 그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는 어떤 일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지, 그리고 공정한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거기에 더해 공동체에 대한 헌신, 질서에 대한 존중, 고귀함을 향한 노력 같은 요소도 고려하는 것 같단다.
내게는 현대 심리학자들보다 20세기 정치 이론가 러셀 커크의 말이 더 다가온다. 커크는 진보의 가치를 인정하는 보수주의자였다. 다만 커크에 의하면 보수주의자는 보다 신중하다. 사회가 복잡한 유기체임을 이해하고, 인간의 지혜가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모든 걸 걸지 않고 전통을 존중한다.
변화의 시대에 인기 없는 태도겠다. 그래도 불확실한 접근법보다 오랜 가치를 극적인 돌파구보다 흔들림 없는 원칙을, 순간의 감홍보다는 일관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지닌 이에게 품격이 깃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품격은 가치, 원칙, 일관성을 위해 이익, 자존심, 감정을 억누를 때, 다시 말해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 P209

두려워하는 사람은 애도하지 않는다. 애도는 타인을 향하는마음인데,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그를 휘감는다. 나는 2022년 10월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참사를 현정부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은 탄핵될까봐 겁에 질렸다. 그래서 추모의 방식을 통제하려 든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여러 말들을 마찬가지의 이유로 의심한다. 자신이나 진영의 이익을 염두에 둔 꿍꿍이가 섞여 있는 것이 훤히 보여서다. 대통령 부부가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합성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비나이다~‘라고 적은 신부와 그걸 패러디라고 옹호한 또다른 신부도 이해할 수 없다. 깊은 슬픔은 사람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만든다.
슬퍼하는 자는 칼럼을 쓸 수 있는가. 애도하는 인간은 타인을향해 속셈이 있다거나, 겁에 질렸다거나, 경건하지 않다며 비판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사회 전체가 정략으로 음탕해졌고,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담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비극을 겪은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 P214

무엇 때문에 그리 신이 났는지 두 녀석은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까불고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차로 옆에서 그렇게 노는 것은 위험하다고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꼬마들이 신나게 까불며 자라서 젊음을 만끽하고, 대형 공연을 구경하고, 축제의 열기에 흠뻑 젖기를 바랐다. 핼러윈도 즐기기를 소망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차가 오지는 않는지, 아이들이 차로에 뛰어들지 않는지만 살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불상사를 막을 수 있게. 꼭 필요하다면 내 몸을 차도로, 자동차 앞으로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른의 임무를 생각했다. - P215

친구는 상사가 아니다. "너 그거밖에 못해? 지금 시간이 모자라는데 꼭 잠을 자야 해?"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내 친구일 수없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단호하게 "나는 네 부하가 아니다"라고 대꾸해줘야 한다. 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꿈이 ‘지금 임금이 밀리고 추행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나를위해 참으라‘고 속삭인다면 결연하게 거절하라. 꿈은 동반자이지, 삶의 주인이 아니다.
아무리 속으로 친구라고 믿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면 결국 멀어진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이라도 짬을 내 안부를 물어야 한다. 서로 어떤 처지인지 살피고 상대에게 관심이 있음을 확인해야 우정이 유지된다. 꿈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꿈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걸작을 쓰는 것이다. 바로 그 꿈 덕분에 내가 바라봐야 할 곳을 정확히 알게 되고, 남을 시기하지 않게 된다. 이 친구와 오래도록 깊고 다정한 대화를나누며, 단단하고 풍성하게 살고 싶다. - P234

근대 시민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삼국지를 이중으로 소비한다. 충, 의, 천하 같은 단어를 비유로 받아들이고, 그런 현대적해석을 인간관계와 처신에 적용한다. 유비가 조운 앞에서 제아들을 집어던졌듯, 타인의 마음을 사려면 화끈하게 내 걸 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삼국지』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를 칼럼에 써먹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는 동안에는 그냥 전근대인이 되어버린다. 삼권분립이나 일사부재리원칙이 사람 마음을 뜨겁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한 개인이 수십만 대군 앞에 당당히 서고, 흉기를 들고 일대일로 적과 무술을 겨루며, 흠모하는 상사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 모습에 열광한다. 다들 마음 깊은곳은 고대인이다.
한데 그런 분리가 그리 깔끔하게 이뤄지지는 않는 것 같다.
다른 이의 세계관을 탐닉하다보면 결국 거기에 젖는다. 그 시대의 눈으로 주변을 보게 된다. 소설가 김훈이 "나와 내 또래 남자들은 『삼국지』를 너무 많이 읽어서 이 모양이 아닌가 싶을 때가있다"「우리 또래는 三國志를 읽어서 망했다」, 조선일보, 2017.
6. 30.)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 것같았다. - P407

