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와는 대극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보는 ‘참여파‘의 신진들의 과오는 무엇인가. 이들의 사회 참여 의식은 너무나 투박한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국의 세력에 대한 욕이라든가, 권력자에 대한 욕이라든가, 일제 시대에 꿈꾸던 것과 같은 단순한 민족적 자립의 비전만으로는 오늘의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는 독자의 감성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단순한 외부의 정치 세력의 변경만으로 현대인의 영혼이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현대의 예술이나 현대시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시가 상대로 하고 있는 민중-혹은 민중이란 개념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세계의 일환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라 우물 속에 빠진 한국인 같다. 시대착오의 한국인, 혹은 시대착오의 렌즈로 들여다본 미생물적 한국인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라보는 즉, 작가가 바라보는 군중이고 작가의 안에 살고 있는 군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와 함께 앞을 향해 세차게 달리고 있는 군중이 아니라, 작가는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유리)에서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오늘의 민중을 대변하는 시는 민중을 바라보는시가 아니다. - P464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상상은 다시 비약해서 이 메모를 다음과 같은 언어론으로 고쳐 본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잡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도 만족할 줄 안다.

이런 즉흥적인 수정의 유희를 하는 끝에 첫머리의 것까지도 고쳐보려면 이렇게 고칠 수가 있다.

지금의 언어도 좋고 앞으로의 언어도 좋다. 지금 나도 모르게 쓰는 앞으로의 언어. - P468

이런 언어의 로테이션은 어느 시대이고 있는 일이지만, 다만 오늘의 시대는 박자가 빠른 시대라 그에 따라서 그 회전도가 갑자기 빨라져서 눈에 뜨일 따름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명까지도 날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에는 일제 시대의 저해로 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던 낱말들이 요즘에 와서 새로 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이것들의 처리가 힘이 들 때가 많다. 국민학교 아이들의 교과서나 자연학습도감 같은 데에 나오는, 동물, 식물, 광물 이름 같은 것 중에 그런 것이 많다. 이를테면 ‘바랭이풀‘ 같은 것도 보기는 많이 본 풀인데도 일단 글 속에 써 보려고 하면 어쩐지 서먹서먹하다. ‘개똥지빠귀‘란 새 이름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실감이 안 나는 생경한 날말들을 의식적으로 써 볼 때가 간혹 있다. ‘제3인도교‘의 ‘과오‘를 저지르는 식의 억지를 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구태여 말하자면 진공(眞空)의 언어다. 이런 진공의 언어 속에 어떤 순수한 현대성을 찾아볼 수없을까? 양자가 부합되는 교차점에서 시의 본질인 냉혹한 영원성을구출해 낼 수 없을까? - P470

그러면 진정한 아름다운 우리말의 낱말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반드시 순수한 우리의 고유의 낱말만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이 점에서 보아도 민족주의의 시대는 지났다. 요즘의 정치 풍조나 저널리즘에서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세력에 대한 대칭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실생활이나 문화의 밑바닥을 정밀경(精密鏡)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문화에 적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언어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그 생활은 민중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 전자가 주(主)요. 후자가 종(從)이다. 민족주의를 문화에 독단적으로 적용하려고 드는 것은 좋을 가지고 주를 바꾸어 보려는 우둔한 소행이다. 주를 바꾸려면 더 큰 주로 발동해야 한다.
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 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이 수정의 작업을 시인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서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낱말들, 오오 침묵이여, 침묵이여.
1966. - P472

좌우간 이런 작가들은 대부분이 제각기의 창(窓) 앞에 서서 "모든창은 신화의 모양을 취하거나, 아니면 사실의 모양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창은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생겼어요." 하고 말함으로써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1966. - P479

