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 마치 눈송이처럼,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각자 복제 불가능한 복잡한 형태를 뽐낸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분류하기를 즐겨서 양극성 대 단극성, 중증 대 경증, 외인성 대 내인성, 단기 대 장기 등으로(이런 식의 분류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나누어 묶는다. (이런 분류는 진단과 치료에서 실망스러울 정도로 효용성이 제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성별과 연령, 문화적 차이에 따른 우울증의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근본적인 의문 하나가 제기된다. 그런 특징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각 집단에 부과되는 기대들로 인한 사회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답은 모든 경우에서 둘 다 맞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그것이 발생한 정황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 P285

서구 사회에서의 여성대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일률적으로 2대 1 정도로 나타난다. 세상은 남성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그래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힘든 인생을 산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난해지기도 쉽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도 쉽다. 교육의 기회는 더 적고 일상적으로 굴욕을 겪을 가능성은 더 높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인 지위를 잃기도 쉽다. 남편에게종속되기도 쉽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가정 외에는 자기실현의 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울증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은 항상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전업주부와 일을 가진 기혼 여성의 우울증 발생 비율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상황이 다 큰 스트레스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하는 기혼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은 여성에 비해 훨씬 낮게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문화권에서 우울증, 공황장애,
식사장애는 여성이 더 많이 겪지만 자폐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알코올중독 발병률은 남성이 높다는 것이다. 12 - P288

여성 우울증의 특징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남성 우울증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는 편이다. 많은 남성우울증 환자들이 우울한 감정들과 싸울 때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약물남용, 일중독에 빠지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진단받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보고되는 숫자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나 되지만 자살에 이를 확률은 남성이 여성보다 네 배나 높다." 독신이거나 이혼하거나 상처한 남성이 기혼 남성보다 우울증 발병률이 훨씬 높다.  남성 우울증 환자들은 완곡한 표현을 빌리자면 ‘흥분‘ 증세를 보일 수도 있으며, 모르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아내를 폭행하거나 약물 복용을 하거나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행동을 한다.  - P293

우울증 환자라 하더라도 병을 숨기고 부모 노릇을 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녀들로 인해 쉽게 동요하고 그 결과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대다수는 아예 자녀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못하며 애정도 없고 위축되어 있다. 이들은 분명한 통제력이나 규율도갖고 있지 못하다. 자녀들에게 줄 애정도, 따뜻한 배려도 거의 없다. 그리고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 무력감을 느낀다. 행동 조절도 되지 않아 분명한 이유도 없이 화를 냈다가 죄책감이 발작처럼 밀려오면 역시 분명한 이유도 없이 넘치는 애정을 보인다. 이들은 자녀들이 자신의 문제들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들은 자녀들의 행동이나 결핍의 표현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이들의 자녀들은 잘 울고 분노에 차 있고 공격적이다. 이런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대로 남을 배려하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은 지나친 감정 이입으로 스스로 불행해지기 쉬운데, 그것은 어머니의 기분이 달라지는것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 그들 자신도 기분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97

새머로프는 중증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의 자녀들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의 인지 능력이 처음에는 또래 집단과 같다 하더라도 두 살 무렵부터 처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다 네 살쯤 되면 그들은 또래보다 확연히 "더 슬퍼하고, 상호작용이 적고, 위축되고, 기능도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주로 다섯 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그 다섯 가지가 다양한 모자이크를 이룬다고 그는 믿는다. 그 다섯 가지 해석은 유전적 특질, 아이들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모방하는 감정이입 반사, 부모의 반응 부족으로 인해 관계 시도를 중단하는 학습된 무기력, 병에 걸린 부모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역할을 맡기로 결심하는 역할 연기, 불행한 부모 사이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을 본 결과인 위축이다.  - P300