아마 이런 예상은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하는 예상이건, 다른 이들이 펼친 예상이건, 모두 들어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잡지 와이어드의 초대 편집장 케빈 켈리가 거의 삼십 년 전에 사용했던 표현들을 빌리고 고쳐서 써본다. ‘태어난 것과 만들어진 것이 섞여 생태계를 이루고, 거기에서 새로운 야생이 태어날 것이다.‘ 그 야생의 생태계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모두가 걱정하는 인간의 일자리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끝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그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니까. 그리고 우리는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개인, 예술, 의미 같은 개념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무너지기는 할것 같다. - P4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멸(contemptus)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과 만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때, 우리는 자꾸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씨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소중한 정신적 태도가 떠오를수록, 우리는 지금 내눈 앞에 있는 사람 자체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게 된다. 이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식으로든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상대방은 우리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않게 직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경멸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 P162

이사벨은 오스먼드를 측은하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비록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를 기만하지는 않았어도 실제로는 완전히 기만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먼드가 처음 이사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눈에 띄는 처신을 삼갔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하게 행동했다. (••••••)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에게 본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을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滿月),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늘 그렇듯 그가 자기 뜻대로 행동하도록 그저 보고만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부분을 전체로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 P167

미성숙한 사람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할 수 있다는 거야?‘ ‘사랑은 애인을 행복하게해 주는 감정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애인에 대한 잔인함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잔인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잔인하게 잘라내는 장면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헤어지게 되는 커플이 서로에게 잔인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헤어지는 모든 커플들이 키티나 월터처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헤어지는 경우라면, 아예 잔인해질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아직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잔혹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172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할 때,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개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질서를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결국 이성의 윤리학은 사회의 윤리학이지 ‘살아있는 나‘의 윤리학일 수는 없다. 욕망을 긍정하면서 스피노자가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윤리학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욕망을 억압당한 채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 P181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유한자다. 우리가 유한자라는 것은, 신조차 누릴 수 없는 축복일 수도 있고 비극일 수도 있다. 우리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타자들이 내 삶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 미리 결정할 수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저주스러운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모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반대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꾀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 P182

동경(desiderium)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은 충동이다. (••••••)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이것이 바로 동경의 본질이다.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충동!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이미 존재하지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의 욕망이나 충동은 단순한 욕망이나 충동이 아니라 동경이 된다. 그러니까 동경의 정의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어떤것에 대한 욕망이나 충동"이 바로 동경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속내였다.  - P195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무시무시한 결과가 예측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운 결과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두려운 결과에 직면하게 될 때, 절망은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우리의 목을 조인다. 이것이 바로 한나가 느꼈던 절망의 실체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극도로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한나는 문맹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신이 결코 문맹이 아니었다는 것을 포장하기 위해 미하엘에게 짧은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신을 하지않고 녹음테이프만 계속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문맹이라는 것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큰 절망이 한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제 미하엘은 자신의 비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모두 공개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미하엘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한나가 자살한 뒤 찾아간 교도소에서 담당자는 미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나는 당신이 편지를 써 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우편물을 받았어요. 우편물을 나누어 줄 때면, 그녀는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렇다. 미하엘로부터 단 한 통이라도 편지를 받았더라면 한나가 자신을 자살로 몰고 간 절망에 휩싸이지는 않았을것이다. 한나에게 그의 편지는 자신이 문맹이었던 어두운 수치심을 영원히 덮어 주었을 선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 P212