초현실주의 시대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는 실존주의 시대에 와서는 실존과 이성의 관계로 대치되었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참여시라는 것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것은 이념과 참여 의식의 관계로 바꾸어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형적인 정치 풍토에서는 참여시에있어서의 이념과 참여 의식의 관계가 더욱 미묘하고 복잡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숨바꼭질과는 다른 외부적인 터부와 폭력이 개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의 오늘의 실정은 진정한 참여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참여시라는 이름의 사이비 참여시가 있고, 좋게 말하면 참여시가 없는 사회에 대항하는 참여시가 있을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시에 있어서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의식이 무의식의 중인이 될 수 없듯이, 참여 의식이 정치 이념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행동주의자들의 시인 것이다. 무의식의 현실적 증인으로서, 실존의 현실적 증인으로서 그들은 행동을 택했고 그들의 무의식과 실존은 바로 그들의 정치 이념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불가능이며 신앙인데, 이 신앙이 우리의 시의 경우에는 초현실주의 시에도 없었고 오늘의 참여시의 경우에도없다. 이런 경우에 외부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외부와 내부는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합치되는 것이다. - P488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P498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서방즉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군거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중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 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지적 일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못한 말을. 그것을.
1968.4. - P502

하지만 이것을 무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근대적인 감상일 것이다. 고약한 취미의 불쾌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천박한 반응일 것이다. 분명히 모든 메멘토 모리는 냉수를 등골에 끼얹으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고, 냉수가 가장 유효한 순간에 끼얹어지게꾸며져 있다. 축제의 술이나 환성에 취해 들어가려는 마음에, 그것은한 조각의 정기(正氣)를 불러일으켜 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연회 행진의 중지를 바라는 소리는 아니다. 편안한 체념과 무위에의 유혹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각성된 생명을, 끊임없는 새로운 출발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의 악의가 깃들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한 너무나도 자명한 기본적인 진실을 납득시키기 위한 양념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진실을 확보하기 위해서 먼 고대의 장군들은 노예를 사용하고,
왕후들은 일부러 입이 건 어릿광대를 고용했다. - P520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설명은 발언이 아니다. 그리고 설명이 아닌 발언을 하기 위해서는 사상과 사상의 여과가 필요하다. 우리의 현대시가 겪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포즈를 버리고 사상을 취해야 할 일이다. 포즈는 시 이전이다. 사상도 시 이전이다. 그러나 포즈는 시에 신념 있는 일관성을 주지 않지만 사상은 그것을 준다. 우리의 시가 조석으로 동요하는 원인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의 다양성이나 시의 변화나 시의 실험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아니 되며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인으로서의 시인의 기저에 신념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러한, 누구나 다 아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지않으면 아니 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시단의 너무나도 많은 현대시의 실험이 방황에서 와서 방황에서 그치는 너무도 얄팍한 포즈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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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협박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서 죽음과 죽어감』(1971)에서 불치병이라는 진단에 반응하는 다섯단계라는 유명한 모델을 선보였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이다.
부정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다(‘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두 번째 단계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어 터지는 분노다(‘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 번째 단계는 사실을 어떻게든 미루거나 축소시키려는 타협의 태도다("적어도 애들이 학교 마치는 것은 보게해줘). 네 번째 단계는 우울증이다(성적 관심의 급감, 공허한 감정,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체념과 수용이다(‘어차피 내가 바꿀 수있는 게 없구나. 준비라도 잘 해두자‘). 후에 퀴블러 로스는 이 다섯 단계를 개인이 겪는 모든 비극적인 상실 경험(실직, 사랑한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약물중독 등)에 적용했고, 아울러 각 단계가 반드시 같은 순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당사자가 다섯 단계를 고스란히 거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 P7