노인 우울증은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사회가 노년 자체를 우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인은 필연적으로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노인의 불행을 보살피지 않게 되며, 그결과 많은 이들이 말년을 불필요한 극심한 정서적 고통 속에서 산다. 이미 1910년에 에밀 크레펠린은 노인의 우울증을 퇴행기 멜랑콜리라 불렀다. 그 이후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붕괴되고 노인이중요성을 잃게 되면서 노인 우울증은 더욱 악화되어 왔다. 양로원의 노인들은 집에 사는 노인들에 비해 두 배 정도 우울증에 걸리기쉬우며 실제로 시설 거주자의 3분의 1이상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위약 효과가 표준치보다 상당히 높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노인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는 데서 얻는 심리적인 효과뿐아니라 위약 실험을 둘러싼 상황들에서도 효과를 얻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실험을 하려면 피실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면담을 실시해야 하는데 그런 주의 깊은 통제와 관심이 의미 있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노인들은 많은 관심을 받을수록 기분이 나아진다. 이런 작은 관심이 그토록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끔찍이도 외로운 것이 분명하다. - P311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 기능 손상의 전조가 되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은 어느 정도는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예고하며, 반대로 그런 질환들이 우울증을 유발하거나 우울증과 공존할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노화보다 더 세로토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의 핵심인 혼미와 인지 능력 쇠퇴에 대한 치료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런 질환들에 흔히 동반되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은 완화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거나 깊은 슬픔에 젖지 않고서도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현재로서는 정신적인 고통을 완화시키는 정도가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치료다. (대개는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치매의 원인이 되는지 밝혀내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뇌 손상이 원인일가능성이 크다. 물론 뇌 손상은 세로토닌 합성을 관장하는 부위를포함한 뇌의 다양한 부위들의 손상을 의미하며, 이것은 치매와 세로토닌 수치 저하가 공통된 원인에 의한 개별적인 결과들이라는 뜻이 된다.  - P316

나는 동성애자로서의 자긍심("gay pride")이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이 사실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그 반대의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드먼과 다우니는 이렇게 썼다. "동성애자인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이어진다. 이 자기혐오는 부분적으로는 공격자와 자신을 방어적으로 동일시한 결과다." 처음 성적 자각이 일어날 때 동성애자가 되고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한동안 성전환에 대한 환상에 젖는다. 동성애자임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동성애자 자긍심 운동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 만일 당신이 동성애자임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자긍심을 외치는 이들의 조롱을 살 것인데, 그렇게 같은 동성애자들에게조차 배척당한다면 진짜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내면화한다. 우리는 처음 겪은 타인으로부터의 동성애 혐오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 P336

이누이트들은 보통 대가족이다. 열두 명쯤 되는 가족이 몇 달씩 집 안에서만, 그것도 한 방에 모여서 생활한다. 너무 어둡고 추워서 도무지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아버지만 여름에 비축해 놓은 말린 물고기가 나지 않도록 한 달에 한두 번 사냥이나 얼음 낚시를 나갈 뿐이다. 그린란드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집 안에 기분 좋게 불을 피워 놓는 일은 불가능하며, 작은 물개 기름 램프 하나만 켜놓는다. 이렇듯 온 가족이 좋든 싫든 한데 모여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불평을 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거나, 화를 내거나, 다른사람을 비난할 여지가 없다. 이누이트들은 불평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그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웃고 떠들거나 바깥 얘기나 사냥 얘기를 할 뿐 자신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린란드의 우울증은 기온과 빛의 간접적 결과이며, 자신에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관습의 직접적인 결과다. 이 사회에서는 육체적으로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절제가 필요하다. 불친절해서도 냉랭해서도 아니며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린란드 원주민으로서는 최초로 정신과 의사가 된 포울 비스고르는 은근한 끈기가 엿보이는 온순하고 덩치 큰 남자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물론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모두들 알기는 하지요. 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우울해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울중 환자는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믿으며 무가치한 존재가 다른 사람까지 성가시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해요." - P343

이누이트들에게는 우울중이 너무도 사소한 문제이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무능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로 무시된다. 그들의 침묵과 우리의 매우 언어화된 자기 인식 사이에는 정신적 고통과 그것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마음에 담아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는 정황, 인종, 성, 전통, 국가 등이 모두 관련되며, 무엇을 완화시키고 무엇을 악화시키고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우울증은 (그 위급성과 증세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들은) 개인의 생화학과는 동떨어진 힘들에의해, 즉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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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 - P7

