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00명의 소련군이 진저우에 주둔했다. 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일본인들을 쫓아내는 데 도움을 준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항복하면서 학교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개인교습을 받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로가에 주차된 트럭이 보였다. 몇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그 옆에 서서 직물을 내주고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 직물은 엄격하게배급되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 보려고 가까이 갔다. 그 직물은 어머니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서 일했던 공장에서 나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그 직물을 손목시계, 괘종시계, 장신구 등과 교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 옷장 밑바닥에 낡은 시계가 들어있던 것을 기억하고 집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 시계가 고장났음을 알고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러시아 군인들은 그것을보고 좋아하면서 섬세한 분홍 꽃무늬가 있는 피륙 한 필을 어머니에게 내주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들은 쓸모없고 낡은 고장난 시계와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물건들을 탐내는 그 이상한 외국인들이야기를 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소련인들은 공장의 물건들만 꺼내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공장 전체를 아예 뜯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진저우에 있던 2개의 정유소도 해체해서 그 장비들을 소련으로 실어갔다. 그들은 그것들이 "전쟁 보상금"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이것은 산업의 마비를 뜻했다. - P122

소련도 공식적으로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정부로 인정했다. 11월 11일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진저우 지역을 떠나 북만주까지 물러났다. 승전 후 3개월 이내에 이 지역에서 철수하겠다고 한 스탈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단독으로 이 도시를 통제하게 되었다. 11월 하순의 어느날 저녁,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는 많은 군인들이 서둘러무기와 장비를 챙겨들고 남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도시주변의 시골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는 거라고 짐작했다.
이 퇴각은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국민당군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할 도시를 버리고 농촌지역으로 퇴각하라는 것이 마오쩌둥의 전략이었다. "농촌이 도시를 포위해서 궁극적으로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이 마오쩌둥이 새로 내린 지침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진저우에서 철수한 다음 날, 새로운 군대가 진주했다. 4개월 동안에 네 번째 군대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 군대는 깨끗한 제복을 입고 있었고, 번쩍이는 새 미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국민당 군대였다. 사람들은 집에서 뛰어나와 좁은 흙길 거리에 모여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어머니는 흥분한 군중들을 헤치고 맨앞줄로 나갔다. 문득 어머니는 자신이 두 팔을 내두르며 큰 소리로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군대야말로 일본군을 무찌른 군대 같아 보인다고 어머니는 혼자 생각했다. 어머니는 매우 흥분된상태로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에게 그 멋진 새로 진주한 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P126

그제야 어머니는 영화관에서 있었던 사건이 후 청년의 비밀 임무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와 화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팠다. 어머니는 그들의 집에 세들어 사는 위우 역시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우가 후청년을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은 그를 그곳에 숨기기 위해서였다. 후 청년과 위우는 그날 저녁까지 서로의 신분을 몰랐다. 두 사람은후 청년이 그곳에 머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와 어머니의 관계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요원들이그를 찾기 위해서 그 집에 온다면, 위우마저 발견될 위험이 있었다. 그날 밤 후 청년은 도시경계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공산당 통제지역까지 탈출하려고 했다. 얼마 후, 봄의 새싹이 돋아날 무렵, 위우는 후 청년이 도시를 떠나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안내하던 사람은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얼마 후 후 청년이 처형되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어머니는 국민당에 점점 더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가아는 유일한 대안은 공산당이었다. 어머니는 여성 차별을 없애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약속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열다섯 살이었던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직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에 투신할 준비가 되지않았다고 느꼈다. 후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공산당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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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 P90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과 글은 또 쓰임이 굉장히 달라요. 말은 발화자와 구체적인 맥락 모두를 담고 있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화사건 (speech event)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글은 구체적인 맥락이나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에요. 또 말은 호흡이 짧아요. 하지만 글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일종의 저장장치가 되죠. 외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역할을 한달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긴 스토리나 논리를 전개하는 게 가능한 겁니다. 예를들어, 순수하게 말로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쓸 수 있을까요? 이건안 되는 거거든요. 말로 《토지》를 풀어내는 것, 구술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대충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소설이 가진 정교함과 플롯, 그 정도의 스케일과 캐릭터를 말로써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이, 박경리 선생이 글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텍스트가 있었기에 세상을 바꾼 작품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쓰기라는 건 말을 그냥 옮겨놓는 게 아니에요. 말이 문자화되는 순간, 문자가 그 자체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예를 들면 길고 촘촘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거나,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 또 고도의 추상성을 갖춘이론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일 등이 있죠.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르크스나 헤겔, 도스토옙스키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향유하거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가 쓰기라는 겁니다. - P98

