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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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 오랜 착각만 없었다면 나는 이 말을 훨씬 더 일찍했을 거야. 그 착각 때문에 나는 미스 해비섬이 우리를 서로 짝지어 주려고 작정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어. 말하자면 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이 말을 하고싶어도 참았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이 말을 꼭 해야겠어."
아무 동요 없는 표정을 계속 유지한 채, 그리고 손가락을 여전히 움직여 대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아. 나는 그녀의 고갯짓에 대한 대답으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나에겐 이제 널 내 사람이라고 부르게 될 희망이 조금도 없어, 에스텔러. 내가 곧 어떻게 될지, 내가 얼마나 가난하게 될지, 또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나는 하나도 몰라. 하지만 나는 널 사랑해. 이 집에서 널 처음 본 이래로 난 너를 사랑해 왔어."
- P201

"일주일이면 마음속에서 날 잊고 말걸."
"널 마음속에서 잊는다고! 너는 내 존재의 일부야, 나 자신의 일부야, 거칠고 천한 소년이었던 내가 처음 여기 온 이래로, 너는 내가 읽는 글 한 줄 한 줄마다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어. 물론 그때도 너는 이미 내 가련한 가슴에 상처를 입혔지. 너는 그이후로 내가 본 모든 풍경 속에, 강이든, 배의 돛이든, 습지대든,
구름이든, 햇빛이든, 어둠이든, 바람이든, 숲이든, 바다든, 길거리든 그 어떤 것이든 그 속에 존재하고 있었어. 너는 내 마음이 그후로 알게 된 모든 아름다운 상상의 화신이었어. 네 존재와 영향력은 나에게 런던에서 가장 튼튼한 건물의 육중한 돌들보다도 더 실감 있는 것이며, 그걸 바꾸는 것은 그 돌들을 네 손으로 옮겨 놓는 것보다 훨씬 더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변함없을 거야. 에스텔러,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내 인격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얼마 안 되는 내 안의 좋은 면의 일부이자 나쁜 면의 일부로서 말이야. 하지만 오늘 이 이별의 순간에 나는 너를 오직 좋은 것하고만 연결 짓겠어. 그리고 언제나 충실하게 그것에 비추어 너를 기억하겠어. 왜냐하면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아무리 쓰라린 고통을 느낀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해로움보다는 이로움을 훨씬 더 많이 주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야. 아, 하느님이 너를 축복하시기를, 그리고 하느님이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 P206

그런 때조차 나는 여기저기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집에 가지 말아요.‘라는 경고와 씨름하고 있었다. 마침내 심신이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도, 그 말은 내가 형태 변화를 시켜야 하는, 거대한 환영 같은 동사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것은 현재시제 명령법, 즉 ‘당신은 집에 가지 마. 그가 집에 가지 못하게 해, 우리, 집에 가지 말자. 너희들은 집에 가지 마. 그들이 집에 가지 못하게 해.‘ 등으로 바뀌었다가, 다음에는 가능법으로,
즉 "나는 집에 가지 못할 수 있어, 갈 수 없어.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몰라, 갈 수 없을 거야, 가지 못할 거야, 가면 안 될 거야.‘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나는 내 정신이 좀 이상해지고 있다고 느끼고는 베개 위에서 몸을 돌려 벽 위의 그 노려보는 동그란 눈동자들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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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여성‘ 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게 되는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그렇다. 그런 무서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좀먹고 무너뜨린다.  - P53

 하준이는 ‘정글짐 술래잡기‘
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떨어져도 술래, 잡혀도 술래예요.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하는 게 제일 좋아요. 더 많으면 정신없고, 더 적으면 심심해요."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어린이의 개성은 그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이.
- P90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완벽한 날들』 중에서)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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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식권을 여왕에게 양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개미나 꿀벌들에 못지않게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컴퓨터와 전기와 소프트웨어 같은, 내 능력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것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글을 쓰다가도 문 밖에만 나가면 가게에서 음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사회라는 것이 주는 이점은 한마디로 노동의 분화이다. 인간 사회를 부분들의 단순 합보다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전문화이다.
- P60

