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이 절반쯤 지나간 즈음 대화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 대통령 경호원들만 끝까지 남았다. 대통령이 딸들에게 떠날 것을 명해서 사람들이 강제로 딸들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는 딸들의 절규 소리가 길가에서부터 들려 왔다. 건물 안에는 대략 서른명의 사람들이 남아 2층 거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이메도 그들 중에 끼어 있었다. 그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같았다. 그는 한 손에 총을 든 채 빨간 벨벳 의자에 앉아멍하니 총만 바라보았다. 그는 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몰랐다.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시계를들여다 보니 그 끔찍한 악몽 속에서 겨우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통령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앞으로 박해받을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나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민중의 중심에 내 목숨 다 바쳐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조국과 조국의 운명을 믿습니다. 이 순간을 잘 극복하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보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위해 자유인이 지나갈 수 있는 드넓은 가로수 길이 열릴것입니다.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입니다. 나는 내 희생이 헛되지만은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산발적인 총소리가 드문드문 멀리서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대통령은 반란군 지도자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에게 가족과 함께 국외로 떠날 수 있도록 군 비행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먼 나라로 망명을 떠나, 야밤 도주하듯 쫓겨난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노닥거리며 여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 잘못 됐소, 배신자들. 민중이 나를 이 자리에 앉힌 이상 나는 죽어서나 이곳을 나갈 것이오." - P216
‘시인‘은 바닷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원래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근래의 사건들로 살아갈 의욕마저 상실한 것이다. 군인들이 시인의 집을 급습해 달팽이나 조개껍데기, 나비, 병 등을 수집해 놓은 것을 다 헤집어놓았고, 여러 군데 바다에서 건져온 선박 장식품과 책, 그림, 미완성 시를 모조리 뒤졌다. 반란용 무기와 도망친 공산주의자들을 찾겠다며 벌인 수색이었지만 결국은 시인의 늙은 심장에 타격만 주었다. 시인은 수도로 옮겨진 뒤 나흘 후에 세상을 하직했다. 삶을 노래했던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들을 쏴 죽일 거야! 그들을 쏴 죽일 거야!"였다. - P248
사십팔 시간 후에 페드로 테르세로 가르시아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블랑카가 아니라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문 입구에 서 있었다. 페드로 테르세로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자네를 여기서 내보내려고 왔네." 트루에바 상원의원이 말했다. "왜요?" 페드로 테르세로가 물었다. "블랑카가 부탁해서지." 트루에바가 대답했다. "지옥에나 가십시오." 페드로 테르세로가 더듬거렸다. "좋아, 바로 거기에 가려던 참이었네. 나랑 같이 가지."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 P258
나는 개집에 있었을 때 언젠가는 가르시아 대령을 내 앞에 무릎 물리고, 당연히 복수받아 마땅한 사람들 모두에게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증오심마저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몇 주가 지나면서 증오심이 많이 희석되었고 날카롭고 또렷하던 면들도 많이 무뎌지고 뭉뚱그려졌다. 그 어느 것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짜여진 운명에 상응하는 것이었으며, 에스테반 가르시아도 그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칠고 삐뚤어진 부분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괜히 존재하는것은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강가의 갈대밭에서 그의 할머니인 판차 가르시아를 넘어뜨렸을 때 또 다른 업의 고리가 연결된 것이었다. 그 후 강간당한 여자의 손자는 강간한 남자의 손녀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고, 아마도 사십 년쯤 후에는 내 손자가 가르시아의 손녀딸을 갈대밭 사이로 넘어뜨리고, 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집에 있었을때 나는 각기 정확한 자리를 지닌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조각들이 다 제자리를 찾고 나면, 각 부분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거라 확신했다. 조각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가르시아 대령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P326
외할머니는 삶을 증언하는 노트를 오십 년 동안 써왔다. 공범이 되어준 몇몇 영혼들이 빼돌린 덕분에, 그 노트들은 식구들의 다른 글을 모두 사라지게 한 그 치욕스러운 불길을 기적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노트들은 클라라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배열해 놓은 그대로, 연대순이 아닌 사건별로 분류되어 색색깔의 리본에 묶여 지금 내 발치에 놓여 있다. 클라라 외할머니는 내가 과거를 되살리고, 스스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 노트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첫 번째 노트는 어린아이의 섬세한 필체로 쓰여진 평범한 스무 장짜리 학교 노트였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라바스가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왔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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