시스템을 짠다는 것은 사유로써 가능한 것이지, 말로써는 부분밖에 못 해내요. 글로 써놔야 이 부분과 저 부분을 이으면서 한편에서는 길이를 한편에서는 스케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거죠. 그냥 길이와 스케일만 늘려놓는 게 아니라 논리적 정합성, 인과적 정합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걸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소설 하나를 읽을 때도, 어떤 인물이 왜 등장했는지를 밝히지 못하면 잘 못 쓴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길게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게 하는 데서 텍스트 이상의 수단이 아직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P110

사실, 이렇게 매뉴얼화하는 것이 한국 글쓰기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뉴얼은 사유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죠. 매뉴얼은 그대로 수행하게 하지, 그것을 응용하거나 비판하거나 유연하게 활용하게 하지 않습니다. 관료조직 같은 곳에서는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것이 정석이겠습니다만, 글을 매뉴얼대로 쓰는 것은 사유하고 의견을 만들어 세상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 시민,
시민으로서 개인의 형성을 방해합니다. - P113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 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담보될 수 있는 거예요. 복수성에 대한 역량,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복수성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복수성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담론을 생산할 것인가를 가늠해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복수성에 대한 감각을 역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P113

텍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만 다양한 글을 접하고 자신에게맞는 책을 골라서 또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겠죠. 그런데 다양한 문자매체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의미 있는 지식을 뽑아내고, 나아가 자신의 문화자본으로 삼는 건 계급적으로 분배될 가능성이 높은 능력이에요. 오히려 진짜 잘사는 집에서는 자녀들한테 인문적인 소양, 과학적인 지식을 강조하죠. 물론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모들도 노력은 하지만 물적으로, 시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자녀들이 택할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죠.
이 때문에 웹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재현될 기미가 보여요. 경제자본, 문화자본이 풍부한 가족의 경우에는 인터넷의 좋은 점을 잘 활용해요. 정보 습득, 학습, 엔터테인먼트 등을 위해 좋은 콘텐츠를 선별해서 활용하는 거죠. 그에 비해 ‘방치된‘ 아이들은 웹을 떠돌며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기 일쑤죠. 균형 잡힌 리터러시 경험 또한 이렇게 불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P119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든 통속영화든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 P130