그러니까 한나가 애써 문맹을 탈출하여 편지를 써 보냈을때, 미하엘이 그것을 무시했던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미하옐로서는 한나는 문맹이고 자신은 ‘책 읽어주는 남자‘로 계속 남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는 그의 무의식적인 노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읽어주기, 함께 샤워하기.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 나누기, 마지막으로 함께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워 있기. 청소년 시절 그 흥분과 설렘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과거에 그녀가 자신을 씻겨 주고, 자신을 품에 안아 주었던 것,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책을 읽어 줄 수있어서였다. 그래서 무슨 종교 의식인 것처럼 외로움에 빠져 있던 미하엘은 녹음기로 책을 읽어 녹음했던 것이다. 그는 문맹에서 벗어난 한나를 부정했던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서, 잔혹하게도 그는 현재의 한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한나를 절망으로 몰고 가 죽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미하엘 본인이었던 셈이다. 그가 끝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 P216

이렇게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고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도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 P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머스는 감방 동료들을 경멸했고, 그들은 그를 싫어했다.
그들이 그를 미워한 이유는, 그들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신비에 싸인 인물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거기에 성공한 사람은 리머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성의 두드러진 부분이 집단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지켜 왔다. 감상적인 순간에도 그의 여자나 가족이나 자식들 이야기를 그에게서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리머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기다렸지만 리머스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신참 죄수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수치심이나 공포심이나 충격 때문에 옥살이에 대한 기초 지식을 설레는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감옥 공동체의 귀여움을 받기 위해 옥살이에 서투른 신참의 지위를 이용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데 리머스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모두를 경멸하는 듯했다. 바깥세상과 마찬가지로 리머스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모두 리머스를 싫어했다. - P63

 전술적으로는 일을 빨리 해치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완전히 몰락했고 빈털터리야. 감옥에서 쌓은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고, 사회에 대한 원망은 아주 강해. 나는 새삼 길들일 필요가 없는 늙은 말이야. 나는 영국 신사로서의 명예를 그들에게 손상당한 체할 필요도 없어••••••.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의> 거부를 예상할 것이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것이다. 신의 눈이 황야를 건너는 카인을 뒤쫓았듯, 영국 정보부는 배신자를 끝까지 추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박이라는 것.
결정에 일관성이 없으면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공작도망칠 수 있다는 것. 사기꾼과 거짓말쟁이와 범죄자들도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고, 훌륭한 신사들이 관청구내식당에서 파는 삶은 양배추에 넘어가 무서운 반역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 P91

그날 아침은 추웠다. 옅은 잿빛 안개가 축축하게 살갗을찔러 따끔거렸다. 공항을 보자 리머스의 머리에 전쟁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 반쯤 가려진 채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기계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그 메아리, 갑작스러운 외침 소리, 여자의 하이힐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불협화음,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엔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도처에 음모라도 꾸미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것은 밤이 사라지고 아침이오는 것을 본 공통된 경험에서 유래하는 우월감 같은 것이었다. 공항 직원들의 표정에는 동틀 녘의 신비감이 배어 있고, 추위가 그 표정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승객과 수화물을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처럼 무뚝뚝한 태도로 다루고있었다. 그날 아침 그들에게 보통 사람은 아무 의미도 없는존재였다. - P95

리머스는 피터스가 탁자 위에 놓인 담배 상자에서 담배 한개비를 집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두 가지를 알아차렸다. 하나는 피터스가 왼손잡이라는 것.
또 하나는 피터스가 또다시 담배를 거꾸로 물고 제조회사 이름이 새겨진 쪽에 먼저 불을 붙였다는 것. 리머스는 그 몸짓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피터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쫓긴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피터스는 무표정하고 잿빛을 띤 이상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안색은 오래전에 얼굴에서 사라져 버린 게 분명했다. 어쩌면 혁명 초기에 감옥에서 혈색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얼굴 생김새는 고정되었고, 피터스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보일 것이다. 뻣뻣한 회색 머리털만은 백발로 변할지 모르지만 얼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리머스는 막연한 궁금증이 일었다. 피터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결혼은 했을까? 피터스에게는 정통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리머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권력의 정통성, 확신의 정통성이었다. 피터스가 거짓말을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것이다. 피터스의 거짓말은 애시의 서투른 거짓말과는 거리가 먼 계산된 거짓말, 필요한 거짓말일 것이다.
애시, 키버, 피터스, 갈수록 질적 수준도 높아지고 권한도커졌다. 리머스에게 그것은 첩보 기관의 위계질서가 갖는 자명한 공리 같은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도 위로 올라갈수록 진보하는 게 아닐까. 애시는 돈만 바라고 일하는 용병, 키버는 동조자였지만, 피터스에게는 목적과 수단이 하나를 이루고있었다. - P108