이렇듯이 단일한 거대 가족으로 이루어진 인간 사회는 없다. 이 사실이 인간 사회의 상호 호의적 측면을 더욱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 생식권의 만민 평등주의야말로 인간 사회의 아주 독특한 특징이다. 다른 군체 포유 동물들, 곧 늑대 · 원숭이 · 고릴라 등은 생식권을 소수의 수컷이나 암컷에게 양도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생식권을 갖는다. 인간 사회가 아무리 전문화되고 노동이 세분화되어도 인간은 생식 활동을 할 권리만큼은 각자에게 있음을 항상 주장한다고 리처드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가 말했다. 그는 가장 조화로운 사회는 구성원각자에게 평등한 생식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라고 믿고 있다. 다른 집단에게 정복당했을 때 일부일처제 사회가 일부다처제 사회보다더 강력한 단결력을 보이고 위기를 잘 버텨낸다는 보고가 있다.
- P61

맞대응 tit for tat이 승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호성과 보복성, 관용성과 투명성의 복합체라는 데에 있다. 우호성은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리는것을 막는다. 보복성은 한번 배신을 시도한 상대편에게 다시는 배신을 꿈꾸지 못하게 한다. 관용성은 서로 적대 경험을 가진 상대와 다시 상호부조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투명성은 위의 사실들을 다른 참가자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함으로써 다른 참가자들과의장기적인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 P90

 트리버스는 동물이나 인간은 항상 사리 추구를 위해 행동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기대와는달리 동물 세계나 인간 사회에서 협동이 무척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기적인 개체들이 서로 협동을 하는 것은 <호혜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호혜성이란 (네가 내 등을 긁어주면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는 것이다. 동물이 호의를 베풀면 그 호의를 입은 상대는 나중에 그에게 보답함으로써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물론 호의를 베푸는 비용이 받는 비용보다 적은경우에 한해서이겠지만…... 동물이 서로를 돕는 것은 이타주의가 아니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상호적 호혜성이다.  - P92

육상 포유 동물 중에서 가장 영리한 영장류를 비롯한 육식 동물들을 살펴보면, 뇌의 크기와 사회집단의 규모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발견된다. 이루고 사는사회가 클수록 뇌 전체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큰 뇌가 필요하다. 반대로큰 뇌를 갖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두 가지 진술 모두 좋으며 그만큼 상관도(相關度,corelation)도 높다. 둘의 상관도가 이렇게 높기 때문에, 어떤 동물의 집단 규모를 모르더라도 뇌 크기를 알면 거꾸로 집단의 규모를 예측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추산해 보면 인간은 150명 규모의 사회에서 산다. 보통의 읍이나 시는 이보다 훨씬 큰 규모이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150명이라는 수는 옳다. 그것은 전형적인 수렵채집 부락의주민 수나 평균적인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 수, 개인 주소록의 기입란 수, 보병 중대의 병력 수, 그리고 원활하게 돌아가는 공장의 직공 수와 대략 일치한다. 150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기에 가장 적당한 규모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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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현성이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생긴 건 축구화 같아도
‘풋살화‘ 라고 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또박또박 "풋,
살, 화, 풋살화예요. 축구화 아니고"라고 강조했다. 풋살화는 축구화랑 바닥이 다르고, 그냥 운동화보다 발등 부분이 납작해서 공 차기가 좋다고 했다. 아버지랑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골랐고, 자기는 3학년치고는 발이 작아서 치수를 정할 때 좀 고민했고, 지난주에 주문했는데 어제야 도착했기 때문에 오늘 처음 신었으며, 이걸 신었더니 잘 뛰어지는 것 같았고, 그런데 생각만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현성이를 간신히 말렸다.
- P15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때 기다려 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기다려 주는 순간에는 작은 보람이나 기쁨도 있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 P19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 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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