이건 좀 조심스러운 가설인데, 자주 접하는 매체에 대한 태도가 체화되면 사람들 간의 대화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는 학생들이 강의가 재미가 없더라도 의미있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좀 참고 들어보자.‘ 하는 태도를 보였죠. 이제는 시작하면서부터 재미가 있지 않으면 그걸 들어낼 만한 의지력, 이게 안 생기는 거예요. 머리로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거죠. 선생님들은 ‘내가 무슨 엔터테이너도 아닌데, 애들을 웃겨야 돼?‘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몸은 동영상에 오래 익숙해져서 ‘몰입할 만한지 좀 보고, 아니면 만다‘는 태도에 젖어 있는 거예요. 재미가 없으면 의지나 집중력이 안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왜 그러냐고 하기가 힘들어요. 같은 텍스트를 읽을 때라도 종이책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와 모바일 기기에서 웹소설을 읽을 때 눈의 움직임이나 손가락의 까딱임, 책을 넘기기 위한 제스처가 다 다를 수밖에 없죠. 결국 다른 매체의 사용은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해가는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뇌가, 눈이,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뀌는 거죠. - P14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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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끔찍한 이유가 본질화(essentialization)하기 때문이거든요. 사람이 가진 특징 중 일부를 들어서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해버리는 것이요. ‘흑인은 이렇다‘, ‘이주노동자는 이렇다‘, ‘연변에서 온 사람들은 이렇다‘는 식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죠. 사실, 해당 집단에 속한 개개인 모두가 너무나 다양해서 한두 가지 특징으로 묶을 수는 없잖습니까. ‘한국인은 이렇다‘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위험하고 또 비과학적이죠. 조심스럽기는 한데, 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 중에 험한 말을 쓰는 분들이 간혹 있잖아요. 듣고 있으면 ‘무식해‘ 보이죠. 그런데 그 ‘무식하다는 느낌‘을 역사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해석해내지 않고 지능과 연결시켜버리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경제적인 계층을 ‘지능이 낮은 계층‘으로 본질화해버리는 거죠. 지능이 낮으니 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인데, 정말 끔찍한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와도 닿아 있고요. - P55

네. 이처럼 읽을 줄 안다 모른다를 결정하는 힘이야말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권력이 되는 거죠. 문제는, 이때 말과 글이 누구의 말과 글이냐는 것인데요. 관공서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죠. 그건 그 사람들한테는말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살아남기 위해서, 속지 않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이해해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너무 어려워요. 리터러시라는 말은 이미 ‘누군가‘의 말과 글만 말과 글로 상정하고, 그 누군가가 아닌 사람들의 말과 글은 배제하고 출발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도 리터러시에서 중요한 것이 상호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네가 말을 못 한다. 네가 글을 못 읽는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가 될 때에야 비로소 리터러시가 상호적인 것이 되고 서로가 성찰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하고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힘쓰게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읽는 방식대로 읽지 않으면 ‘너는 문맹이야, 난독증이야‘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짓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모욕하고 비인간화하는 일이에요. - P64

리터러시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어떤 윤리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이게 얼마나 권력적인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리터러시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사회를 서열화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 또는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거죠.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리터러시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가 중요한 자산을 잃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정치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징적 자산을 잃었다는 거죠. 저는 정치를 잘 모릅니다만,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메타포를 가장 노련하게 다룬 분이 노회찬 의원이었다고 생각해요. 메타포, 은유라는 게 여러 가지 담화적인 또 사회적인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논의들을 좀 더 구체적인 것과 연결시켜서 이해의 지반을 만드는 것이에요. 정치적인 논의에서 어떤 벽이 있을 때 원론적인 얘기나 단순 정보를 반복하면 정치를 둘러싸고 있는 대중, 정당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 혹은 일반 뉴스 소비자들이 바로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죠. 이럴 때 적절한 메타포를 들어주면 대번에 이해가 되는데, 중요한 건 원래 사안의 핵심을 버리지 않고 메타포에 담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빠르게 적절한 메타포를 구사하는 정치인은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에요.  - P67

이렇게 볼 때,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동일한 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요. 동일한 언어들이 반복되는 걸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동감합니다‘인데요.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을 이 사람이 썼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나하고는 다르게쓰거든요. 좀 더 디테일하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좀 더디테일하게. 대신 내가 좀 더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부분은 빠져 있겠죠. 이런 격차,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차이를 없애버리는 말이 ‘동감합니다‘예요.
생각해보세요. 동의한다, 동감한다는 말은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뜻이죠.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거기에서무슨 배움이 일어나고 도약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강화만 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게 강화라고 생각해요. 제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3부에서 제가 강조했던 게, 이런 의사소통의 공간은 서로의 감정의 강도만 강화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엄기호,2019). 공감이라는 이름으로요. 문제는 이 공간이 전혀 성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도 출간되었습니다(폴 블룸, 2019).
뭔가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 같고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도만 세질 뿐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터러시를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한 상태에서 계속 강화만 되는 것은 비문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고볼 수 있습니다. - P72