슬로터다이크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개방과 정복을 노릴뿐 아니라 안과 밖을 가르는 독자적 세계를 목표로 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곧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두 측면은 서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으로 분리되었다.
파리 테러 공격과 물밀 듯 몰려오는 난민 행렬도 우리의 지붕 밖 세상이 얼마나 폭력으로 물들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바깥세상은 아주 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들일 뿐이다. 그리고 결코 우리현실의 일부가 아닌 듯 다루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접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붕 밖 모든 것을 장악한 이 잔혹한 폭력을 온전히 의식해야만 한다.- 폭력은 종교, 인종, 정치에 그치지 않고 섹스의 영역까지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 P10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달라는 호알고 있다"
소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지는 이미 1세기 전 오스카 와일드가 밝힌 바 있다. 에세이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들은 끔찍한 가난과 끔찍한 추레함과 끔찍한 굶주림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모든 것들에 커다란 영향을받는다. 인간의 감정은 지성보다 훨씬 더 빨리 자극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람들은 방향이 잘못되긴 했어도 훌륭한 의도로,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매우 감상적으로 자신들이 목격하는 악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은 질병을 치유해주지못한다. 처방은 병을 연장시킬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처방은 질병의 일부인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의생을 유지시킴으로써, 혹은 매우 진보적인 한 학파의 경우처럼 가난한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빈곤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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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소월은 자기 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 명씩 모아 놓고 고가의 과외 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 선생은 될 수 없었다. - P269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필자(이어령)는 ‘에비‘라는 말의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란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다.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을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에비‘를 이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名詞)가 아닌‘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다. 8.15 직후의 2~3년과 4.19 후의 1년 동안을 회상해 보면 누구나 다 당장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필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점이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이실제 이상의 과대한 공포증과 비지성적인 퇴영성을 나무라고 독려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필자의 말대로이러한 반문화성이 대두되고 있는 풍토 속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의 창조의 그림자를 미래의 벌판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 ‘그 에비의 가면을 벗기고 복자(伏字) 뒤의 의미를 아무리 ‘명백하게 인식해 보았대야 역시 거기에는 복자의 필요가 있고 벽이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의 복자와 벽을 문화인도 매스 미디어도 뒤엎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있을때마다 번번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 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필연적으로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유아 언어‘이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의 이곳과 같은 ‘주장‘도 ‘설득‘도 용납되지 않는 지대에 있어서는 더말할 것도 없다. - P300

이어령 씨의 이번의 나에 대한 반론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의 모함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것을 일일이 가려낼 만한 의미를 나는 느끼지않는다. 다만 나의 창작 자유 고발의 실제적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설명해 두고자 한다. 비근한 예가, 지금말한 이어령 씨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의 소위 ‘불온시‘다.
지금 말한 것처럼 이어링 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 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어령 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 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 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 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 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1968.3. - P309

요즈음 잡지사의 권유로 ‘시 월평‘이라는 걸 써 보았는데, 그 바람에 시는 통 못 썼다. 시인은 심판을 받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시인이 심판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번민을 하게 된다.(남에게 얻어먹은 욕은 즉석에서 철회할 수 있지만, 남에게 한 욕은 철회하기가 매우 힘들다.) 또한 사기를한다. 심판을 하자면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데 이 올가미에 자신까지걸려들기는 싫다. 자기가 걸려드는 올가미는 시를 다칠까 보아 싫고 자기가 걸려들지 않는 올가미는 비평이 거짓말이 되니까 싫다. 나의 월평이 게재된 같은 잡지에 소설평을 담당한 H씨의 글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특히나 요새처럼 작가의 정치색을 가장 날카롭게 작품속에 구상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을 때 이러한 유행을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라고 봐야 옳을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앗차!‘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H씨의 소설평이 실린, 같은 잡지에 나의 시월평이 그분의 글과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이달뿐이 아니라 지난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분은 소설 월평을 썼다. 이달뿐이 아니라 다음 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는 소설 월평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달에도 이달에도 시의 현실 참여를 주장해 왔고 내달에도 그것을 주장할 참이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그분의 글을, 내가 쓴 글을 읽는 끝에 마을 가는 기분으로 읽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연 3회를 현실참여의 월평을 써 온 끝이라 또 다음 호에도 똑같은 논지를 내세우는것이 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재빨리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그런 말을 암시해놓았다.  - P345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요즘의 시단 저널리즘은 현실 참여의 시라고 해서 무조건 비참한 생활만 그려야 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신문 논설란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작품들을 도매금으로 난해시라고 배격하는 성급한 습성에 흐르고 있다. 우리의 주위는 모든 정경이 절박하기만 하다.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참말로 눈을 돌릴 곳이 없다. 우리의 양심의 24시간은 온통 고문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시는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시의 양심을 지킬 만한 여유는 가져야 할 것 같다. 시대는 언제나 성인(聖人)이 되라고만 하지 시인이 되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을 만들어야 할 때도 성인이 되라고 한다. 이런 유혹에 쏠려들 때 항용 가장 위험한 자위의 시가 나오기 쉽다. - P355

