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협박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서 죽음과 죽어감』(1971)에서 불치병이라는 진단에 반응하는 다섯단계라는 유명한 모델을 선보였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이다.
부정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다(‘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두 번째 단계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어 터지는 분노다(‘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 번째 단계는 사실을 어떻게든 미루거나 축소시키려는 타협의 태도다("적어도 애들이 학교 마치는 것은 보게해줘). 네 번째 단계는 우울증이다(성적 관심의 급감, 공허한 감정,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체념과 수용이다(‘어차피 내가 바꿀 수있는 게 없구나. 준비라도 잘 해두자‘). 후에 퀴블러 로스는 이 다섯 단계를 개인이 겪는 모든 비극적인 상실 경험(실직, 사랑한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약물중독 등)에 적용했고, 아울러 각 단계가 반드시 같은 순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당사자가 다섯 단계를 고스란히 거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 P7

슬로터다이크는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개방과 정복을 노릴뿐 아니라 안과 밖을 가르는 독자적 세계를 목표로 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곧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두 측면은 서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전 세계에 철저한계급 분리를 선포했다. 이로써 내부 영역에서 보호받는 계급과 그 보호권 바깥에 있는 계급으로 분리되었다.
파리 테러 공격과 물밀 듯 몰려오는 난민 행렬도 우리의 지붕 밖 세상이 얼마나 폭력으로 물들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바깥세상은 아주 멀리 떨어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들일 뿐이다. 그리고 결코 우리현실의 일부가 아닌 듯 다루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접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붕 밖 모든 것을 장악한 이 잔혹한 폭력을 온전히 의식해야만 한다.- 폭력은 종교, 인종, 정치에 그치지 않고 섹스의 영역까지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 P10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달라는 호알고 있다"
소만으로는 왜 충분하지 않은지는 이미 1세기 전 오스카 와일드가 밝힌 바 있다. 에세이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서두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들은 끔찍한 가난과 끔찍한 추레함과 끔찍한 굶주림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모든 것들에 커다란 영향을받는다. 인간의 감정은 지성보다 훨씬 더 빨리 자극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람들은 방향이 잘못되긴 했어도 훌륭한 의도로,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매우 감상적으로 자신들이 목격하는 악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은 질병을 치유해주지못한다. 처방은 병을 연장시킬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처방은 질병의 일부인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의생을 유지시킴으로써, 혹은 매우 진보적인 한 학파의 경우처럼 가난한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빈곤의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