이진오가 한달 전 깊은 밤중에 기어오른 이곳은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아파트 십육층과 엇비슷할 것이다. 요즘 아파트 건물이 보통 이삼십층 높이라서 그에 익숙했던 탓인지 이 굴뚝 위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간이 좁고 사방이 휑하니 열려 있어서 처음에는 난간 너머 허공으로 걸어나갈 뻔했다.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이고 주위를 두른 둥근 테라스의 폭은 일 미터, 그리고 원둘레를 걸으면 이십보쯤 될 것이다. 아니, 거기서 그가 잠자는 공간을 빼야 하니까 열여섯걸음쯤 될 게다. 이미 다른 도시의 크레인에 올라갔던 이들이 있어서 생존하는 방법은 학습이 되어 있던 터였다. 이진오도 잘 아는 용접공 영숙이누나는 농성할 때 크레인의 운진실을 숙소로 삼았고 철탑 기둥들사이에다 토마토며 화초를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 거대한 조선소의 철탑이 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거대한 쇳덩어리에 올라앉은 작고 여린 살아 있는 몸을 쇠의 부속품처럼 물질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건너편 다른 크레인들이 모두 활엽수로 변하고 바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진오는 그녀처림이 굴뚝을 무엇인가 근사한 조형물로 바꾸지는 않았다. - P8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연둣빛 어린 떡잎으로 자라나 쑥쑥 커진 잎사귀들은 녹색이 짙어지고 윤이 나면서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 P31

올라온 저녁밥을 텐트 안으로 상반신만 들이밀고 먹었다. 우비의 모자에서 떨어진 빗물이 밥과 찌개 위로 흘러내렸다. 밥 바구니를 내려주고 난간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천천히 걸음을떼어놓으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 P33

갑자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철도 연변의 드넓은 논밭과 삼림과 마을이 갑자기 징발되었다. 일본과 한국 정부가 협정을 맺었다지만 이미 국권을 잃기 시작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거의가 일본의 앞잡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철도회사는 철도 연변의 땅들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을 철도의 부속 대지로지정했다. 처음에는 거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보상을 해주는 척하다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군대가 직접 정발하기 시작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기사들과 그 아래 청부를준 일본의 토건회사들과 철도 노동자가 일본군을 앞세우고 공사에 필요한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삼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경부철도를 놓는과정 자체가 개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본의 열악한 자본의 열세를 철도부지의 약탈로 만회해갔던 과정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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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가지 선물은 자살하신 할머니 사진이었어요. 나는 그 선물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할머니는 아름다우셨어요. 시선을 내리깐 옆모습이었죠. 삼십대 초반의 모습일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흑백사진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사진을 연푸른색 대지에 붙이고 은색액자에 끼워 내게 선물하신 거지요. 어머니께서 내가 앉아 있는 의자로 다가오시더니 왜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때문에 우느냐고 하셨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할머니는 나와 같은 병을 앓으셨어요.‘ 난 지금도 울고 있어요. 슬퍼서가 아니라 감격해서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수술 덕분에 살고 있는 거니까. 부모님과 의사들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항상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지만요." - P271