텍스트성이 자리 잡은 문화에서는 텍스트 간의 관계, 위계가 중요해져요. 어떤 텍스트가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더 큰가, 어떤 텍스트가 더 권위가 있는가, 이런 것이 중요해지죠. 리터러시 연구에 있어 기념비적인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월터 옹은 등위접속사에서 종속접속사로 넘어가는 것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사이의 큰 차이라고 얘기했어요. 쉽게 말하면, 구술문화의 특징은 발화가 and로 연결되는 데 반해 문자문화는 that과 같은 종속절이 주요한 특징이라는 거죠. 구술성의 주요한 특징이 문장이 첨가적으로 이어진다는 건데요. 아이들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해요. "이거했고 그리고 이거했고그리고 이거했어." 이 말 속의 and에는 위계가 없어요. 계속 내용이 첨가되는 거죠. 하지만 문자문화에서는 위계가 생기죠. 영어로 I think that~이라고 하면 that절이 I think의 하위로 들어가죠. Before나 after같은 접속사는 시간적인 순서를 규정하고요. 문자문화가 발달할수록 and로 연결되는 문장보다는 주절과 종속절이 결합된 문장이 많아지는 겁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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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뛰어난 학생이라는 사실 외에 황후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여학생으로 선발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샤선생과 마찬가지로 모든 서식에 있는 민족을 구분하는 난에 언제나 "만주족"이라고 기입했는데, 만주국은 만주족이 스스로 세운 독립국가라고 표방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만주국 황후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학생으로 선발되는 데 유리했던 것이다. 푸이는 일본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 황제의통치 아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샤 선생은 자신을 충성스런 신하로 생각했고 외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으로 여인이 자기 남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모든점에서 그 남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에게는 샤 선생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외할머니는 샤선생에게 매우 만족했기 때문에 추호도 샤 선생과 견해를 달리 할생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그녀의 조국이 만주국이라고 배웠다. 이웃 중국에는 두 공화국이 있는데, 하나는 만주국에 적대적인 장제스가 이끄는 공화국이었고 또다른 나라는 왕징웨이가 우두머리인 만주국에 우호적인 나라라고 배웠다(왕징웨이는 당시 중국의 일부를 통치하던 일본의 꼭두각시인 통치자였다). 그녀는 만주가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은 배우지 않았다. - P102

샤 선생은 오랫동안 황제 푸이는 일본인들이 행하는 이런 나쁜 짓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했었다. 황제가 사실상 일본인들의 포로이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이가 일본을 부르는 방식이 "우리의 친절한 이웃 나라"에서 "형님 나라‘로 바뀌고 다시 "부모 나라"로 바뀌자 샤 선생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치면서 그를 "저 바보같은 겁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샤 선생은 만주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잔혹행위의 책임을 황제가 어느 정도 져야하느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2건의 충격적인 사건이 샤 선생의 세계를 확 바꾸어놓고 말았다.
1941년 말의 어느 날, 샤 선생이 진료실에 있는데 그가 한번도 본적이 없는 한 남자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누더기를 걸쳤고 야윈 몸은 심하게 구부러져 거의 포개지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사람은 철도 노동자인데 심한 위장병에 시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1년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무거운 짐을 나른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그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자기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먹여살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샤 선생은 그에게 약해진 위가 그가 먹어야 했던 거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1939년 6월 1일 정부는 이제부터 쌀은 일본인들과 소수의 부역자들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대다수의 현지인들은 도토리죽과 수수로 연명해야 했다. 이것은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이었다. 샤 선생은 그에게 얼마간의 약을 무료로 주고, 외할머니에게 암시장에서 불법으로 사온 쌀을 조금 주라고 했다. - P105