한 소녀가 해변에 서서 갈매기들에게 빵 조각을 던져 주고있었다. 그녀는 리머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치렁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고 코트 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그러자 소녀의 몸은 바다를 향해 활 모양으로 젖혀졌다. 그 순간 리머스는 리즈가 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을 되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평범한 생활이 가치 있다는 믿음, 빵 부스러기를 종이 봉지에 넣고 해변으로 걸어가 갈매기들에게 던져주는 소박함. 하찮은 것에대한 이 관심은 리머스가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대선을 놓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선거라고 한다. 양당후보는 ‘내가 더 많이 퍼주겠다‘고 경쟁한다. 공약들은 좋게 표현해 ‘생활 밀착형 마이크로 정책‘이고, 선거운동은 인터넷 밈에 의존한다. ‘탈모 치료 건강보험 확대‘나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을 보고 무슨 철학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지금 한국사회에 대한 어떤 진단이 담겨 있나.
후보들이 제 입으로 말하기 꺼리는 조악한 거대서사가 밑에깔려 있기는 하다. ‘검찰과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든가 ‘문재인 정권과 586이 나라 망쳤다‘든가. 그 서사에서 도출되는 과업은 복수다. 우리 편이 권력을 잡아서 상대편을 감옥에 보내면 한국사회도 나아진다는, 명쾌하고 단순무식한 소리다.
정의당의 부진도 조국 사태 등에서 헛발질한 것보다는, 대안정당으로서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 별개로, 지난 몇 년간 정의당은 대중에게 퍼포먼스 정당, 정체성 정치의 정당으로 비쳤다. 그러는 사이 플랫폼 노동의 시대가 왔고, 정의당의 기존 노동 비전은 현실에서 더 멀어지는듯 보였다. - P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라망스가 느낀 감정을 회한이라고 해도 좋고 양심의 가책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감정을 품는 순간이 오면, 그 누구도 다시는 봄날을 기대하기 힘든 잿빛 가을의 저주에 갇히게 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저 슬픔만이 남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회한이라는 감정이다.

회한(conscientioe)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희망에 어긋나게‘와
‘과거 사물‘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만 하면 언제든 도울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심지어 그는 애인이 위험에 빠지기를 기다릴 정도다. 위험에 빠진 애인을 구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꿈꾸면서 말이다. 불행히도 정말로 애인이 위험에 빠졌다. 예기치 않게 사기 사건에 말려든 애인에게 경제적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 둔 돈으로 충분히 애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웬걸, 그는 애인을 구하지 못했다.
애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애인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정말 슬픈 것은 자신이 얼마나 속물이었는지를 자각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자각에 눈을 뜬 이상 그가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애인을 계속 만날 수 있겠는가. - P140

엎질러서는 안 되는 물동이를 엎질렀다는 슬픈 느낌, 이것만큼 회한의 감정에 대한 좋은 비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우리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회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시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순간의 결정이 이다지도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며 삶을 슬픔에 물들게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회한의 감정이 가진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때는 내가 너무 미성숙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나 나약해서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과 비겁의 경험을 배경으로 회한은 꽃피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회한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기력과 비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무기력하고 비겁해서 물동이를 들지 못하고 물을 엎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성숙하고 강해져서 물동이를 계속 들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슷한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이번에는 진짜로 물을 엎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정말로 성숙하고 강해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하나의 전설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무기력과 비겁에맞서 싸운다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회한은 밝은 태양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 P146

당황(consternatio)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당황의 감정을 정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이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멜러즈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포착하는 설명 아닌가.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도 새롭게 꿈틀대는 욕망에 대한 놀라움으로 제약되니, 멜러즈는 ‘무감각해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여자를 피하겠다는 욕망은 여자를 피했을 때 발생하는 악을고려할 수밖에 없으니, 멀레즈는 ‘동요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당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신 상태, 요즘 말로 멘붕 상태의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당황은 단순히 멘붕 상태에만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감정이다.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