만일 인간 게놈이 3만 개가량의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면(점점 더 많은 유전자들이 발견되면서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각 유전자마다 열 가지 정도의 중요한 변이들이 있다면 질병에 대한 유전적인 취약성을 유발하는 후보자 수는 100,000 개가된다. 일부 유전자를 밝혀내는 시점에서 그 유전자들이 상이한 환경적 자극들에 대하여 상이한 단계들에서 상이한 조합들을 이룰 때 어떤 상이한 결과들을 내는지 모두 밝혀내는 시점까지는 얼마나 먼길일까? 모든 조합의 가능성들을 확인하려면 무지막지한 분량의 작업이 요구된다. 그리고 다양한 외부 상황들에 적용해 보는 절차도 필요하다. 컴퓨터의 속도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이 모든 것을 밝혀내려면 아직 요원하다. 인간의 모든 질병들 중에서 우울증은 지나치게 속단된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나는 유전학자는 아니지만 우울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자 수는 최소한 수백을 넘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유전자들이 외부 자극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울증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우리 몸에 유익한 기능들도 수행할 것이므로 파괴해 버린다면 심각한 부작용을 겪게 될 것이다. 유전자 정보가 특정한 종류의 우울증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겠지만 유전자 조작을 통한 우울증의 근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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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서양 사람들이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그들과 함께 곳곳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그때 문득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북쪽 방향을 향해 설치되어있는 커다란 위성 수신 접시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는 미국 방송의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일하는 관계자들을 위한 일종의 휴게실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 사람들의 현재 삶은 여러가지 퍼포먼스로 보여 준 전근대적 삶과 같다고 말할수 있을까? 그보다는 글로벌화의 영향권에 들어와 혼종문화를 만들어 가는독특한 삶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근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하기 쉬운 지구 한구석의 토착민들도 자본주의 경제의 글로벌화에 편입되어 우리와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순수한 자급자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던 전통문화는 사실상 거의 사라져 버렸고, 시장경제가 지구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이제 그들도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아마존 원주민들이나 뉴기니의 토착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문화 퍼포먼스를 택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옷을 벗고 때로는 진지하게또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조상들의 과거를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하며 자본주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P161

소림 말고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객들의 생각과 행동은 인공조미료를 싹 뺀, 투박하면서도 담백한 자연의 맛과 같았다. 장거리 여행에 익숙한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멍하니 시간 때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또 표피적인 웃음기를 뺀 무뚝뚝한 표정과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절제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관심사가 통하기라도 하면, 마음속 깊은 곳의 친절과 호의를 꾸밈없이 표출했다. 이런 그들과 대화할 때는 더들더듬 짤막한 러시아어와 영어를 섞어서 주고받아 보지만 한계가 있기는 했다. 오히려 각자의 언어로 조잘거릴 때 신기하게 소통이 잘 됐다. 눈빛으로, 손짓으로, 살가운 어깨동무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훈훈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이는 그동안 그런 방식의 친절과 호의에 익숙하지 않던 내가 느끼는 부담감일 뿐이었다.
열차는, 특히 야간열차는 사람 냄새를 맡고 서로 소통하며 이해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객차 안 개방된 공간에서 며칠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각별하고도 편안한 느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자석처럼 붙었다가 천천히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는 차창 밖 풍경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것도, 시베리아 벌판을 붉게 물들이는 어슴새벽이나 해거름을 보며 쓸쓸한 마음을 느끼는 것도 모두 선택 사항일뿐이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함께하고 있어 이 세상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 P176

아프리카에도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희한한 지명들이 많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잠비아 짐바브웨접경지대의 빅토리아폭포Victoria Falls는 유럽인으로는 처음 그곳에 도착한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이름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엄연히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마치 하얀 도화지같이 비어 있는 땅으로 인식했다. 그러니 처음 도착한 땅에자기 마음대로 지명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 원주민인 칼롤로로지족에게 그 폭포는이미 신성한 ‘모시-오야툰야‘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이었다. 참으로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지명이 아닌가?
지도를 펼쳐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기니Guinea 만도 살펴보자. ‘상아해안‘ ‘설탕 해안‘ ‘후추 해안‘ ‘노예 해안‘ 등 희한한 지명들이 붙어 있다. 이곳에 있는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라는 이름의 국가는 또 어떠한가.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이 국가명을 영어로 옮기면 ‘상아 해안‘을 뜻하는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가된다. 상아해안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별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중동이니 극동이니 하는 지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유럽 중심적인 지명이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를 볼때 가장 가까운 곳인 터키반도 일대가 근동Near East, 중간쯤은 중동Middle East, 가장 멀리 우리가 속해 있는 동북아시아 일대가 극동Far East이기 때문이다. 유럽으로부터의 거리를 기준으로 붙인 그들 중심의 지명들이 지금도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 P188