이틀 후 전교생이 샤오링허가 굽이쳐 흐르는 서문 밖 황량한 눈덮인 벌판으로 행진했다. 인근 지역 주민들 역시 촌장들의 인솔로그곳으로 왔다. 아이들은 그들이 "대일본제국에 순종하지 않는 나쁜 사람을 벌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문득 친구가 일본군 경비병들에게 끌려 바로 어머니 앞으로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쇠사슬에 묶여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고문을 당한 그 소녀는 얼굴이 잔뜩 부어서 어머니도 잘 알아볼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본군 병사들이 총을 들어 그녀를 겨냥했다. 그 소녀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입에서는 아무 말도나오지 않았다. 총성이 들렸고 소녀는 눈에 선혈을 뿌리며 앞으로푹 고꾸라졌다. 일본인 교장 "당나귀"가 학생들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는 북받치는 감정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는 이제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빨간 핏자국 위에 누워 있는 친구의 시체를 억지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누군가가 흐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젊은 일본인 여교사 다나카였다. 어느 틈에 다나카 선생에게로 다가간 "당나귀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 발길로 걷어찼다. 땅에 쓰러진 다나카 선생은 몸을 굴려 교장의 발길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교장은 계속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교장은그녀가 일본 민족을 배신했다고 으르렁댔다. 마침내 "당나귀"가 발길질을 그치고 학생들을 올려다보며 학교로 향해 행진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구부러진 여선생의 몸과 친구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억지로 증오심을 삼켰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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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지금 여기에서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김성우

언어와 삶이 맺는 관계는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를 바꿀 수 있을까? 변화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며 변화의 동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연대하고 성장하는 말은 어떻게 가능할까?
전통적으로 언어와 삶의 관계는 말이 세계를 얼마나 잘 반영하는지묻는 방식으로 탐구되어왔다. 이 틀 안에서 보면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은 옳지만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말은 그릇되다. 참과 거짓, 이 두 가지 범주는 문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내 말이 맞아." 혹은 "네 말이 틀렸어."가 말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가가 되는 셈이다. - P9

최근 동영상매체의 부상은 새로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2018년 《뉴욕타임스》가 발행한 특집 기사의 제목은 무려 ‘탈텍스트미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Post-text Future)‘이다. 기사는 "우리가 온라인에서 경험하는 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변화는 텍스트의 쇠퇴와 오디오, 비디오의 파급 및 영향력의 폭발적증가에 있다."라는 논쟁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문자매체가 조만간 사라질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온라인에서만큼은 오디오와 비디오에 주도적인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초등학생들이 문자매체보다 영상을 통한 정보 접근을 선호한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책이나 백과사전, 심지어 검색엔진도 아닌 유튜브가 지식의 제1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영상 정보채널의 다양화, 스트리밍 서비스의 인기 등은 동영상 중심의 미디어 환경을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교과서와 ‘전과‘를 중심으로 기초교육을 받은 40~50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정보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이는 단지 매체의 다양화에 그치지 않는다.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는 우리가 시간을 구획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정보채널을 변화시키고, 사용하는 감각의 비율을 변화시킨다. 개인이 음식을 섭취하여몸을 만들어가듯, 우리가 접하는 매체는 사고와 정서의 뼈대를 만든다. 그렇기에 이 시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인식하고지식을 구성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 맺기의 양상을 구성하는 방식의 거대한 변화다. 읽고 쓰기의 풍경 또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문해력의 추락에 대한 우려가 커져간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도도한 흐름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항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하다. - P11

먼저 글, 즉 문자언어의 습득입니다. 말의 세계에서 글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필수라는 뜻이죠. 둘째는 이를 통한 지식 및 정보에의 접근입니다. 글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어떤 정보, 지식, 데이터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게 되겠죠. 세 번째는 이에 기반한 문제해결 능력입니다. 문서를 이해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리터러시는 글을 배우고 사용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렇게 놓고 보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같지만 사실은 이들이 모두 엮여서 문식성의 발달을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문자언어를 전부 습득한 다음에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관련된 단어나 표현을 찾아보면서 문자언어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동시에 해당 상황을 타개할 수있는 것입니다. - P17