국민가요가 추상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은 국민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되어야 하고, 한 사회에서 노래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려면 우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회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북의 노래도 식민지의 노래에 지나지않으며, 그것은 너무나 ‘씩씩하고 건전한‘ 식민지의 노래다.
우리들은 이제 이북식의 ‘씩씩하고 건전한‘ 잠재의식에서 벗어날때가 왔다. 언젠가 대학생들의 단식 데모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익살스럽게 풍자한 노래가 읊어진 것을 보았는데, 국민가요의 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철두철미 하극상의 정신이다.
따라서 좋은 국민가요가 나오는 사회는 진정한 기골 있는 야당과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이 있는 사회이며 청년들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 좋은 국민가요가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천재적인 작사자나 작곡가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남북통일과 현대 공업화의 비전이 아직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 P367

그러나 이렇게 남의 일만 이야기하다 보니 어쩐지 내 발밑이 불안해진다. 지난 4개월 동안 본지에 ‘시 월평‘이란 것을 쓴 것을 반성해볼 때 정말 정직한 말을 썼는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나도 어느 사이에 ‘적당히‘ 쓸 줄 아는, 때가 묻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무슨 38선 같은 선이 눈앞을 알찐거린다. 이 선을 넘어서야만 순결을 이행할 것 같은 강박관념. 우리는 무슨 소리를 해도 반 토막 소리밖에는 못하고 있다는 강박관념. 419 후에 8개월 동안 잠깐 누그러졌다가 다시 굳어진 강박관념. 나는 몇 년 전까지만도 이러한 강박관념을 우리나라만의 불행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거기에 세계의 얼굴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있었지만, 여기에 비친 세계의 얼굴이 이중이나 삼중 유리 결장에 비치는 얼굴 모양으로 윤곽이 엇갈려서 어떤 것이 어떤 얼굴인지 분간함수 없게 되는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따라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38선이 없어지면 그것은 해소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38선이 없어져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또 다른 선이 얼마든지 연달아 생길 것이라는 예측이 서 있다. 35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는 귀결이 온다.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에서는 작가의 책무가 이행될 수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수수께끼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이북보다 이쪽이
‘비교적‘ 자유가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가 있는 사회다. 그런데 이 지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절대적인‘ 권리에 ‘조건‘을 붙인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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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함석헌 씨의 잡지의 글이라도 한번 읽어 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가슴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 버려라!
필자는 생업으로 양계를 하고 있는 지가 오래되는데 뉴캐슬 예방주사에 커미션을 내지 않고 맞혀 보기는 이번 봄이 처음이다. 여편네는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더라. 백성들은 요만한 선정(善政)에도 이렇게 감사한다. 참으로 우리들은 너무나 선정에 굶주렸다. 그러나 아직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모이값이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이값은 나라 꼴이 되어 가는 형편을 재어 보는 가장 정확한 나의 저울눈이 될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 같아서는 형편없이 불안하니 걱정이다. 또 이 모이값이 떨어지려면 미국에서 도입 농산물자가 들어와야 한다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나?
여하튼 이만한 불평이라도 아직까지는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민국일보》 (1961,4,16) - P-1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현상에서는 진지란 침묵으로 통한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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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삼가며 쓴 것이 역시 이렇게 따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글의 의도는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 당시만 해도 글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당시는 문명(文名)이 있는 소설가 아무개보다는 복쌍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더 무게를 가졌던 시절이고, 예술 청년들은 되도록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그 당시의 표준을 가지고 재어 볼 때 정도(正道)를 밟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몇 사람이나 될까. 가장 가까운 주위에 자랑할 만한 사람이라면 이활, 심재언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들도 그때만큼 틈이 없다. 아웃사이더도 시간의 여유가 있어야 되고, 공부하고 놀 틈이 있어야 되는데 이들에게는 공부할 시간도 놀 장소도 없다. 질식한 아웃사이더들이다.  - P178

