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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 - P7

이진오가 한달 전 깊은 밤중에 기어오른 이곳은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아파트 십육층과 엇비슷할 것이다. 요즘 아파트 건물이 보통 이삼십층 높이라서 그에 익숙했던 탓인지 이 굴뚝 위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간이 좁고 사방이 휑하니 열려 있어서 처음에는 난간 너머 허공으로 걸어나갈 뻔했다.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이고 주위를 두른 둥근 테라스의 폭은 일 미터, 그리고 원둘레를 걸으면 이십보쯤 될 것이다. 아니, 거기서 그가 잠자는 공간을 빼야 하니까 열여섯걸음쯤 될 게다. 이미 다른 도시의 크레인에 올라갔던 이들이 있어서 생존하는 방법은 학습이 되어 있던 터였다. 이진오도 잘 아는 용접공 영숙이누나는 농성할 때 크레인의 운진실을 숙소로 삼았고 철탑 기둥들사이에다 토마토며 화초를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 거대한 조선소의 철탑이 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거대한 쇳덩어리에 올라앉은 작고 여린 살아 있는 몸을 쇠의 부속품처럼 물질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건너편 다른 크레인들이 모두 활엽수로 변하고 바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진오는 그녀처림이 굴뚝을 무엇인가 근사한 조형물로 바꾸지는 않았다. - P8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연둣빛 어린 떡잎으로 자라나 쑥쑥 커진 잎사귀들은 녹색이 짙어지고 윤이 나면서 햇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 P31

올라온 저녁밥을 텐트 안으로 상반신만 들이밀고 먹었다. 우비의 모자에서 떨어진 빗물이 밥과 찌개 위로 흘러내렸다. 밥 바구니를 내려주고 난간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렸고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천천히 걸음을떼어놓으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 P33

갑자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철도 연변의 드넓은 논밭과 삼림과 마을이 갑자기 징발되었다. 일본과 한국 정부가 협정을 맺었다지만 이미 국권을 잃기 시작한 한국 정부의 관리들은 거의가 일본의 앞잡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철도회사는 철도 연변의 땅들뿐만 아니라 역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을 철도의 부속 대지로지정했다. 처음에는 거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보상을 해주는 척하다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군대가 직접 정발하기 시작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기사들과 그 아래 청부를준 일본의 토건회사들과 철도 노동자가 일본군을 앞세우고 공사에 필요한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의선 구역에서 더욱 심각하여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몇푼씩 눈가림으로 내주던 보상금마저도 지방 관아의 한국 정부 관료나 아전들이 착복하였다. 백성들은 토지뿐만 아니라 집과 삼림, 조상의 무덤까지도 헐값에 빼앗겼다. 경부철도를 놓는과정 자체가 개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본의 열악한 자본의 열세를 철도부지의 약탈로 만회해갔던 과정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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