여행지는 현지인의 삶의 터전이지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현지인은 여행자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터를 소중하게 품고서 열심히 살아간다. 여행자가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를 일탈의 행복과 새로움의 추구를위한 대상으로 잠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현지인은 일상의 행복을 가꾸면서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으로써 그곳을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소중한 곳에서 여행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여행지와 현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예의가 필요하다. - P199

그런데 이내 나는 그 아름다운 피오르의 마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 속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부풀어 오른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페리가 속도를 늦춰 아름다운 마을 레이캉에르Leikanger의 선착장에 정박하자, 곧이어 마을 주민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목적을 이루고자 베르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배는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용 페리인 동시에 대중교통, 즉 우리로 따지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완행 시외버스였던 것이다.
물론 탑승객의 수를 비교해 보면, 관광용 페리로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대중교통용 여객선으로 이용하는 주민보다 훨씬 큰비중을 차지했다. 더군다나 여행자들은 큰돈을 들여 먼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지인이 누리는(누려야 할 ‘삶터‘에서의 권리보다 여행자들이 누리는(누려야 할) ‘여행지‘에서의 권리가 더 크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는 숫자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또 비용 지불의 여부와 상관없이 여행지에서 늘 손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잠시 방문하는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 잘 유지되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여행자들의 책무다. - P201

그러나 수용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관광객이 몰려오면 그곳을 삶터로 삼고 있는 주민들은 전에 없던 불편함을 겪게 된다. 이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혹은 과잉관광이라고 한다. 관광객의 증가로 인한 소음 증가, 쓰레기 증가, 교통 및 주차 혼잡, 환경파괴, 물가와 주거비 상승, 지역정체성 혼란 등이 주민들의 삶터를 열악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때로는 관광혐오, 즉 투어리즘포비아 tourism phobia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외래투기 자본의 유입으로 주거지와 상가의 임대료가 과도하게 높아져 원래의 주민들이 자신의 삶터를 떠나기도 하는데, 이를 투어리스티피케이션 touristification이라고 한다. 도시 내 특정 지역이상업화되고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현지인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삶터를 떠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과도한 관광지화touristify와 관련해 발생할 수도 있음을 나타낸 용어다. - P203

이처럼 도움의 손길에 어려움이 해소되는 경험을 할 때마다나는 여행자야말로 정말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지인들 역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면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장소에서만큼은 어리숙한 이방인 여행자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여행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 않다면 현지인에게 공손한 자세로 마음을 열어 보자. 그들은 우리의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여행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들 역시 경계를 풀고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다. - P212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지인과 여행자 간의 오가는 시선이 서로 불편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이 내가 원하지 않는 혹은 예상치 못한 시선이라면 불쾌한 감정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현지인도 같은 시선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불쾌한 감정을 갖는다.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을 향한 선진국 사람들의 응시의 권력, 즉 위험한 식민주의적 세계관은 그들에게 커다란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 P216

여행 중에는 몸으로 전해지는 다채로운 느낌들 그리고 순간순간 번득거리는 앎의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몸속에서 과포화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크고 작은 느낌과 생각은 정제되지 않으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느낌과 생각이 소중하다면, 그래서 몸속에 오래 붙들어 두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면 부지런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 P233

일상을 떠난 경계 너머로의 여행은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기간 동안에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여행은 인생의 긴 여정과 비교해 본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여행이주는 재미와 의미는 한순간의 거품처럼 일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것들이 아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되어 화석처럼 남겨지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거름이 된다. 그래서나는 오늘도 떠남의 설렘을 안고 지리를 공부한다. 그렇게 항상 여행을 준비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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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일 월요일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칼손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 곡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그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사실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날 알란은 백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백회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양로원 라운지에서 한 시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시장도 초대되었고, 한 지역 신문도 달려와 이 행사를 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노인들은 모두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기다리는 중이었고, 성질머리 고약한 알리스 원장을 위시한 양로원 직원 일동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파티의 주인공만이 불참하게 될 거였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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