고대에는 ‘문학과 학식‘이, 중세에는 ‘라틴어‘가 근대 이후에는 ‘모국어‘가 리터러시 개념의중핵으로 제시되고 있어요.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마다 리터러시에 대한 태도나 그에 대한 가치 부여 방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불변하는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적절한 의미가 구성돼온 것이죠. 이처럼 리터러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제도적, 사회문화적 환경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디지털 환경이 고도화되고 동영상 등의 매체가 급부상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리터러시의 범위와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검토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18

하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동영상이나 멀티미디어 보조교재를 활용하고 일부 수행평가에 활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시험은 기본적으로텍스트잖아요. 평가체제의 근간이 텍스트라는 거죠. 수능도 마찬가지고요. 10대, 20대는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예요. 삶에서 늘 접하는미디어가 동영상과 이미지, 소셜미디어인데, 이것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어른들에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더 비판적으로는 젊은 세대가 삶 속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평가할 만한 잣대가 어른들한테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겠죠. 여전히 성인들은 자기들이 할 줄 아는 것을 기준으로 새로운 세대를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배운 대로 가르치고, 평가받았던 대로 평가하고 있는 형국이죠. 하지만 젊은 세대의 삶은 많은 부분 교과서적인 텍스트와 별 관련 없이돌아가고 있죠. 유튜브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테고요.
그러니까 성인들이 10대 전후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공부할 시간을 반밖에 주지 않고 평가한 다음에왜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비난하는 거랑 비슷하죠. 그건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하면서 이를 통해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심화되는 거죠.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같은 경우에는 대개 어렸을 때부터 동영상을 접하거든요. 텍스트를 본격적으로 접하는 건 그다음이에요.  - P32

이런 상황에서 문해력이 탄탄하지 않았던 사람들, 평생 동안 텍스트를 기반으로 지식을 쌓는다든가, 배경의 맥락을 파악하든가, 신문기사나 책을 두루두루 읽어서 사회현상을 파악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한테 전혀 다른 미디어가 주어진 거예요. 쉽게 소식을 접하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한테 일종의 신세계가 열린 거죠.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할 도구나 무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최신의 고급 정보가 실시간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그 통로가 카카오톡이나 유튜브 동영상인 거죠.
이 상황이 전적으로 그분들의 잘못은 아니죠.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약했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거잖아요. 교육받을 기회 또한 상대적으로 적었고요. 흔히 말하는 비판적인 리터러시를 갖출 만한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카카오톡이나 유튜브가 이분들의 세계가 되어버린 거예요. 저는 사회적·교육적 공백이 그런 분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그 세대에게 체계적으로 리터러시를 키워주거나 비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책을 소화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의 거짓 정보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소통과 표현에 대한 욕망이 둑 안에 갇혀 있다가 새로운 채널로 출구를 찾은 거니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40대나 50대에게는 되게 한심해 보이는 겁니다. " 도대체 노인네들은 왜 저러냐?" - P36

그런데 지금은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를 일일이 알 필요는없지만, 그것이 주는 정동(affect)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정동은 언어로 의미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인문사회과학에서 ‘정동적 전회 (情動的 轉回, affective turn)‘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것이 의미하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단일 문해력에서는 이해와 의미 파악이 중요했다면, 지금과 같은 멀티리터러시 상황에서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동이 발동되고 있는가를 알고 공명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케이팝 스타의 유튜브에 전혀 알 수 없는 태국 글자로 댓글이 달려 있고 또 한자가 적혀 있고 하지만, 거기 붙어 있는 이모티콘과 느낌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정동적 독해라고 하는 게의미론적인 독해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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