이 글을 쓰려고 까만 볼펜을 드니 둘째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이 변색을 한 것이 눈에 뜨이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오. 변색이란 것이 과장이 아니오. 하얗게 바래 있소. 아니 하얗게 떠 있소. 두 손가락의 피부가 표백을 한 거요. 술잔을 쥔 부분의 피부가 표백을 한 것이오.
어저께 당신이 준 5000원 중에서 2500원어치를 마신 거요. 내가 쓴 돈이 그것이지 마신 분량은 내가 지불한 돈의 배가 더 될 거요. 내가 낸돈은 일차의 대푯값하고 이차의 맥주값뿐이지, 삼차에 들어앉은 집에서 마신 것은 다른 친구가 냈으니까. 술 많이 마셨다는 자랑이 아니오.
괴롭단 말이오. 아침에 깨어 보니 또 요에 오줌을 쌌구려. 지금 이 글을 그 축축한 요 위에 팔을 비벼 대면서 쓰는 거요. 정말 괴롭소. 비명이 아니오.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 P184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 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 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 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 속물이란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 P189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12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 소설가나 방송 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 소설가나 방송 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 단체와 예술 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 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 P191

목욕통에 얼어붙었던 물이 윗덮개가 조용히 풀리기 시작한다. 위의 3분가량에 흥건히 물이 괴어 있고, 얼음의 근심은 소리 없이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직도 마당 위에 얼어붙은 먼지에 쌓인 얼음들은 요지부동이지만, 직경 2미터도 안 되는 목욕솔의 해빙이 알려 주는봄의 전조는 새싹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새싹이 틀 때 봄을 느끼는 것은 이미 늦은 감이 들고, 가을의 낙엽을 보고 셸리처럼 지나치게 일찍이 봄을 예고하는 것은 너무 시적이어서 싫고, 그저 남보다 조금먼저 범인(凡人)처럼 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 좋다.
새싹이 솟고 꽃봉오리가 트는 것도 소리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침묵의 극치가 해빙의 동작 속에 담겨 있다. 몸이 저리도록 반가운 침묵. 그것은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동작 속에 사랑을 영위하는 동작과 침묵이 일치되는 최고의 동작이다.
가라앉은 얼음을 겨우내 굳어 온 근심이라고 생각할 때, 이 불행의 잠수 행위는 희열에 찬 풍자까지도 풍겨 주고, 어지러운 현실의 걱정이야 어찌되었든 우선 까닭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돗가에 씻어 놓은 저녁쌀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보이고, 마루에 올라와 난롯가에서 손을 비벼 보면 손의 두께까지도 제법 두툼하게 느껴진다. - P209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란 반드시 시 작품을 신문이나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 을 냉담하게 보고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날뛰는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 장 다 봤어. 그런 폭도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 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한 번 책형대(책刑臺) 위에 걸어 놓았다.
《경향신문》, 1960.5.20 - P232

일전에 4월 이후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잡담이 나온 자리에서 어느문학지 기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통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이것이 ‘나츠가레‘‘가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몰두하여 문학잡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된 바람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말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한시(閑時)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은 (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문학계 전반에 대한 기막힌 모욕이요 경멸이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인일진대,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 P237

이(李) 정권 때의 일이다. 펜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 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 자유가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
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은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 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 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터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 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 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년 동안 문학 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 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 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 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 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 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였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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